수상수필
게시판 > 수상수필
옛날 얘기, 버스-1 덧글 0 | 조회 14,803 | 2009-04-17 00:00:00
정동철  


버스 정류장의 할머니
1998

망설이다 결국은 눌렀다.
돌 사진을 찍은 지 불과 2개월, 손녀는 생소하다 싶으면 덥석 잡거나 만지는 일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일단 나의 손을 끌어댄다. 필경 안심이 안 되어서 일게다. 이유는 14개월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 터득한 것이겠지만 탐색(探索)이라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분명하다. 어디서 배워온 행동일까? 자라 등에 놀란 기억은 없었지 싶다. 어찌해서 손녀의 뇌(腦)는 그렇게 운영되고 있을까?
내가 누른 것은 버스 속의 정지(停止) 버튼이었다.
안내 방송에 따라 내려야 할 곳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눌러대는 그 버튼을 누르기까지 나는 사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몇 차례나 마음뿐, 거친 버스의 흔들림 속에서도 출구 쪽으로 미라 나와 운전기사에게 내리게 될 거라는 암시를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 관례였었다. 버튼으로 사람을 조정하는 것이 왠지 마음에 내키지 않았던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그날은 작정을 하고 탔다. 그래서 눌렀다. 다소 맥박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정지 버튼을 누른 것이다.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말이나 몸짓 대신 기계적 신호를 통해 하인 부리듯 명령을 내린 셈이다.
그게 무슨 연유로 그토록 힘들었을까? 내가 손녀를 닮았나, 손녀가 나의 유전 정보를 물려받은 것인가?
가락시장에서 내렸다. 뭔가 큰 일이라도 한 듯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마치 현대인의 대열(隊列) 속에 비로써 낀 듯한 느낌이다. 갈아탈 버스를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데 유난히 정갈한 할머니 한 분이 눈에 울컥 들어왔다. 까마귀 무리 중의 백로처럼 전연 어울리지 않았다. 어딘가 어머니 같은 그런 분위기가 물씬 스며들어 음질 놀랄 정도였다.
한동안 시선은 할머니에게 정지되어 있었다. 몸집은 작았지만 매무새하며 가지런히 빗어 넘긴 쪽틀의 비녀가 곱살한 피부색과 단아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정지된 시선의 진짜 이유는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할머니는 엿 모판 앞에 서서 끌을 데고 장도리로 엿을 떼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설펐다. 있어야 할 곳에 있어선 안 될 할머니는 손잡이까지 쇠로 된 조잡한 장도리로 연약하게 끌을 때리고 있었다. 아니 때리는 것이 아니라 끌로 엿을 밀어내는데 힘을 모으고 있었다. 철렁철렁 엿 파는 아저씨가 인심 좋게 큼직한 가위로 척척 떼어주던 옛 생각이 고작인 나로선 너무 연약하고 생소했던 탓이었을 것이다.
버스가 신호등을 받고 한꺼번에 밀려왔다. 시선은 바뀌고 이내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버스를 타본지가 퍽 오래됐다.
분당으로 이사를 한지 2년이 되었지만 지하철이나 택시를 이용하는 일은 있어도 버스를 탄다는 것은 아예 생각도 안 했었다. 아내가 코스를 개발하고는 마치 돈번 기분에다 아주 편하다는 말을 듣고 몇 차례 타기 시작했다. 처음엔 지루한 듯 별로 였으나 이내 나도 그 맛을 알게 되었다.
정류장의 버스는 서야할 곳에 서는 법이 거의 없다. 멋대로 사람들을 이리 몰고 저리 따라붙게 한다. 실히 30여m 안팍으로 허둥거리게 만든다. 점잖은 사람은 좀처럼 탈 엄두도 낼 수 없을 정도다. 어찌나 급하게 섰다간 떠나는지 결국 버스 하나를 놓치고 말았다.

승객을 기다리느라 버스가 한없이 정류장에 서 있던 시절이 있었다. 손님들이 답답다 못해 그만 가자고 해도 못 들은 척 숫제 버스에서 내려 마치 뭐가 고장이라도 난 듯 한바퀴 돌아오고서야 운전대를 잡곤 했었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서서히 백 미러를 보며 손님이 행여 오지 않나 우물쭈물 출발하는 것이 예사였다.(주: 1960년대가 그랬고 1970년대 초에도 비슷했다.)
그러더니 버스 입구에 와르르 턱없이 몰려드는 승객들로 형편이 바뀌고 말았다. 안내양의 두 팔에 운명을 걸고 겨우 출입구 어딘가에 필사적으로 의지하노라면 기사(技士) 아저씨의 능란한 핸들 솜씨로 문이 닫혀지는 그런 묘기로 풍경이 바뀐 것이다. 1차선 깊숙이 들어 갔다간 갑자기 오른 편으로 휙 꺾으면 입구에 매달려 있던 사람들은 어김없이 짐짝처럼 안쪽으로 넘어질 듯 뒤뚱거리며 쏠려 들어가게 되고 순간 안내양은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다. 그야말로 호흡이 척, 척 들어맞는 ‘만원 버스 문닫기’ 경기 같았다. 버스 안은 삽시간에 신음 소리와 고함들로 요란했다.
“나 죽어!”
“야! 운전 좀 똑바로 해!”
버스는 그 때부터 웬만하면 정류장을 거를 만큼 빨라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완전히 짐이었다.
70년대 초반을 넘기면서 바뀐 정류장의 풍경이다. 나 역시 짐짝 속의 한 사람이었고 그 와중에도 어찌 저찌 해서 자리를 잡았다하면 원고지(原稿紙)를 펴들고 교정을 해야 했던 때다. 일간지(日刊紙)와 몇 개의 주간지(週刊誌) 연재에다, 4대 여성 월간지(月刊誌) 어딘가에 나의 글이 같은 달에 실리지 않으면 안되었던 터라, 특히 그날의 일간지 연재물(連載物)은 촌각(寸刻)이 아쉬웠었기 때문에 조금은 별날 수밖에 없었다. 버스는 나의 소중한 발이자 서재였던 셈이다. 친구 영전(靈前) 앞에서까지 원고를 써야 했었던 만큼 염치쯤 모르세 해도 버스만 타면 마음이 놓였었다.
당연히 옆 사람이나 무릎 사이로 밀려들어오는 앞사람들의 중심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탓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여간 빨라진 버스는 그후 가속이 붙어서인지 지금은 사람이 텅 비었어도 기다리지를 않게 되었다. 설 듯 탈 사람이 없는가 싶으면 그대로 스쳐 달려가고 마는 것이 오늘의 버스다.
닭 쫓든 개처럼 달아나는 버스 뒤꽁무니를 멍청히 바라보았다. 쌉쌀한 군침을 삼키며 이리저리 부딪치는 사람들 사이에 이번엔 여러 좌판들이 나의 눈 속으로 끼어 들었다. 사과와 감, 그리고 무슨 푸성귀들이 있었고 거기 또 다른 할머니가 보였다. 지퍼가 달린 돈주머니 앞치마를 걸친 것을 보면 이력(履歷)이 몸에 밴 할머니가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감을 싸랴, 돈을 거슬러주랴, 그리고 푸성귀를 보면서 손님에게 뭐라 대답하랴 바빴다. 검스레 주름진 손은 익숙했다.
순간 마실 길에 난데없이 엿판을 끼게 된 듯 했다는 착각이 발동됐던 할머니 쪽으로 다시 시선이 옮겨갔다. 아무도 관심을 보내는 사람은 없었다. 이젠 장도리 마저 손에 들려져 있지 않았다. 잘라놓은 엿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가락시장 버스 정류장엔 상인(商人)들이 퍽 많았다. 유심히 보니 의외로 할머니들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땅바닥에 물건들을 벌려놓고 있었다. 변변한 진열대라곤 없었다. 언제든지 자리를 뜰 태세가 준비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좋은 길목과 백열등까지 동원된 포장마차 같은 것들은 모두가 젊은 남정네들의 차지였다.
IMF가 아니더라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지만 도대체 할머니들은 얼마쯤이나 손에 쥐게 될지 궁금했다. 달려드는 버스들의 행선지 번호를 연신 쳐다보면서 엿판의 할머니 곁으로 다가갔다.
“어떻게 파세요? 얼마 해요?”
할머니는 잔잔하게 그러나 조금은 차가운 듯 느릿느릿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나의 얼굴을 빠끔히 더듬었다.
“가만있자… 혹시… 정 박사님이 아니시던가?…왜? 살려 우?”
심장(心臟)이 가느다랗게 움찔했다. 죄(罪)지은 것도 아닌데 뭔가 들킨 기분이었다. 순간 떡 파는 할머니에게 얻어맞았다는 당대(唐代) 국사(國師) 금강(金剛) 박사의 얘기가 사타구니 밑을 파고들었다. 써늘했다.
점심 요기로 떡을 주문했다는 중국의 선담(禪談)이다.
「어제」는 물론 「내일」일도 뭐가 뭔지 모르는 터에 도시 보 잘 것 없는 노파를 보고 시간 어디에 점을 찍었기로 감히 「점심(點心)」을 달라 하느냐고 사뭇 의아해 했다는 그 얘기가 머리를 쥐어박았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도대체 나의 정체를 어떻게 알아차린 것일까? 내가 뭔가 거드름을 부렸나?
애초부터 오락 프로엔 나가지 않는 철칙을 나름대로 지켜오긴 했었다. 요즘은 강연(講演)은 물론 교양(敎養) 프로가 분명함에도 TV든 강당이든 코미디언 이상으로 일단 웃겨야 한다는 주문 때문에 거절하곤 하지만 전부터 가끔씩 인용하던 금강(金剛) 박사의 모습이 바로 피부 가까이 코앞에 바짝 다가선 것을 느꼈다.
대체 가락시장 정류장에서 갈아타려는 마음은 우연이었을까? 괜 시리 할머니와 마주쳐 파문을 움켜잡게 된 연유가 무엇일까?
그 때였다.
일단의 버스가 파란 신호등을 받기가 무섭게 또다시 몰려왔다. 마침 거기 바로 갈아타야 할 좌석 버스 116번이있었다. 황급히 줄행랑칠 명분을 찾았다.
사람은 누구나 너나할 것 없이 내쳐 끝까지 가기는 어려운 일이라면서 말이다. 갈아타고 또 갈아타고 아직도 갈아타야 할 길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모르는 인생살이, 만남과 이별, 그리고 설렘과 슬픔이 뒤섞여 여울지는 정류장은 여기뿐이 아니 것만 미친 사람처럼 쓰잘데 없는 비약(飛躍)의 노예가 되어 나는 허겁지겁 그래서 꿈틀했던 것은 정말 웃기는 일이라 생각했다.
얼마나 버는 것일까? 어떤 형편으로 하필 어울리지도 않는 엿 모판을 끌고 정류장에 나와 있어야 했을까, 집엔 사람들이 그리도 없단 말인가… 하고많은 일 중에 할머니들은 왜 거기에서 그렇게들 있어야 할까?
사 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파는 사람들이 있음은 물론, 5일 장터 어느 한 모퉁이가 있어야 하는 것과 다를 것은 없을 것이다. 엿 파는 할머니, 사과 파는 할머니, 장난감 파는 할머니, 속옷 파는 할머니, 그리고 할머니, 할머니들......, 그들의 마음은 어디에 머물고 있었을까?
한동안 헐떡거리는 숨 때문에 달리고 있는 버스를 잊고 있었다. 어느 만큼에서인가 마음이 진정되었다 싶었는데 별안간 정류장에 뭔가를 잊고 온 느낌이었다. 맞다. 버스의 번호를 정확하게 봤었는지 깜박한 것이다.

44년 전 대학(大學)으로 갈아타려는 기로(岐路)의 숨막히는 순간 나는 번호를 놓친 적이 있었다. 합격방(合格榜)의 두루말이가 동숭동 대학 본부 앞마루 화강석에 펼쳐지고 있을 때 나의 수험 번호 3752가 암흑 속으로 건너뛰자 순간 무너지는 머리를 떨구고 패잔병이 된 적이 있었다.
누군가가 외쳤다.
“야! 축하한다. 축하해!”
보고 또 보고 그래도 믿어지지 않아 썰물처럼 희비(喜悲)가 지나간 몇 시간 후 또 보고서야 비로써 갈아탈 대학교, 말하자면 인생 버스를 확인하고선 냅다 집으로 달리기 시작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버스 안을 두리번거렸다. 목적지의 번호는 안에선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밖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정류장이 아니고선 볼 수 없는 번호, 그것은 마치 나의 모습을 내 것이면서 거울 없이는 볼 수 없는 것과 같았다. 약속(約束) 위반(違反)의 버스 행적(行蹟), 그것은 또 다른 나의 한 면을 말해주고 있는 듯 했다. 누군가 응대할 사람을 찾으려 기웃거렸다.
연초의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두 번이나 버스를 잘못 탄 적이 있었다. 술을 마셔야 할 일이 있는 등 특별한 날이 아니고선 버스를 거의 타지 않는 까닭에다 숫자 외우기가 얼 띠어 5백원 짜리 일반 버스와 천 원 짜리 좌석 버스의 번호를 잊곤 했던 탓이었다. 좌석 버스는 집 앞에, 일반 버스는 병원 바로 앞에서 선다. 아내가 알려준 후론 지하철을 타지 않게 된 대신 숫자가 아리송해서 곤욕을 치렀던 경험이다. 타고 보니 버스는 나의 집 앞을 지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아름 마을에서 그중 가까운 곳이 어디죠? 아저씨! 거기 세워주세요., 네?”
잘못 탄 죄는 나였는데 기사(技士)는 말 대신 세차게 엑설레이터만 눌렀다..
분당 차병원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내리면 되나요?”
“……그래요.”
준비를 하는데 웬 젊은 남자가 일러주었다.
“아니에요.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세요. 다리 하나 건너면 바로 거기가 아름 마을이에요. 한 정거장만 더 가세 세워달라 하세요.”
기사 아저씨에게 들으라는 듯 마지막 말에 힘을 주며 내렸다.
“그래요! 고마워요.”
그가 내리자 기사는 머쓱했는지 더 세차게 달리다 우악스레 차를 세웠다.

가락시장에서 갈아 탄 버스는 다행스럽게도 집으로 가고 있었다.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듯 왠지 좋았다. 돈 만원이 떨어졌다고 여기니 더욱 신이 났다.
분당으로 온 초기엔 택시를 이용했었다. 일반 택시는 7천5백원이 나오지만 두 배를 주어야 한다. 메타보다 얼마를 더 얹어주어야 하는지 저울질을 하는 것이 싫어 한동안 모범 택시를 타고 다녔었다. 마음 편하게 만3천 원이면 되었기 때문이다.
버스의 묘미를 안 후부터 단돈 천5백원으로 오간다. 그날 나는 적어도 만원을 번 셈이라 발걸음이 가벼웠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서는데 웬 일인가, 마음은 다시 가락시장 정류장으로 가버렸다.
할머니 엿은 좀 팔렸을까?
숫자에 약하다더니 계산은 제법 빨랐다. 할머니가 말하는 듯 귓전에 고압선(高壓線)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마음의 점(點)은 수자(數字)에 찍혀 있었군…’
애당초 정지 버튼을 누르기로 작정했을 때부터 그러고 보니 나의 마음은 숫자에 점이 찍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손녀의 영리한 손은 나의 유전인자(遺傳因子)를 물려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의 힘이 닿지 않을 때 나의 손을 빌리려는 것이었다. 뿐인가 나와는 다른 며느리의 유전 정보를 걸러 받았을 것이기에 정지 버튼을 누른 나의 마음과는 같을 턱이 없었다.
나는 고등학교라는 버스에선 수학 시험 때 답안지를 다섯 장이나 쓴 적이 있었다.(주: 공부를 어지간히 못해 will과 well을 구분도 못하던 내가 부산으로 피난을 가 냅다 공부를 하게 되어 초량 뒷산 천막 속의 교실에서 수학을 유별나게 잘하게 되었던 탓에 친구들이 시험 때면 내 주변에 몰렸다. 등수가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나는 순순히 써주는 의리의 사나이가 되었다.) 친구들을 위해 대신 적어주느라 그들은 100점이었고 나는 95점이었으니까 숫자와 계산은 역시 나에게도 같은 존재가 아닐 거라고 자위를 했지만 결과는 두고 볼 일이었다.
때문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던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음엔 엿을 좀 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