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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마음-2 덧글 0 | 조회 15,810 | 2009-04-17 00:00:00
정동철  


-80년 12월 어느 날-
참고: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의 얘기다.

예상 밖의 폭설이다. 눈이 펑펑 쏟아진다.
스산한 3층 대합실, 네거리를 대각선으로 향한 면이 전부 유리창이기에 나는 석고처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차게 꽂혀 내리는 눈발을 챙겨보다 짐짓 세훈(世勳, 초등학생)(주-1)이 생각이 들이닥쳤다.
녀석 몇 시에 끝나지?
서로 내기라도 하듯, 내리퍼붓는 송이송이 눈과 눈, 행여 바닥에 쌓일세라 질주하는 바퀴와 웅크린 발자국들이 밟고 으깨며 포도(鋪道)와 차도를 감쌀 양으로 질척하게 녹아 내리고 있었다. 미끄럼 지쳐가듯 아슬아슬하게 스쳐가는 자동차들의 곡예가 마치 눈발을 피해 묘기(妙技)라도 하듯 저마다 앞지르려는 싸움이 창가를 향한 나의 망막(網膜)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전화를 걸었다.
따르릉, 따르릉……,
아무도 없는 것인가? 전화가 고장인가?
다른 전화기로 바꾸어 다시 다이얼을 또박또박 돌렸다.
수경(秀敬, 여고생)(주-2)이는 거기 있을 건데. 오늘 12시에 끝난다고 했으니
따르릉, 따르릉
화장실에 앉아있는 모양이군, 이럴 땐 적당히 알아서 전화부터 받지…. 원 맹추같이
수화기를 놓자 누군가 보호자와 함께 와서 약을 짓는다기에 얼굴을 마주보며 의자에 앉았다. 언제부터인가 그냥 앉아서 걸어도 될 전화를 버릇처럼 꼭 서성거리며 걸곤 했으므로 차분히 자리를 잡은 셈이다.
“선생님! 늘 어리석은 질문을 합니다마는 병이 정말 나을 수 있을까요?”
처녀 시절이라면 퍽 예뻤으리라 여겨지는 이 소복(素服) 여인의 얼굴에서 흐느껴 넘쳐흐르던 눈물을 보았던 기억을 더듬어 보며 나는 약간의 미소를 아래위 두 입술에 힘주며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정말이지요 선생님! 이렇게까지 된 것도 선생님 은혜인 줄은 알고 있습니다만, 어디, 욕심이 그렇지 않군요. 당장에 달리 보답해드릴 길이 없지만 선생님 은혜 잊을 수야 있겠습니까. 선생님만 오로지 믿고 또 의지하고 있어요.”
그리고도 스스로 묻고 대답하면서 몇 마디인가 이야기를 더 나누고 조제실까지 나오면서 그녀의 남편을 위한 처방을 간호원에 건네주었다.(주-3)
“한시름 놓은 지도 꽤 됐지요?”
“그럼요, 선생님!”
부인은 화사하니 웃으며 입을 가리고 공손히 인사를 했다.
그녀의 인사에서 눈을 떼자 창 밖 커튼 너머에 펑펑 밀려 내리는 눈송이들이 달려들었다. 빠른 걸음으로 면담실로 들어섰다. 전화를 잽싸게 들었다. 아까보다는 한결 다이얼 돌리는 손놀림이 빨라졌다.
따르릉, 따르릉……
혼선인가? 외제 전화기를 달더니만 그게 말썽일까?
빵빵거리는 자동차들의 소란스러움이 짜증스레 들리니 눈길은 점점 더 거세지는 모양이다.
2분, 3분…… 끝내 전화를 받는 사람이 없다. 분명 거기엔 아무도 없다는 증거다. 2시가 가까워지는데 이상한 일이라고 여겼다.
수경(秀敬)이는 늦어도 1시까지는 들어오리라는 계산이 무너지면서 무슨 사고라도 생겼다는 말인지 답답했다.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거기 있으면서 전화를 받지 못한다면 잠들었다는 것 밖에는 다른 일이 있을 수가 없다. 섬뜩한 흉악범들이 아파트를 넘보며, 끔찍한 범죄를 일으킨다는 신문 보도들이 연상되면서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주-4)
설마 그럴 리야 없겠고, 늦어질 무슨 사정이 생긴 거겠지. 그런데 세훈(世勳)이는 어떻게 할까? 차를 보낼까? 아니지, 녀석에게 신나게 쏟아지는 눈송이와 더불어 나름대로의 기분을 즐길 권리가 있는 이상 그것을 빼앗아 버릴 순 없는 거야
그렇지만 저렇게 길이 험해져서야 사고가 나지 않을까? 어쩐담.
기사를 부르기로 작심을 했다.
공교롭게도 그때 인터폰이 울렸다. 예약된 환자가 무거운 얼굴로 방문을 밀고 들어섰다.
그러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죽겠다던 강박적 반복과 고독, 두통, 무력감만으로 비쳐진 자화상을 바라보며 희망도 보람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의 일들과 따분하게 기계같이 반복하는 생활 속에서 지쳐있었던 그였는데 약간은 밝은 빛이 눈동자에 반짝이고 있었다.
“선생님 이제 뭘 좀 알 것 같아요. 지금까지 꼭두각시같이 살아왔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죠. 어떤 전제조건과 오버센스를 무기로 인간관계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정말 창피스런 느낌이에요. 그저 감각적으로 좋든가 나쁘든가, 또는 옳든가 그르다는 판단에 따라 밀어붙이며 포도청인 목구멍을 채워 왔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일시에 고통과 괴로움이 해결되진 않더군요. 오히려 그런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알았다고나 할까요……”
언젠가 오안오지(五眼五智)에 관해 정신의학적 연구 발표를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주-5) 육안(肉眼)과 천안(天眼)을 넘어 이제 혜안(慧眼)의 눈뜸이 그에게 어른거리는 것이라 여겼다. 단순히 감각적으로 인식하고 거기 느낌의 눈을 통해 판단해오던 편협된 그가 지혜로운 사고(思考)를 활용하려는 전기(轉機)를 맞이한듯 반가웠다.
다음 면담시간을 약속하며 함께 대합실로 나왔을 때, 돌연 나의 시야는 다시 무섭게 내리는 캄캄한 눈발을 향했고 마치 잊었던 재발견에 놀란듯 다이얼을 재빨리 돌렸다. 이제 놈에게 차를 보낼 시간도 훨씬 지난 때였으므로 마음엔 조바심이 무서운 파도처럼 다가섰다.
“여보세요! 아빠....”
뜻밖에도 세훈(世勳)이가 헐떡거리는 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방금 들어왔다는 것, 그래서 숨이 차다는 것과 누나도 누구도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무사히 도착했다는 것이 확인되자 안도의 마음과 더불어 전화를 끊고 길고 짧은 면담을 여유 있게 할 수 있었다. 나는 아주 차분해진 것이다. 말 그대로 고요와 평온 그것이었다.
오늘 저녁 5시 반에는 정신 보건법(안) 제정을 놓고 특별위원회가 있다.(주-6) 눈길이 억센 것을 보니 일찍 나서야겠다고 작정을 하고 다시 확인 전화를 넣었다.
수경(秀敬)이가 왜 늦을까? 늦어도 1시까지는 꼭 오겠다고 했었는데, 이상한데.... 세훈(世勳)이 혼자 있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이게 웬 일인가. 당연히 있어야 할 응답이 없어졌다.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었다.
무슨 얄궂은 일이 생긴 것일까? 대체 이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방금 전에 녀석이 받았는데 어찌된 일이지? 눈싸움이라도 하려고 나갔나? 그나저나 이 사람은 대체 무슨 일로 연락도 없이 텅 빈 상태로 어딜 갔단 말인가? 흉흉한 세상에 혹시라도 불길한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다행히 환자는 없었다. 이제 마음놓고 들락날락거렸다. 좌불안석 서성거리기를 본격적으로 전화를 걸고 또 걸었다. 무척이나 흘렀다고 생각된 시간은 노상 그 자리에서 초침만 헛도는듯 불길한 마음만 비례해 커갔다. 조바심은 더욱 기세를 부렸다. 방안을 곰같이 돌고 돌며 그러다간 전화를 움켜쥐길 반복하고 또 했다.
별 일은 없겠지, 설사 별 일이 있다손치더라도 어찌 할 방법도 없지만 아무 일은 없을 거야…그래야 속이라도 편한 형편인지라 최선의 대안이지…
용단을 다짐하고 이제 도리없이 회의장으로 차를 향해야 했다.

차는 기어가고 있었다.
파고다 아케이드 앞 나의 병원에서 중앙 극장을 지나 남산 제1터널을 넘어가는 길은 너무나 지루했다. 도대체 차가 헐떡이듯 뒤꽁무니에서 하얀 헛김을 내며 모두가 주저앉아 버린듯 한두 바퀴 돌다간 그냥 그 자리다. 전연 무엇이 어떻게 됐는지 예측을 할 수가 없는 지경이다. 적어도 15분전에 도착하여 학회 회의와 상관없는 정신의학보(精神醫學報)(주-7) 필진에 관해 의논할 양으로 서둘러 떠났는데 터널 톨게이트에 이르러 예의 백 원짜리 떨어지는 소리가 벌써 회의 시간 20분을 넘기는 종소리로 확인되고 말았다.
「쨀랑, 쨀랑―」
얼마나 그 자리에서 서성거렸음인지 그 동냥 소리 같은 돈 던지는 소리를 초침 소리처럼 듣다 이윽고 굴 속으로 차체를 집어넣었다.
그러나 굴은 여느 때와는 달리 차들을 전연 빨아들이지 않았다. 어느 만큼 갔는지, 출구가 얼마나 남았는지 그 후 아무 것도 알 재간이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답답했다. 지루했다.
문득 감각 박탈(感覺 剝脫)의 우주 비행사(飛行士) 생각이 떠올랐다. 게다가 통신이 두절된 막막한 상태의 조임이 뇌리를 스치자 난데없이 세훈(世勳)의 풋볼이 나의 가슴을 별안간 파고들었다.
아무 일 없겠지. 5시가 넘어서까지 연락이 되지 않았었는데 어떻게 됐을까? 불길한 상상일랑 지워버리자
녀석은 요즘 컬러 TV덕분에 미식 풋볼에 정신을 잃고 틈만 생겼다 하면 그놈의 공을 뾰족하게 집어던지곤 하여 제법 손이 아플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마치 자기가 풋볼 선수라도 된 기분인지 옷을 입어도 어깨를 넓히고 걸어도 어딘가 몸을 날릴 기세다. 하긴 녀석의 스펀지 겉옷이 지난해 스케이팅 금 매달을 탈만큼 힘을 더해준 두툼한 것이라 가히 표현이 과장된 것은 아니었다.
제발, 아무 일이야 없으렸겠다.
“거 갱 속에 갇혀있던 사람 심정 어땠을까?”
“지난번, 재방송해주었죠. 어떻게 서로 말할 수 있었던 모양이지요.”
이럴 때 회의장에, 또는 다른 어떤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제시간에 닿지 못하게 되면 그것이 마치 기사(技士)의 책임인양 미안스러운 마음의 노예가 됐던 그였기 때문인지라 어정쩡하게 대답을 흐렸다.
“며칠을 혼자 그렇게 갇혔어도 살 수 있었다니....., 대단한 정신력이 아니겠소.”
그리고 보면 정신의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을 재방송해준 그 마지막 방송에서 사실 나도 그 녹음방송을 듣고 눈시울이 뜨거웠었다. 삶의 환희, 죽음의 극복, 위대한 인내력, 그런 것들이 새삼 느껴져왔던 때문이었다.(주-8)
삶과 죽음의 관계, 그것을 잘 아는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릴케의 시, 삶 안의 죽음은 생사의 공존을 제시하고 있는데 사실 그 본의(本意)를 파악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때 불쑥 방송국 생각이 밀려왔다. 방송국이 강제로 막을 내리는 마지막 날을 위해 녹음을 했었기 때문이다.(주-9) 이래저래 인연이 되어 4~5년 간 방송을 해 왔었던 까닭에 마지막 자신의 프로에서 소감의 일단을 말해 달라는 부탁을 듣고 여러모로 골똘히 마음을 정리했었다. 왠지 그때 나는 목소리가 몹시 떨렸다. 울분과 그리고 표현의 한계 때문이었지만 그 떨림을 스스로 의식하고 당황했었다. 거기 분명 생사관(生死觀)의 상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럴 때 나라사랑과 그것을 행동화할 수 있는 명확한 판단과 용기가 과연 어느 편에서 옳게 운용되고 있는 것인가를 소신대로 밝히기가 지극히 쉽지 않았던 이유를 억누르고 있었던 탓이다.
굴 속은 내내 느릿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나는 이 굴 속으로 들어오지 못해 차가 많다거니, 길이 좁다거니, 어째서 굴을 이차선으로 뚫어 놓았느니, 톨게이트를 없애야하느니 불만이 컸었다. 그러나 불과 몇 10여분이 지났다고 이젠 암흑의 굴 속에서 출구를 향해 조침증으로 안달을 달래지 못하고 있다.
탄광 속의 양씨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군
굴 속은 너무 길었다.
긴 것은 그러나 문제가 아니었다. 이 속에선 누구와도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갑작스레 목을 조이는듯 답답해짐에 따라 또다시 세훈(世勳)이란 놈으로 정신을 빼앗겼다.
혼자 집 지키다가 피살된 국민학생!
얼른 담배 한 대를 주문했다. 그리고 마약중독자와 같은 떨리는 손으로 한 모금 담배 연기를 힘차게 내뿜었다. 별반 즐기지도 않는 담배 연기는 금새 조그만 차안에 답답하게 들이차고 말았다. 아무리 내뱉어봤자 빠져나갈 곳이 없는 그 맥퀴한 연기는 이내 다시 나의 폐로 스며들었다. 차창을 연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살인적 매연을 그나마 차창으로 차단하고 있다며 자위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점점 숨이 막혀왔다.
꼭 질식하여 미칠 것 같았다.

미친다는 것, 그것도 그러고 보면 별 것이 아닌가 보다. 좀 급하다 싶은 사람에게, 되어야 하리라 기대하는 것이 원하는 시간 안에 이루어지지 못할 때 자폭하고 마는 것이 미친다는 것이라 보면, 이제 나도 출구가 나오지 않으면 그렇게 되고 말 것이라 짐작되는 것이 너무나 실감나게 몰아치고 있었다.
눈, 귀, 입, 코, 그리고 피부의 촉각이 깡그리 차단되었을 때 정신병이 발생한다는 실험적 연구가 증명된 것은 앞에서 암시했다. 그 의미의 천 분의 일을 실감한다는 것이 이토록 답답하였다면 할 말이 없는 것이다.(주-8)
―과연 양씨는 위대한 광부였구나!―
문득 정신병적 촉발의 굴 속에서「오늘과 내일」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괴이한 행동으로 별안간 확산되어 뻥 과자처럼 커짐을 느꼈다. 그저 답답한 탓이었을까? 차단된 오관의 기능이 분을 터트린 결과다.

그래도 우리는 말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말을 해선 안 된다.
보고 듣고, 와 닿는 피부의 모든 감각이
참일 수도 있지만 거짓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외쳐 정신병자가 되거나
말없이 정신병자가 되거나
그것은 다만 오늘이라는 것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가야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가선 안 된다.
그러나 가거나 설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오늘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오늘이다.
오늘은 이미 오늘이 아니다.
오늘은 내일이다.
내일은 내일이 아니다.
오늘은 어제이다.
어제는 어제가 아니다.
오늘은
오로지 우리의 마음뿐이다.(주-10)

순간 출구가 시야에 트이고 차의 속도는 아까와는 달리 제법 빨라지기 시작했다. 대관령 굽이굽이 아흔 아홉 고개를 뒷걸음치듯 겨우 올라 서울을 향해 내리막길을 깔아뭉개듯 바로 그런 길같이 속이 후련했다. 재빨리 차창을 내렸다. 얼굴에 부딪치는 눈바람이 아주 시원했다. 곧 회의장에 닿으면 전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소식이 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이렇게 기쁜 일일까?
차에는 더욱 가속이 붙고 밖은 완전히 어둠이 깔렸다. 상대편 불빛에 눈발이 무섭게 확인되고 있었다. 눈발은 꼭 나의 얼굴을 후려치고는 흘러내리는 기분이다. 차는 그만큼 빨리 지쳐내려갔고 눈발은 반대로 우리를 쳐부술 것 같이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군, 그때 난 약사리 고개(춘천시)를 넘어 내려갈 때 꼭 지금과 같은 기분이었었나? 아니, 그때는 얼마나 하나님을 외치며 허둥대고 뛰었는데 그건 비교도 안되지. 그러나 내리막길은 꼭 무엇인가 구원이 거기 약속되어 있는 것 같았던 것은 사실이었어. 하지만 그땐 진정 감사의 탄사로 무엇인가를 깨달았던 때였었는데……

십오 년 전인가 보다. 진(珍)(주-11)이 지금 여고 1년이니까 틀림없다. 그의 생일이 1월 7일이므로 결국 1965년 1월 7일이다.
그 날 밤.
나는 귀가길이 늦었다.
아마도 대대장(후송 부대)이 몇몇 참모와 함께 회식을 한다고 불렀지 싶다. 군의관인 내가 의정(醫政) 장교에 예속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불가피하게나마 같이 어울리곤 하던 터에 하여간 술잔이라도 서로 건넸을 것이다.
기억이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면 전문적 입장차이가 컸던 터라 그것을 화해한다고 모였던 것이 틀림없다.
대대장은 소령이었다. 중령을 눈앞에 두고 진급 여부가 결정되어야 할 긴박한 처지에 있었으므로 그는 자제력을 잃고 정신치료대 대장인 나를 들볶고 있었다. 군의관은 질서가 없다던가, 상관을 존경할 줄 모른다던가, 명령 복종이 엉망이라던가, 근무를 소홀히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편에서 보면 사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 무리는 아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진료행위를 포함한 환자 관리에 계급 중심의 원시적 주장이나 강요가 전연 상황판단에 모순 덩어리였다는 점을 모르는 그가 몹시 안타까웠었다.(주-12)
하여간 자정이 다 되어 내가 아내의 방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놀랍게도 거기 산고(産苦)를 치르고 있었다. 장 박사님의 사전 검진에서 이상이 없었다는 점과 간호 전문학교 교수님의 노련한 산파역이 대동되고 있었기에 내심 안심을 하면서도 늦게 왔다는 죄책감에 방정맞은 매우 희귀한 생각과 범벅이 되어 초조해졌다.(주-13) 의사란 자기 자신과 가족에게 등한한 반면 최악의 불길한 생각을 끌어들여 쩔쩔맨다고 했는데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이때 아들․딸은 물론 문제가 아니었다. 하얗게 눈에 짓눌린 고요가 이따금씩 아내의 신음 소리에 깨어지고, 그러더니 이윽고 파산의 울음이 터졌다. 더불어 긴장이 절정에서 고개를 숙이려는 순간, 아!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아내의 얼굴이 납덩이처럼 차갑게 내려앉고 산파의 목소리가 떨렸다.
대(大) 출혈(出血)인 것이다.
밤은 깊었고 집구석엔 그 흔한 링거도 없었다. 산파와 나는 똑같이 당황했다.
뛰었다. 정신없이 문을 박차고 나는 그래서 뛰쳐나왔다. 허둥대며 절벽으로 떨어지는 가슴으로 뛰기 시작한 것이다. 눈길에 미끄러지고 자빠지며 달음질치면서 나는 하여간 뛰었다. 울부짖으며 뛰었고, 넘어지며 뛰었으며, 다시 울며 나는 실성한 모양으로 뛰기만 하였다. 용케도 고개를 단숨에 올라섰고, 그 후 날 듯 내리막길에 몸을 던지며 그때부터 더욱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펑펑 쏟아져 내리는 하얀 눈송이가 얼굴에 부딪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바로 고개 넘어 성에 낀 사면 벽 속에 갇힌 아내의 하체에서 빨갛게 쾅쾅 쏟아지는 핏줄기가 떠오르자 나는 그녀가 죽는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파출소의 불빛을 발견했다. 사람이 죽게 되었다는 사실과 내가 군인이란 신분에다 의사라는 점이 실감되었던지 이내 야간 응급 의사와 함께 링거 두 병을 감싸 쥔 채 지프차를 탈 수 있었다.
간청했다. 삶과 죽음이 어느 편에 서 있는지 온몸의 물기를 잃고 간곡히 기도했다. 차에서였던지 아니면 약사리 고개를 넘어지며 달리면서 그랬었던 것인지, 어쩌면 내내 뛰며 넘어지며 그리고 차가 집에 당도할 때까지 줄창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이 더 확실한 것 같지만 어떻든 나는 실성한듯 애타게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제발 하느님, 저의 아내를 구해 주옵소서. 아내를 살려 주옵소서. 저는 무엇이든 하겠나이다. 무엇으로 바꾼들 살릴 수 있다면 기꺼이 하겠습니다. 저의 육신과 바꾼다해도 아!- 하느님, 염려 없습니다. 다만 살려 주옵소서, 살려 주옵소서, 대체 어떻게 되어 가는 중인가요, 조금만 더 기다리게 해 주옵소서, 제가 거기 갈 때까지 만이라도 제발, 제발 기다리게 해 주옵소서
백지장같이 침몰해 가는 돛 단 배를 보듯 싸늘한 아내의 마지막 얼굴이 나의 가슴을 안타깝게 두들기는데 그 천년 같이 길고 긴 시간을 달려 결국 방문을 나꿔챘을 때, 그러나 놀랍게도 거기 하나의 기적이 있었다.
“여보― 정말 미안해요.... 언니를 닮았다죠―”
아내는 전연 아무 일도 없었던듯 나직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와락 안았다.
“……여보! 아...... 여보!..........”
“.......................”
눈이 물기로 아물거리는 가운데 얼마간의 쉼표 뒤였는지 입을 열었다.
“고마워, 고마워요…… 당신은, 당신은 정말 고마운 사람이야……”
산파는 기발하게도 용수박리(주-14)로 아내의 생명을 지켰다. 잠에서 깨어난듯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그녀를 감싸며 나는 실로 감격의 감사함을 외우고 반복하며, 또 되뇌이곤 그래서 흐르는 눈물을 닦을 사이가 없었다.
여보, 당신을 위해 나 모든 것 다 하리라

전조 동의 눈발은 더욱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때를 같이하여 지난날의 영상은 와이퍼로 밀려나고 차는 몇 번인가 꽁무니를 뒤뚱거리더니 결국 나의 몸뚱이를 목적지로 인도했다. 거센 폭풍우가 지나간 뒤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회의장으로 들어갔다.
회의는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남산 제1호 터널을 넘어오는데 물경 한 시간이 걸렸다는 변명으로 멋쩍게 자리에 앉았지만 그러나 전화 중독자 같이 눈은 전화통에서 떨어지질 못했다. 1시간의 통신망 박탈에서 온 불안을 도시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십여 년 전부터 선배 전문가들이 애써 다듬고 만든 정신 위생법(안)을 하나하나 다시 읽어가며 그 타당성 여부와 필요성, 내지는 그 부작용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장내를 감싸고 있었다.(주-15)
나는 무릅쓰고 전화를 쓰기로 했다. 솔직히 마음을 딴 곳에 두고 해야할 일을 옳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양해를 구했다.
따르릉, 따르릉
“여보세요, 아빠예요!…… 네, 아무 일 없어요, 모두 들어왔어요. 그런데 아빠! 오늘 늦어요? 빨리 들어오세요, 길이 무척 험한데 차조심하세요……네, 그럼 끊어요.”
모든 것이 사라졌다.
링거병을 움켜쥐고 그 네모진 성에어린 방문 속에서 삶으로 그 엄청난 불안을 기적같이 몰아냈던 15년 전의 그녀처럼 수화기의 진동판이 또렷이 울려왔기 때문이다. 수경(秀敬)이도, 진(珍)이도, 그리고 세훈(世勳)이에 대한 그 불길한 모든 염려와 불안이 일시에 평온함으로 뒤바뀌고, 나는 비로소 진지한 의자에 앉아 토론을 할 수 있었다.
눈과 귀와 입과 몸이 말하자면 그때서야 해방된 그런 기분에 따사롭게 감싸일 수 있었던 탓이다. 오늘이 마음 속에 살아있고 그런「오늘의 삶」이 기본적 압력과 통제에서 마틴부버가 강조한「나와 그것」이 아닌「나와 너」의 관계로 숨쉴 수 있었다는 바로 그런 체험에 의한 것이다.(주-16)
때에, 예의 트리오가 팍팍하고 텁텁한 토론의 쉼표 사이를 비집고 귓가에 들려왔다. 파우레의 <종려나무>가 술잔 가득히 훈훈하게 담겨 입가에 미소를 불러내는 환상의 세계로 이끌려 간 것이다.
아직도 어설픈 훈(勳)이의 바이올린 줄타기와, 대견스런 진(珍)이의 첼로 활이, 수준급의 개성을 돋보인 수경(秀敬)이의 피아노 건반 울림에 따라, 떨리는듯 조이고, 흩어지는듯 모였다간 집안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는 그런 모습이 아스라이 피어오르고 있었다.(주-17)
나는 자유를 흠뻑 느낀 것이다.

“정 박사! 뭘 해... 이 조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지 않았소?”
“네........?!”

(주-1): 나의 1남 2녀중 막내, 3대 독자다. 2002년 2월 강남 병원 정신과를 거쳐 나와 같은 정신과 전문의가 되었다. 이미 두 딸의 아버지가 되었다.
(주-2): 나의 첫째 딸, 현재 전주대학교 사회사업과 교수로 있다. 임상 사회사업을 전공한 가족 치료가 전공이다. 나의 병원에서 함께 가족 치료를 하기도 했었다. 남편 정형외과 전문의와의 사이에 외동딸을 두고있다.
(주-3): 기존의 조제실과는 달리 약국처럼 완전히 개방된 곳이다. 당시로는 파격적이었다. 통상 차표를 받는 버스 터미널처럼 조제실은 늘 밀폐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의원은 종로2가 네거리 파고다공원 건너편 모퉁이에 있었다.(1974. 3.-1991. 3.)
(주-4): 당시의 사회는 유괴, 살인 등 흉악한 사건으로 얼룩지고 있었다. 나는 3남매의 생명을 위해 수억 대의 땅을 불과 3천 만원으로 내주어야 할 정도였다. 사촌형에게 아무런 대가없이 빌려준 땅이 빌미가 되어 노동자들이 병원에 들이닥쳐 때려 부셨지만 법은 통하지가 않았다. 더 소중한 것은 돈보다 나의 아이들이었었기에 물러서고 말았다. 결과 나의 소망은 공중 분해되고 말았다.
(주-5): 金剛經에 있는 내용. 전국의 사찰을 돌며 佛像의 미소를 촬영하여 연구를 했던 金海선배가 잘 인용했던 말이다. 고인이 된지 오래다.
(주-6): 80년 12월 서울 백제병원 노동두 원장님 면담실에서 大韓신경정신의학회 精神보건법 특별위원회가 있었다. 문안 검토의 산실로 후에 정신보건법의 틀이 마련되었다. 1997년 12월 구 精神보건법이 전문 개정되어, 1998년 4월 1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2000년 1월엔 精神의료기관의 시설 기준에 관한 조항이 개정되었다. 법 제정의 기본 이념은 모든 정신질환자의 기본적 인권의 존중, 최선의 조건에서 치료받을 권리의 보장, 부당한 차별대우의 금지 등이다. 의약 분업으로 글씨만 존재하는 법이 되고 말았다.
(주-7): 필자가 발의하여 出捐, 서울대학 神經정신과 교실에서 국내 최초로 1977년 교실 단위의 <精神의학보>를 전국 회원에게 무료 배포하기 시작하였다. 개원한 2년 후 조두영 교수에게 관철동 맥주집 ‘낭만’에서 나의 뜻을 개진하고 醫局에서 공론화되면서 이듬해 발간되기에 이르렀다. 청량리 뇌병원 사택 뒷간의 구더기를 바라보며 3남매로 하여금 큰 일을 보게 하면서 구상했던 작업이 성사된 것이다. 즉각 김철규(서울대 동기, 전 國立서울정신병원장)도 출연에 가세하였다. 1980년 당시 나는 編輯人이었다.
(주-8): 1967년 철갑산의 청양 구봉관산의 갱이 무너져 백 미터쯤 되는 땅 속에 갇혀 있다가 17일만에 구출된 양창선씨의 심경을 상상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철갑산은 유명해졌다. 높이가 561 미터인 칠갑산은 아흔아홉 봉우리가 줄을 잇는 울창한 숲을 품은 아름다운 경치로 1973년에 도립공원이 되었다.
(주-9): 1980년 11월 14일 全두환씨의 제5공화국 탄생에 앞서 韓國신문협회와 韓國방송협회의 임시총회 결의에 따라 실시된 신문 ․통신의 통폐합과 방송의 공영화 조치로 東亞방송국은 弊局되었다. 東亞방송 ‘행복의 구름다리’에 고정 출연했던 나는 당시 하루의 프로 출연자들이 마지막 방송을 하면서 소감을 밝히기로 했었다. 부당한 정치적 사태를 우회적으로 울분을 삼키고 진행했으므로 격앙된 감정은 떨림으로 이어졌다. 그 날의 방송 내용은 모두 銅版으로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주-10): 마음은 마음을 지키려는 사람에게 어떤 외부적 힘도 관여할 수 없다는 나 자신의 마음.
(주-11): 나의 둘째 딸, 연대 간호학과를 나와 나의 의원 시간제 근무와 Miss Me라는 소품 전문점을 경영하다 현재 샌드프래소 강남점 대표로 2002년 2월 문을 열었다. 국책 은행에 있는 남편과 사이에 두 딸이 있다.
(주-12): <精神치료대> 대장이었다. 1965년 당시 전방 5개군단 편제에 동과 서에 각각 1개의 <精神치료대>가 있었다. 나는 I, II, III, 3개 군단 예하 부대를 참모 방문하며 하극상, 안전사고, 정신적 적응상의 문제를 지원하고 있었다. 때에 行政의무장교의 비전문적 계급주의에 따른 고압적 태도에 나는 강력히 저항하던 시기였다. 현재는 전방의 <精神치료대>가 없어졌다.
(주-13): 대학 선배인 산부인과 전문의의 사전 진단에 따라 시간 강사로 나가던 춘천 간호 전문대 학장이 직접 산파를 맡기로 되어있었다.
(주-14): 손으로 자궁 안의 태반을 박리해 출혈을 멈추게 하는 매우 위험한 방법.
(주-15): 대한 신경정신 의학회의 현안은 <정신위생법>이었다. 선의의 피해자가 정신적 망상에 의해 살해되었다해도 그런 환자를 사전에 강제입원할 수 있는 법이 없었다. 여기에 노동두씨 자신의 병원원장실에서 모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동식, 이정균, 이정윤, 김채원, 이병윤 등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자구 하나하나가 신중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들이었다.
(주-16): 군부 독재에 의해 이목구비가 차단되어 정신병자가 됐다 자유를 찾아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는 양심수의 심정을 알만했다.
(주-17): 이들 3남매는 후에 모두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졸업 사진을 찍었다. 그 어린 시절의 삼중주는 우리 부부의 큰 기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