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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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수필 덧글 0 | 조회 15,967 | 2009-04-17 00:00:00
정동철  


<별 명>
2004.09.: 홈페이지 개편으로 지난 해 실렸던 내용을 수상/수필란으로 옮김.

말대가리, 깎은 밤, 말코, 지에므시(GMC), 도라무통, 아가리, 아오마쓰... 얼핏 떠오르는 별명들이다. 내 주변에 맴돌던 별명이었기에 지금도 주인공들이 선명하다. 그리고 피식 웃는다. 재미있으니까.
늘 보는 여학생들에게도 우리끼리 통하는 별명을 공짜로 작명하곤 깔깔거린 적도 있었다.
무턱, 벤또, 들창코, 마귀, 불여우, 걸레, 무대가리,......

별명이 대체 왜 생겼을까?
생각이 두꺼비처럼 엉뚱하게 뛰었다.
한가롭다는 뜻인가? 일거리가 없다는 얘기겠지.
내친김에 손녀에게 물었다. 초등하교 1학년짜리의 세계는 어떨까 궁금했다. 별명도 나이 따라 다르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해장국, 술안주, 이동갈비, 박주가리, 별, 고질라, 박대가리, 새우, 새파리, 정수기, 병아리, 물뿌리개, 백원, 아바타, 비옷, 스티커, 조폭, 반칙왕,(주1) 주걱턱.....
일 학년짜리 초등학교의 수준에 웬 술타령? 아바타를 제외하고는 조폭이라든가 반칙왕은 의외였다. 웃긴다. 세월 따라 별명이 변하리라 예상했지만 시사성이 있다는 발상은 거기서 거기다.

나에게도 별명은 있었다.
두 가지였었다.
<오줌철 똥철>과 <황금박쥐>였다.
앞의 것은 국민학교 시절, 발음과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똥같이 얼띤 이미지가 거기에 끼어든 것은 물론이다. 아인스타인의 별명 ‘게으른 개’처럼.
뒤의 것은 흰 가운을 펄럭이며 병원을 휘졌던 때의 것이다. 당시 TV만화의 주제이기도 했던 황금박쥐, 정의의 사나이가 되었다. 누가 왜 그렇게 지었을까? 정말 적수가 없는 정의의 사나이였나?

그나저나 웬 별명타령?

세상이 태평성대도 아닌 터에 할 짓이 없어 개 뼉따구 같은 생각으로 시간을 잘라먹느냐 핀잔이 날아오면 방패가 없다. 잠깐, 그러고 보니 정말 ‘개뼉따구’라는 친구도 있었다.
하여간 밑도 끝도 없이 떠오르는 백일몽도 연유가 있는 법인데 뭔가는 뜻이 있을 것이다.
솔직히 고백해야겠다.

사오정, 38선, 오륙도가 백수타령(주2)을 말해준지는 오래다. 번뜩이는 젊은 머리들이 어찌나 번개 같은지 어디선가 문법은 싹 무시하고 ‘싸이 질’ 어법으로 뚱딴지같은 말이 튀어나온 것이 발단이었다.
-<백설 공주>랑 <노시게!!>-

형광등은 결국 불이라도 켜진다. 뜬금없는 이 말은 아무리 돌려봐도 머리통에 불이 붙지 않는다. 고고학적 방법론을 들이대도 해독할 길이 없는 암호? 별명의 합성어? 나는 외계인이 된 느낌이다. 종종 아무개를 모르면 <간첩>이라 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그런 단어자체가 화석으로 변한지 오래라 <간첩>같은 얘기도 아닐 거라 그저 외계인이란 말이 딱 어울리지 싶다.
하여간.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지만 답은 꽉 막혔다.

어린시절 나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어른이 되면 이름을 바꾸겠지?
<정동철>은 어린이 이름이지 어른은 결코 아니라 여겼다. 글세나, ‘똥철 오줌철’이라 그랬을 것이다. 동무들의 이름도 그땐 결코 어른의 이름이 아니었다. 어른이 되면 껌이나 열개쯤 한꺼번에 씹어보겠다는 것이 소망이었으니 머리통이 그 이상 돌아갈 턱은 없었을 것이다.
최근에 와서야 몇 광년의 별빛처럼 되돌아온 의미를 알게 되었다.
아명(兒名), 그리고 호(號)나 자(字)니 하는 의미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 놈의 뭐 ‘백설 공주’는 역시 감감이다.

나에겐 호(號)라는 것도 있다.
70년대 후반 로터리 클럽에 가입되면서 호(號)가 있어야 된다면서 기봉(麒峰)이란 호를 가지고 있던 대학 친구가 붙여준 것이다.
예의 ‘배설 공주’는 결코 호(號)나 자(字)일리는 없다.
대체 뭐지?
별명, 점잖게 말해서 호(號)라는 것은 그 사람을 상징하는 캐릭터다. 국어학자가 아니라 헛짚을 공산이 전부지만 별명의 참뜻 중의 대부분의 것은 분명 호(號)와 같은 상징어다. 그 사람의 뭔가를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름에 연상되는 뜻, 태어난 고장, 신분, 그 사람의 외모가 말해주는 것, 요컨대 몸씨, 말씨, 솜씨, 마음씨 뭐 그런 것이 붙어 나온 것이 별명일 것이다. 이름 석자가 주는 단순 연상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대게는 호(號)가 상징하는 것과 거의 같다는 얘기다. 다름이 있다면 호(號)는 유식한 한자를 쓴다는 것뿐이다. 예컨대 추사 김정희는 완당, 예당, 시암, 불노 등 호(號)가 500가지, 다산 정약용은 10개나 된다하니 그들의 캐릭터는 그야말로 팔방미인이다.
그렇다면 그놈의 <백설 공주>와 <노시게>라는 것은 별명인가, 아니면 은어인가, 호(號)인가, 정말 아리송할 뿐 종잡을 수 없는 깍두기다.
하여간 뭔 말인지 모르고 넘어가기로 해야겠다. 사자성어(四字成語)로 개그맨은 잘도 푸는 마당이라 까짓것 떠오르는 대로 갖다 부치면 안 될 것도 없긴 하겠지만 만만치가 않다.
황금박쥐도 그렇다. <황금만 박박 갉아대는 쥐새끼>가 황금박쥐일 수도 있다. 실제 그래서 얻은 별명일지도 모른다. 썩 좋은 기분은 아니지만 웃어야지 어쩔 건가. 원래 궁금증을 달래는 것이 식성에 맞지 않지만 하도 수상해아는 척 껄껄거리며 넘어가기로 해 버린다. 그러노라니 결국 별명이라는 단어로 불똥이 전염되어 버렸다는 얘기다.

한가한 짓거리다.
그러나 실은 한가한 얘기가 아니다. 진솔해져야겠다.
<3-8-6세대>라는 말은 민주화운동권이 싫어한단다. 3.1절, 8.15. 그리고 6.25를 모르는 세대로 누군가에 의해 오도되었다는 이유다. 한가할 수 없다.
별명은 분명 <내>가 아니다. 그렇다고 나의 이름 석자가 <나>일수도 없다.
압구정동에 갈라치면 무척 다양한 차들이 많다. 몇 억짜리 호화 외제로부터 몇 십만 원짜리 낡은 국산차에 이르기까지 요란하다.
좋은 차를 탄 사람이 그게 자기라고 뻐길지 모르지만 결코 그건 <자기>가 아닐 것이다. 자기의 것은 분명하지만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뜻이다. 운전을 하는 사람이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디카의 줌을 들이대면 차 속의 운전하는 몸이지 <자신의 정체>라고는 할 수 없다. 운전하는 자신을 조정하는 그 <마음>이 그의 알짜 <자신>일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 몸은 차와 같다. 나를 실고 다니는 차, 거기에 이런저런 이름, 브랜드를 붙여놓고 명품이라느니 쓰레기라고 웃고 찡그릴 뿐이다. 브랜드라는 것이 결국 이름이자, 별명이며, 호(號)이자 자(字)가 된 셈이다.
자신의 정체와 관계가 없는 차 껍데기를 보고 해장국이라거나 황금박쥐, 또는 <백설 공주>(주3)나 무슨 <깎은 밤>이라고 하면서 호들갑이다.
그러고 보니 진짜 나는 어디 있는지 정말 궁금하다. 아무리 둘러봐야 고작 별명에다 호(號)아니면 무슨 기호가 붙지만 그게 나라고 할 수 없다면 외계인이거나 우주 미아처럼 뻥 뚫린 UFO다.
그래도 그건 이름이라도 있다. <노시게>가 잠깐사이에 <노시개나>(주4)로 변했다. 사자성어(四字成語)로 변신했으나 지시형 명령어에 속하긴 마찬가지라 어떤 백과사전을 찾아봐도 이름이라 할 수 없어 답답하다. 어디서 쏟아지는 은어인지 <애개개>(주5)라는 별명(?)까지 끼어들어 어지럽다. 끝내 <황금박쥐>(주6)의 진실 또한 모르긴 마찬가지다.
제기랄, 괜스레 시간만 낭비했다는 생각에 떫은 기분이 가시질 않는다.
진지하게 좀 건지는 가 했더니 나의 정체도 찾지 못하고 횡설수설 그야말로 ‘개 뼉따구’다.

별명이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