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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들은 왜 지우개를 주었을까? 덧글 0 | 조회 14,895 | 2009-04-17 00:00:00
정동철  


만 1년 전, 2005년 1월 1일, 세배를 받으며 스며든 마음의 한 모퉁이를 수필로 옮겼습니다.(정동철)

손녀들은 왜 지우개를 줬을까?


이마에 포갠 두 손, 뒤뚱거리는 큰절은 어설펐다. 방안 가득한 웃음의 쉼표사이를 비집고 유치원과 초등하교 1학년에 다니는 두 손녀가 나에게 선물을 내밀었다.
예쁘게 접은 색종이 지갑.
“할아버지, 할머니, 오래 오래 사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있지 않아요, 힘 많이 내세요.“

뜻밖에도 그 속엔 지우개가 있었다. 것도 새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쓰던 지우개가 들어있었다.
지우개?
-손녀들은 나에게 왜 지우개를 새해선물로 주었을까?-

“고마워요, 우리 귀엽고 예쁜 손녀들. 남들과는 다르게, 재밌고 신나게, 알지요? 그렇게 지내는 것! 할아버지 얘기, 무슨 뜻인지? 그런데...... 웬 지우개?”
“우리가요,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니까요.”
“소중한대 왜 할아버지에게?”
“쓰다 잘 못 쓸 때 있죠? 그럴 때 지워서 다시 쓰시라고요.”
딱히 할아버지가 글쟁이라고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사실 나는 ‘칼럼리스트’나 ‘수필가’도 아니고 무슨 ‘작가’는 더욱 아니다.) 다만 단편적으로 여기저기 칼럼이나 책 속에 실린 할아버지의 사진과 이름이 있다는 기억을 통해 글을 쓴다는 사실이 남달라, 필경 지웠다 다시 써야 할 일이 많을 거라 여기게 되었을지 모를 거라는 추리는 가능하다.
지우개를 가리키며 둘째가 끼어들었다.
“여기, 이건 언니고요. 이 보라색은 저에요. 힘드실 때 우리를 생각하고 힘내세요.”
둘째는 계속했다.
“좋아하는 친구나, 누가 죽으면 있잖아요, 슬퍼 힘들 때 있지요? 요기 봐요, 언니가 있지요? 이건 나고요. 이 지우개를 보면 힘이 나요.”
‘힘’에 유별나게 힘이 실렸다.
주황색 네모바탕 양편에 빨간 세모덮개로 접은 종이가방, 영락없는 동전지갑 이었다. 그 속에 들어있던 그 지우개, 틀린 글을 다시 쓰라는 뜻은 알겠는데 할아버지에게 힘이 될 거라는 생각은 어디서 얻어온 것일까? 불쑥 지우개만 주지 않고 색종이를 정성 것 접어 그 속에 넣은 것을 보면 둘이는 제법 마음을 쓴 것이 분명하다. 대체 힘을 내라는 그 지우개가 어떤 연유로 선택되었는지 정말 그것만은 알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인 내가 연약한 어떤 모습을 보였던가?

지우개를 자세히 봤다.
네 모퉁이가 달아서 조금은 둥그레진 한쪽 면을 보니 설명하는 뜻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로제스타 스톤의 비밀처럼 할아버지와 손녀들만이 통할 수 있는 일종의 상형기호였다.
그래서였다.
“가만...., 이 지우개로 마음도 지을 수 있나요? 샘내거나, 욕심 부리거나, 미워하는 그런 마음 말이야. 할아버지 그런 마음 가질 때 많이 있거든. 그 마음도 지울 수 있을까요?”
“.....그래요, 그것도 지울 수 있겠네요.”
둘이는 합창을 했다.

지우고 싶은 기억들, 꼭 지웠으면 싶은 그런 것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지워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음이 힘들 때가 허다했고 지금도 그럴 때가 많다. 때마다 컴퓨터를 부러워했었다.
삭제(Delete) 키만 누르면 지우고 싶은 것을 바로 지울 수 있는 컴퓨터, 도스(DOS)상에서 포맷(특히 Reformat)을 하면 재생 불가능한 상태로 지워진다. 숫제 유비쿼터스(언제 어디서나 네트워크 접속이 가능한 환경)는 역설적이지만 지우개라는 말로 불릴 정도다.
정도차이지만 나의 도움을 청하게 되는 많은 사람들, 마음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지우고 싶은 기억들을 지우지 못해 저며 오는 아픔을 움켜잡고 어금니를 깨문다. 실연, 낙방, 실직, 부도, 사별, 그래서 후회, 울분, 증오, 열등감, 그리고 암울한 마음을 지우지 못해 발광을 하거나 벙어리가 된다. 지울 수 있는 방법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그렇게도 쉽게 지울 수 있는 것을 부러워하는 나처럼.....
한데 손녀들은 지우개를 선물로 선택했다. 마치 삭제키의 요정처럼.
왜지?
우리들 어른이 지우고 싶은 것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말인가?

왕진을 간적이 있었다.
오래전의 얘기다. 환자의 집이 아니라 성모병원으로.
자살이 실패되자 종합병원 특실에 입원한 여고생, 그곳 담당의사에겐 침묵이었다. 그 몇 개월 전까지 면담을 했던 나를 찾은 것은 부모였다.
“선생님! 선생님은 저의 마음을 알죠? ..... 그래요. 이젠 포기했어요. 죽으려는 마음을 포기할 께요...”
전라의 처녀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던 것은 조용하고 나직하게 힘주어 속삭이듯 말해준 뒤의 약속이었다.
십년 후 그녀는 미국에서 신문배달과 심지어 선반공장에 다니며 히스패닉계 미국인과 결혼을 했다. 힘들지만 탓하지 않고 씩씩하게 살았다.
“그 때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전 결국 자살을 다시 했을 것이고 지금 여기에 있지 않았을 거여요. 왜 살기로 했냐고요?”
부모와의 갈등, 특히 어머니와의 심각한 갈등으로 재벌 2세의 그녀가 자살을 선택했던 것은 지울 수 없는 울분과 복수심 때문이었다. 쉬운 말로 10대의 반항, 그러나 난 그렇게만 이해하지 않았고, 그는 나의 치료를 몇 년째 받다 부모에 의해 중단한 얼마 후 실패된 자살로 입원했었던 것이다.

보름 전 나는 아산중앙병원으로 또 다른 왕진을 갔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특실, 50대 후반의 여인은 몰라보게 수척하게 변했다.
“바라는 것, 잘 알고 있어요. 어떻게, 어떻게 도와주면 될까요?”
“선생님! 선생님만이 절 도와줄 수 있어요. 저를, 저의 모든 것을 병원에 기증할게요. 부탁했던 안락사를 꼭 시켜주세요. 시집 장가 다 보냈고 할 일 다 하지 않았어요? 저는 영원히 잠드는 게 소원이에요. 하느님 곁으로 가고 싶어요. 저 남자(남편) 요즘 아주 잘 하지만 소용없어요. 선생님, 선생님은 하실 수 있지 않아요? 꼭 좀 부탁할게요. 흘러가는 저 강을 볼라치면 뛰어들고 싶은 생각이 내내 마음속에 흐르고 있어요.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선생님, 미안해요. 그러나 저의 부탁 들어주시겠죠? ... ”
자살, 그녀는 오로지 자살에 열중해있었다. 대체 그 자살욕구를 왜 지울 수가 없을까? 손녀가 준 지우개라면 지울 수 있었을까?
지울 수 없는 병, 그런가하면 지워질 뿐 재생 인출이 안 되는 병, 정신과의사의 고충이다. 나에겐 그들 마음의 아픔을 깨끗하게 지울 수 있는 ‘지우개’가 없다. 훗날 그녀는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아들딸에 의해 퇴원을 했고 결국 집에서 자살을 하고 말았다. 증오심과 한을 지우지 못한 채 그렇게 떠난 것이다.

손녀들은 그렇게도 잘 지울 수 있는 것을 나나 그들은 왜 지우지를 못할까?
삐뚤어진 글씨나 그림, 틀린 것은 곧바로 쉽게 지우는 것이 손녀들이다.
쓰는 것보단 잘 못 쓴 글씨를 지워야하는 것이 그들에겐 더 많다. 그만큼 지우개는 중요하다. 지웠다 다시 쓰고, 잘 못 쓰면 또 지운다. 잘 못 쓴 것을 알았을 때다. 알면 그것을 바로 지우는 마음이 늘 거기에 있다. 정확히 표현하면 이미 그들은 지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바르게 그리거나 써야할 것을 알고 있기에 지울 수 있다. 지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쓴다는 뜻이다. 그것은 편치 않은 마음을 쉽게 지울 수 있는 것과 같다. 놀라운 신세대의 꼬마철학이 숨어있는 셈이다. 잘하기 위한 것이 우선하는 게 아니라 문제점을 최소화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견성성불(見性成佛)과도 같은 의미가 있다. 타인으로부터 위로를 받거나 환경적 불안을 탓하는 것보다 자신의 개성화, 천부적으로 특화된 자신의 문제점을 위한 개선이 최대의 덕목일 것이라는 의미다. 칭찬이나 눈총을 받지 않기 위한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뜻이 숨쉬는 것이다. 지우개는 그래서 소중하다. 삐져 글썽이거나 토라져 화를 내지만 언제 그랬던가싶어 금방 지워버린다. 그것이 그들이 좋아하는 본래의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이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나와 아내에게 언제나 활짝 터지는 기쁨을 주는 것은 늘 바르게 지워 원래의 모습으로 고쳐가지려는 마음들이 있기 때문이다. 손녀들은 그만큼 언제나 맑다. 하는 것 모두가 꾸밈보다 솔직함 그 자체다. 아침 이슬사이로 신선하게 솟아오르는 풀잎처럼 싱그럽다. 와락 껴안고 싶은 마음과 눈 맛,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들이킬 수 있는 새벽별 같은 마음들이 초롱초롱 거기에 빛나고 있다.

비하면 나의 마음은 구차하다. 아니 오물 투성이다.
냄새가 너무 가소롭다. 그럴듯한 향수 같은 말 뒤엔 역겨운 구취가 예외 없이 숨어있다. 나이 들수록 말뿐 마음은 칙칙하고 고약하다. 지우지 못하는 병을 가지게 된 것은 사필귀정, 지우기는커녕 오히려 고집스레 끼고 산다. 결코 지우려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지울 생각이 없다. 바로 늙은 나의 고집불통이다. 지우개를 숫제 잊고 사는 실정이 아니던가.
지우개를 쓴 적이 아득하다. 마음의 지우개가 없는데 지우겠다는 말이 가당치 않으련만 뻔뻔하게도 정치적 기자회견처럼 항상 새빨간 거짓말로 지우개를 잊은 지 오래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왔다. 감히 하늘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다며 지우개가 필요치 않다는 투였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반복되는 의문, 지우개가 나에게 꼭 필요하다는 것을 손녀들이 알아차린 것은 무엇을 통해서였을까?
그들의 기억은 복잡하지 않다. 늘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할아버지지만 이런저런 책 속의 나의 모습을 통해 지워야 할 글을 상상하게 된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라 했다. 하지만 끝내 풀리지 않는 의문은 여전히 지우개를 통해 힘을 낼 수 있을 거라는 상상이다.
곱씹었다.
누님이 돌아가신 것은 한 달 전의 일이다.
거의 처음 보다시피 했던 병상의 고모할머니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첫째, 그리고 그런 모습에서 뭔가를 읽은 둘째는 고모할머니가 돌아가시자 할아버지의 표정 어디에선가 슬픔을 읽었을까? 그들의 아빠가 늦은 밤 검은 넥타이를 매고 들락거릴 때 거기서도 역시 슬픔의 조각들을 느꼈을지 모른다.
늙으면 죽게 된다는 것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 죽으면 안돼, 할아버진 죽지 마!”
죽음은 헤어진다는 것, 그래서 가지 말라는 것이기에 그렇게 말했던 둘째는 그의 기억에서 이미 사라진 몇 해 전의 말이다. 그러나 그 연속선상 어디엔가 할아버지에게 자신들이 큰 힘이 될 거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가보다. 만날 때 뽀뽀, 헤어질 때 또 뽀뽀, 그들은 할아버지의 소중한 손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으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살고 있다고 여겼을 거라는 점에서 그들이 힘이 될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지우개가 선택된 것은 바로 그들이 말한 그 ‘소중함’에 있었다는 뜻이 아닐까? 자기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할아버지에게도 소중할 것이라는 연상 작용은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값진 선물, 난생 처음 가장 필요한 선물, 그것도 지금이 아니고선 영영 그 진의를 알아차릴 수 없을 선물, 그야말로 정신이 번쩍 드는 선물, 고맙고 뿌듯하기만 한 선물, 너무 너무 벅차기만 하다.
조만간 레이건이나 리타 헤이워드처럼 유명하지는 않아도 결국 나는 치매노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잊어선 안 될 손녀들에 대한 기억마저 삭제되어 지우개가 오히려 원망스런 그런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것은 전적으로 확률상의 문제다. 65세 이상의 노인 백 명 중 두 사람, 2%가 치매다. 나는 70세, 그 확률은 더 높아지고 있다. 인생은 아무도 모르는 확률의 세계에서 산다. 영리한 손녀들이 그때가 되면 결코 지우개를 선물로 하지 않을 것이기에 지금의 이 엄청난 기쁨을 느낄만한 여지가 아예 없어질 것이다.
얼마나, 얼마나 다행인가.
지워야할 미움, 지워야할 샘, 지워야할 체면치레, 지워야할 욕심, 말하자면 그런 마음을 지울 수 있는 지우개를 받았으니 말이다.
곱게 접은 종이지갑 속의 지우개, 그것은 나의 서랍 속에 소중하게 간직되어 어느 훗날 이 글과 함께 그들의 마음 어딘가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2005.01.01.

참고:
금년 2006년 1월 1일 세배를 받으면 이 글을 담은 디스켓과 함께 지우개를 포장하여 며느리에게 주었습니다. 대학생이 되는 날 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