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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1 덧글 0 | 조회 15,719 | 2009-04-17 00:00:00
정동철  


<퇴근길>
참고: 1980년 대 초반의 글

지하철 2호선을 타려고 차의 승강구가 멎는 언저리를 어슬렁거리면서 기다릴 때 비로소 나는 퇴근의 기분을 느끼기 시작한다.
예측된 승강구가 더러 빗나간다 해도 결코 서둘러 비집고 그 속으로 들어가려 하지는 않는다.(주-1) 처음부터 앉아 가리라는 계산은 아예 하려하지 않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다.
병원 문을 나서 하루의 일이 끝난 가벼운 기분과는 달리 탁하고 답답한 1호선 지하철로 후덥지근하게 신설동에 이르러 잠실로 향하는「터널」넘어「트랙」에 서면 한결 깔끔하고 신선한 맛을 느끼게 된다. 말하자면 퇴근의 상큼한 여유를 그제서야 본격적으로 갖게 되는 것이다.
잠실행 전철은 1호선의 그것과는 몇 가지 점에서 다르다. 이상하게도 우선 우측통행으로 되어 있다. 1호선은 물론 기찻길의 모든 차량이 좌측통행인데 비해 무슨 연유에서인지 알 수 없지만 어떻든 다르다. 차의 모양도 너무나 대조적이다. 앞이 툭 트인 차창을 갖고 있는 데다 모양이 여러 칸인데도 멀리서 볼라치면 자벌레가 누워있는 것 같다. 깔끔하고 시원한 국산 전철의 맛이다. 2호선은 차 자체의 앞뒤와는 달리 잠실역과 신설동이 땅 속에 머리와 꼬리를 처박고 있을 뿐 모두 지상 고가 전철이다.(주-2) 그것은 차창 너머 지붕들이 눈 아래 바둑판처럼 엎드려 펼쳐지고 있음을 말해 준다. 달리는 기분이 좋은 이유다.
역마다 한가로운 승강구의 여닫는 반복이 이루어진다. 차내는 점점 한적한 고요가 감돈다. 신문을 보는 회사원, 빨갛고 노란 칠을 뭉툭뭉툭 그은 영어 책을 내놓고 외우는 여학생, 소설을 보는 여사원, 불어를 보는 대학생, 그런가하면 차창 너머 쟁반보다 더 커다랗게 남산 옆구리를 타고 발그스레 떨어져 내리는 햇빛에 시선을 빼앗기는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들은 도무지 급한 얼굴이 없다. 필경 퇴근길의 흐뭇함을 마음과 마음속에 평화롭게 반추하고 있는 까닭인가 보다.
전철은 시원하게 달린다. 한가로운 얼굴들과는 달리 지붕을 누비며 제법 요란하게 달리는 것이다. 갑자기 매우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템포」를 빨리 하며 뭔가 멍청한 난청자들을 상대로 설득이라도 하듯 방송으로 쏟아져 나온다.
「정의로운 시대, 법이 법대로 운영되는 시대, 청탁을 하지 맙시다.」
어쩌다 타는 2호선이 아니라 허구한 날 아침저녁으로 이용해야 하는 사람들은 외움직한 이 낱말들을 차창에 무심히 내맡기고 연방 달리는 차체에 마냥 흔들리며 보던 책들에 그냥 열중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떻든 1, 2호선의 차이 중의 하나다.(주-3)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적어도 40분 이상의 정신치료를 하느라고 오금이 굳은 듯한 나이기에 으레 승강구 반대편에 몸을 기대고 서서 부담없는 영자 시사주간지들을 읽곤 한다. 나의 습성이며 어쩜 퇴근길의 즐거운 맛이기도 하다. 1호선은 만일 가는 길이 길다해도 책을 보지 않을지 모른다. 북새통에다 뭔가 찌든 냄새가 그렇다.
불과 세 정거장(종로 3가에서 신설동까지)의 1호선은 조급히 내리고 싶은 마음이다. 성수역으로부터 시작되는 2호선은 그보다 한결 먼데도 더 가고 싶은 충동을 번번이 뿌리치지 못하곤 한다. 1호선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차이점이다. 아무도 내리고 타는 사람이 없는 강변역에서 잠시 쉬었다간 성큼 철교로 뛰어 드는 차창 아래 한강 물에 흠뻑 젖어 들어 시원한 물줄기로 그날의 일들을 훌훌 내맡기는 맛이 언제부터인가 습관적으로 익혀 버린 탓이다.
퇴근길의 진미다.
어떤 사람들은 포장마차에 엉거주춤 앉아 훌쩍 마시는 소주 한잔이 퇴근의 맛이라고 한다. 나에겐 이 시원하고 향기로운 강바람의 신선함으로 하루의 모든 신체적 노폐물과 정신적 오염을 일시에 씻어내듯 그런 맛에 도취된 지 제법 시간이 흘렀다.
인간이 건강하게 사는 비결로서 좋은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보다 배출의 의학에 착안한다면 사실 삼태기로 짊어진 하루의「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어 버리느냐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과제다. 술, 춤, 운동, 당구, 전자오락... 방법은 많겠지만 나처럼 강바람에 그 무거운「스트레스」를 홀가분하게 바꾸어 갖는 길을 터득한 사람은 2호선의 퇴근길에 마냥 감사할 따름이다.
뜀박질이 없는 신천역, 출찰구를 빠져 나오면서 다시 나의 발길이 어느 쪽으로 향하느냐는 것은 그날의 퇴근 기분을 더욱 좌우한다. 시영 아파트로 접어들 때 거기 완만히 늘어진 가로수와 함께 삶의 호흡이 어른 아이 사이에 가득히 차 있는 것과 더불어 나 또한 숨을 들이쉬고 내쉬게 되면 훈훈하게 피어오르는 웃음이 절로 발걸음을 가볍게 하기 때문이다. 전깃줄과 가스 호스가 어지럽게 뒤엉켜있는 위험스런 사각(死角) 지대지만 대로변을 따라가는 집으로의 길 보단 한결 풋풋한 생동감이 아슬아슬하게 나의 마음을 일깨우고 있어서다.(주-4)
그래서 대로변을 통해 진주 아파트로 가는 길 보단 놀이터를 지나 시영 아파트 시장을 스쳐가는 그 길을 즐긴다.
그 날의 종지부를 삶이 숨쉬는 시장(市場)에 찍어보려는 습성을 이겨내지 못하는 중독(中毒)현상 때문인가 보다.

(주-1): 초기 전철시대는 지금처럼 플랫폼에 승강구의 표시가 없었다.
(주-2): 현재의 2호선이 완성되기 전, 1980년 10월엔 신설동에서 잠실역까지 부분 개통되었다. 후에 현재의 2호선이 완성되면서 신설동에서 출발하는 전철은 성수역까지만 다니게 되었다.
(주-3): 정의로운 사회는 2002년 지금도 외치고 있는 표현이다. 청탁을 하지 말자는 말도 국민의 정부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자주 듣는 얘기다. 시간이 어지간히 흘렀건만 같은 말이 반복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공허할 뿐이다. 도대체 외우기도 힘든 웬놈의 ‘게이트’가 그리도 많은지.......... 2002년의 話頭는 ‘게이트’가 될 공산이 커진 듯 하다.
(주-4): 잠실 신천역에서 당시 살고 있던 진주 아파트로 가는 길은 시영 아파트 단지를 통과하는 길과 전철 아래 大路를 통한 윤택한 아파트 단지 길이 있었다. 나는 시영 쪽을 더 좋아했었다. 거기엔 늘 숨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