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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 공포증 덧글 0 | 조회 15,708 | 2009-04-17 00:00:00
정동철  


-적색 공포증-
참고: 1965년 맹호부대 1진의 경험과 1990년 대 후반의 사회상 속에서 그려진 글임.


「환영 맹호 부대!」
유치원 크리스마스 연극 무대에 장식된 종이 플랜카드와 거의 같은 피켓이었다.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그 자그마한 장난스런 플랜카드가 쥐어진 미군 병사의 시선(視線)들이 나의 탄대(彈帶)에 각인(刻印)된「U.S」에 꽂혀왔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1965년, 맹호(猛虎)부대 후송(後送)병원 제1진이 월남(베트남)에 상륙하던 순간의 모습이었다.(주1)
삿갓에 가려진 검정 옷의 월남 사람들은 속을 알기 힘든 침묵이었다. 머리를 베어간다는 오싹한 눈빛을 경계하며 퀴농에 자리를 정한 곳은 음산한 분지(盆地)였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우기(雨期)라 했다. 이미 와있던 선발대(先發隊) 군의관(軍醫官)이 지게 막대 같은 것으로 땅을 찔렀다. 절반은 힘들이지 않고 쑥 들어갔다. 약간의 힘을 가하니까 2/3는 거뜬히 땅속으로 들어갔다.
선발대 군의관은 서울의대 1년 선배였다.
미군들과 섞여 여기저기 개인 천막으로 초병(哨兵)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군의관이 전투 병과 같이 그렇게 섞여있는 암흑의 분지는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다가왔다. 불안했다.
우리 1진도 거기엔 사병이 포함되어있지 않았다. 덩그러니 군의관뿐이었다. 선발대에 사병이 없다는 것을 탓하기에 앞서 우선 천막을 치는 것이 급했다. 서툴기 짝이 없는 야전 텐트를 세워놓고는 네모 모양으로 삽질을 했다. 물받이 고랑을 만드는데 반나절이 걸렸고 겨우 비를 피할 수 있는 잠자리를 세워 에어 매트리스 위에 누웠다. 다행히 그때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천장에 아내와 수경(주2) 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베트콩이 목을 잘라간다던데 누구 하나 지켜주는 초병도 없는 이곳에서 온전할 수가 있을까―
우린 자발적으로 교대조(交代組)를 만들어 밤을 지키기로 했다. 7일간의 남지나해(南支那海)의 거대하고 가파른 파도에 시달리며 롤링과 피칭에다 더위에 시달린 터라 등이 땅에 닿으니 오가는 생각도 잠시 이내 잠에 떨어졌다. 그때였다.
총성(銃聲)이 볶아쳤다. 놀란 우리들은 거의 동시에 매트리스에서 굴러 반사적 경계 태세로 들어갔다. 가슴이 동당거렸다. 철모를 뒤집어썼다. 권총을 빼어든 채 침묵이 흘렀다. 불과 4~5cm 정도의 두께인 매트리스에서 굴러 내려온 것을 다행이라 여긴 그 절박한 가운데 누구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비슷한말을 했다.
“총은 확실한 신호가 있을 때까지 결코 쏘지 맙시다. 우리끼리 다치기 쉬우니까…”
칠흑 같은 밤에 전연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는 분지(盆地)를 둘러 싸고있던 산 중턱에서 기관총 알의 붉은 줄기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머리 위를 어지럽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죽음이 노크하는 소리 같았다.
―여의도에서 제비를 뽑을 때 불길하더니 바로 이렇게 현실로 다가오는 구나―(주3)
출발이 며칠 지연되는 바람에 모두 집으로 가게 됐지만 나와 또 한 군의관은 천막을 지켜야했다. 하필 제비를 뽑자 걸린 것이다.
재수도 더럽게 없군, 하필........
전선(戰線)을 향한 불길함이었다. 어둡고 침침한 운명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두려움이라는 예측 불허의 위기 상황에선 이성적(理性的) 사고는 고기압권(高氣壓圈)에 의해 밀려나는 속성이 있기 마련인가 보다.
계속 총성은 멈추지 않았다. 연상(聯想)은 끊기고 그 날밤 포복 자세로 지샜다. 살아야 하겠다는 일념, 아니 어디로 어떻게 적군(敵軍)이 침투할 것인지 오직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때에 난데없이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인민군(人民軍)의 손에 들어가기 직전 갑작스런 고요가 칙칙한 적막 사이를 비집고 끼어들었다.
고요가 있던 순간 뒤 소리도 요란한 탱크에서 내뿜는 포성이 소름을 돋구었다. 그때 그러나 우린 죽지 않았다. 찌는 더위를 잊고 솜이불 속에 온 식구가 숨을 죽이고 땀을 흘리던 그때 우리는 살았던 것이다.
나는 죽지 않을 거야
그 몇 주 후 친구 집으로 가던 중 B-29소리에 무심코 하늘을 쳐다보는 순간 새까맣게 쏟아지는 폭탄을 보자 불과 2m 거리의 방공호를 놔두고 그 자리에 반사적으로 엎드려 폭격을 당할 때도 나는 살았다. (주4)
위기에서 죽지 않았다는 상상은 이국(異國) 전장(戰場)에서 용기이자 위로였다. 불길한 여의도의 징크스 같은 이런저런 망령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결코 죽지는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희망이었지만 총성은 멎지 않았고 그래서 두려움은 좀처럼 가시지를 않았다.
「337시간(時間)의 생환(生還), 박승현!」
수 백 명의 생명을 앗아간 삼풍백화점의 붕괴(주5)가 몇 사람의 생환으로 문제의 본질이 뒤바뀌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가운데 나는 30년 전 월남의 악몽을 씻어내려는 지금 그 때 기적(奇蹟)은 분명 내 편일 것이라 여겼던 것 같다.

「적색(赤色) 공포증!」
천막 병실(病室)로 후송 병원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우리의 정전(停戰)상태와는 달리 이 곳 전장(戰場)은 정신과 의사의 역할을 별로 원하지 않았다. 대신 3일 열(熱, 말라리아 일종), 그리고 수술실의 조수가 더 소중한 일거리였다.(주6) 그러던 어느 날이다. 헬리콥터에 실려온 육군소위는 전신 마비 상태에서 자지러지게 경련을 하며 정신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었다.
소대장 강 소위, 필요한 검사를 통해 얻어낸 결론은「거대(巨大) 스트레스 반응」의 하나인 전쟁 공포증이라는 병명이었다.
다행히 그때 참전 기자(記者)의 관심은 수술실을 기웃거리고 주치의나 정신과 의사는 그를 조용히 치료할 수 있었다. 결과 그는 거뜬히 원대 복귀를 할 수 있었다. 기자가 소란을 떨었다면 그는 결코 침대를 박차지 못했을 것이다. 적색 공포증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했을 거라는 뜻이다.
생사(生死)의 현장까지 상업주의적 취재 열기가 덮치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 비극이다.
양창선(주7)씨의 기록을 갱신한 박승현양과 그리고 끔찍한 악몽에서 살아난 유지완, 최명석 씨는 삼풍 취재진들에 시달리고 있다. 가족은 상관없다. 오히려 신날 일이다. 기적 같은 생환(生還)에 밝고 명랑한 세 명의 신세대들을 볼라치면 나 역시 대견스럽고 신난다. 문제는 그들의 건강이 정말 온전하게 잘 보존될 지이다. 의사의 관심사다.
사고 3일 후 구조된 이은영양은 2시간만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화상(火傷)을 포함한 심각한 부상이 우선하는 이유였지만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하는 북새통에 결국은 담요(들것이 아니라)에서 뒤퉁 거리며 넘겨지는 기막힌 장면을 눈여겨보면서 혹시 간접(間接) 살인(殺人)의 가능성은 없었는가 의문이 섬광처럼 스쳤다.
구조 현장을 화면(畵面)으로 지켜보며 내내 생각했다. 만일 그 주인공들 중 누군가 다치거나 죽는다면 바로 그 원인은 각종 취재기자들의 잘못된 직업의식 때문이라고 여겼다. 대기(待機) 중에 있었던「의사」들은 접근도 못하고 구급 대원과 기자들만 법석을 떨었기 때문이다. 응급 처치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배치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엉뚱하게도 카메라에 밀려 청진기 한 번 대볼 수 없었던 현장 주도권은 오직 기자들에 있었으니 말이다.
대공황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으레 엄청난 스트레스 증후군(症候群)이 반드시 뒤따르게 되어있다. 불면(不眠), 악몽(惡夢), 식욕 상실, 놀람 반응, 공포, 일시적 감각(感覺) 상실, 환각, 망상… 그것은 다시 주체하기 힘든 신체적 반응을 몰고 오기도 한다.
성폭행을 당했을 때 당사자에게 오는 다양한 피해를 아는 사람이라면 생사의 기로에서 기적적으로 생환된 그들에게 과연 어떤 문제가 뒤따를 것인지에 대해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자들의 상업주의적 아우성은 철부지 이기심으로 자제력을 잃고 나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문민 정부’(주8) 이후 그들로 인한 폐해가 이 나라의 운명까지 좌지우지하며 민심을 들뜨는 쪽으로 부추긴 다고 믿기 지 않는 요상한 말들을 거침없이 내뱉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과 무관하지 않다.
정신과 의사의 느낌이 너무 앞질러갔나? 감정의 징검다리는 추리의 황당한 비약을 일삼는 특징이 있다. 과연 그런 결과였기만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청진으로 가는「시 아펙스 호」가 동해시에서 쌀 전달식을 할 때 보여준 행태(行態)와 이번 참사에 대한 취재 발상은 어쩌면 그렇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유사할까.
카메라맨이라는 직업은 돌이킬 수 없는 찰나적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전문일 것이다. 환자의 생명이 오가는 기로에서 삶의 순간을 포착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그래서 그들에겐 제4의 권부(權府)라는 특권이 부여되어 있다. 하지만 카메라는 고정되어있고 전달식의 행사를 반복시키면서 “다시! 다시!”를 외치는 모습은 보기에 민망했다.
북녘 사람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의사가 생명의 기로에선 환자에게 “다시”라는 말을 반복했다면 필시 대서특필 매장되고 남을 그런 동의어(同義語)가 반복되고, 더욱 이해하기 힘든 것은 그들의 장단에 맞추어 그 무슨 문서를 주었다간 받아서 다시 주곤 하는 고위급 인사들의 쇼가 또한 보기에 딱했다. 조금도 다름없는 현상이 사지(死地)에서 생환되는 듯한 생명들에게 벌어졌다. 카메라맨을 위해 연극(?)을 해야했으니 달리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겠는가. 급기야 하나의 고귀한 생명이 그 북새통에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고 보면 삶의 주인공이 누구이며 민초들은 누구를 위한 존재인지 알기가 힘들뿐이다.
엄청난 스트레스 뒤에 따라오는 반응은 그야말로 예측 불허다.
정말「생존 공간」을 찾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헤매던 구조원들의 피나는 노력은 생명의 존귀함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취재 경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고배 지진이 몰고 온 참변에서 일본 기자들은 체계적 재난 구조에 익숙한 탓인지 할 것과 해선 안 되는 것, 보일 것과 보여선 안 되는 것을 숙지(熟知)하고 있었다.(주9)
감히 중환자 실은 물론 의사의 수술실까지 거침없이 넘보는 발상 뒤에 숨어있는 선정적 특종 제일주의, 개인의 생명은 물론 나라의 치부가 지구 곳곳으로 번져 가는 피해를 아랑곳하지 않는 유아적 발광을 보노라면 사지(死地)에서 돌아온 젊은 생명들이「알 권리」앞에 무참히 짓밟혀도 좋은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전문가의 영역을 무지막지하게 돌진하는 발상 뒤엔 오로지 기자(記者)만이 이 시대의「전천후 전문가」라는 오만함이 자리잡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자만심과 특권 의식의 소산임은 물론이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다. 성격이 다른 것은 물론이다. 구조되는 자신의 모습과 치료 과정은 물론, 자신의 사생활이 공개되어 일약 스타가 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상당한 부담으로 느끼는 사람도 있다. 당사자의 의사를 존중해 주어야할 것이다. 정신적 후유증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며, 밤마다 악몽일 뿐 아니라 우울증이 뒤따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최근의 연구에서 밤에 분비되는 멜라토닌 이라는 호르몬이 여성에게 훨씬 많다는 사실과 생리 주기에 따르는 에스트로겐(여성 호르몬)이 여성의 우울증과 무척 상관관계가 크다는 점이 밝혀졌다. 10 수일간의 밤에 생화학적(生化學的) 체내(體內) 변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분별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 후유증에 대해선 아는 것이 없다. 저마다 다양한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는 것을 배워왔을 뿐이다. 모르는 것은 배우지 못했다. 알 수 없는 것은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인간은 아는 것 보단 모르는 것은 물론 알 수 없는 것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가운데 삶이 진행되고 있다.
몇 자 아는 것으로 자신의 테두리에 모든 삶을 우겨 넣으려는 것은 인권침해다. 바로 대표적 예가 일부 기자들의 발상이며, 그들의 권력 지향적이거나 선민(選民) 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는 우월 주의를 자랑하는 만용 때문이기도 하다.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지는 이제 스스로 선택해야 할 것이라 본다. 권리이자 의무다. 참사의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앞날에 진정한 건강이 있기를 기원한다면, 그리고 우리의 미래를 밝고 긍정적인 것은 물론 법대로 살아가는 시민 정신을 위한다면, 화려한 찰나적 이익 보단 작으나마 알찬 내일을 다지는「철학」이 있는 취재가 선택되어야 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것이 아닐까 한다.
「삼풍」의 의미는 화려한 겉과 썩어 무너져 내리는 안을 의미하는 대표적 새로운 단어가 됐다. 그 속엔 부패와 비리가 내재되어있고, 아울러 무시된 재난 구호 체계상의 우선 원칙이라는 뜻은 물론, 인명 경시(輕視)의 발상도 동시에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그뿐인가, 그들의 생명을 지켜야할 의사를 제치고 나서는 우선 순위의 뒤바뀜이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을 선명하게 암시하고 있다.

맹호 부대 후송 병원에 헬리-엠블란스가 내리면 모든 군의관은 전문 과목과 관계없이 수술실로 달린다. 거기엔 종군기자들이 결코 앞질러 있지 않았다. 아니 전투 지구였기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우린 그때 계급을 초월한 전상(戰傷) 장병들이 서로 수술실에 들어가라고 양보하던 모습들만 눈에 선할 뿐이다.
불행하지만 그런 장면들은 기자들의 카메라는 물론 기사화(記事化)된 적이 없었다.(주10)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탕주의는 곳곳에 베어있는 우리들의 치부일 것이다.
<적색 공포증>은 이제 전투 지구(地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듯 하다. 아니 실전의 전장(戰場)에는 접근할 용기가 없기에 그들 스스로가 공포증에 허덕이고 있어야 했을 것이므로 결국 같은 의미가 될 지 모른다.

나는 하여간 살아서 돌아왔다. A백 속에 고작 빨래 감만 잔득 짊어지고서 말이다.(주:11)


주1: 1965 .8. 파월 전투 사단으로 맹호 부대가 탄생, 동년 11월 초 베트남에 파견 배치 완료 된 후 1973. 3. 철수함.
주2: 秀敬, 나의 첫째 딸, 당시 4살이었다. 그녀의 돌은 하와이 수련으로 보지 못한 나는 애착이 컸다. 2001년 현재는 결혼한 한 딸의 교수다.
주3: 1965년 파월 맹호 부도 후송 병원은 양수리에서 훈련을 마치고 당시 여의도 비행장에 집결되어 부산행 출발 대기 상태였다.
주4: 1950. 6. 25. 북한의 무력 침공으로 그 해 6. 28. 서울이 함락되고 3개월 후 9. 28. 국군이 다시 서울 중앙청에 태극기를 꼽았던 사이 삼각지 군부대에 대한 미군의 폭격은 용산 일대를 죽음의 도시로 만들었다. 나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B-29의 폭탄에 정신을 잃고 생각을 잃었던 얼마 후 왼편 바깥쪽 팔뚝에 조그만 조약돌이 들러붙는 것을 느꼈다. 요란한 소리와 더불어 폭약 내음이 전신(全身)을 뒤흔들었다. 나는 숨을 쉬고 있음을 알았다. 살아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바로 조약돌에 맞은 그 자리에서 뭔가 흐르는 느낌을 감지했다. 눈을 떠보니 파편이 거기에 박혀있었다. 반사적으로 뽑아 버렸다. 오른손 손바닥이 삽시간에 화상을 입었다. 그러나 결국 난 죽지 않았다.
주5: 1995. 6. 삼풍백화점 붕괴로 500명 사망, 1000명부상.
주6: 시도 때도 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시에 들이닥치는 헬리콥터 소리가 났다하면 군의관 숙소는 즉시 전문 과와 관계없이 수술실로 달려가곤 했다. 한정된 수술실, 전상자는 너무 많았기에 응급 처치와 전상의 경중을 분류하는 것만도 중요한 일이었다. 우리의 휴전선이 질시와 이기심으로 가득 찬 것과는 달리 전장의 수술실 주변은 말 그대로 전우애가 전부였다. 소대장은 대원을 향해, 사병은 소대장이 먼저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아물거리는 절규로 우리들 군의관의 울컥 치미는 억장을 난도질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너무 무능했던 이유다. 살리기 위해 수술대에 올라가야 할 병사는 열인데 수술대는 6개뿐이다. 서로 먼저 올라가려는 것이 아니라 ‘너’부터 올라가야 한다는 그 창백한 애원, 우리들은 전쟁을 원망하고만 있었다.
주7: 1967. 9. 6. 매몰 광부 16일 만에 구출됨.
주8: 우리는 1961년 5 ․16 군사 정변 이후 32년 간 朴正熙, 全斗煥, 盧泰愚 등 군 출신 대통령들이 통치하여 왔다. 이들은 국가 안보를 최상의 과제로 내세우고 국민의 민주적 요구를 억압하였다. 높은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역대 군부 정권은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 민주적 절차의 무시, 부정 부패, 장기 집권 등으로 국민의 비판을 받았다. 마침내 1987년 6월 민주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시행되었으나 김대중과의 싸움으로 1993년 2월 25일 비로소 민간인 출신의 金泳三이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문민 정부가 탄생하였다. 김영삼은ꡐ신한국 창조ꡑ를 국정 지표로 제시하고 과감하고도 중단 없는ꡐ위로부터의 개혁ꡑ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2월 27일 자신의 재산을 공개하고 ꡒ일체의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ꡓ고 했다. 그러나 문민 정부가 취한 개혁 작업은 법치가 아닌 人治라는 비판을 받았고,ꡐ깃털ꡑ을 희생양으로 삼고 ꡐ몸체ꡑ를 보호하기 위한 검찰 수사와 자신에게 쏟아지는 세찬 비난을 무마하기 위해 대통령은 대 국민 사과와 더불어 한보 사태를 서둘러 종결지으려 했다. 하지만 아들에 대한 대통령의 사과는 오히려 아들 문제를 본격적 주제로 끌어올렸다. 대통령의 사과가 있자마자 그동안 성역 중의 성역에 속했던ꡐ소통령 김현철ꡑ의 문제가 1997년 봇물 터지듯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울러 우루과이라운드에 따른 쌀 개방 약속으로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다. 그 결과 군부 독재를 대신하는 문민 독재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결국 IMF라는 비극적 사태를 맞았다.
주9: 1995년 1월 17일 일본의 고베에서 큰 지진이 있었다. 5천5백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형 참사였으나 기자의 취재 방식은 삼풍 사고와는 달랐다.
주10: 당시 종군기자는 사이공에 상주하면서 외신 기자들의 귀동냥을 통해 전투 상황을 본국으로 송고(送稿)한 것이 관행이라 했다.
주11: 당시 전장에선 고무배를 타지말자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시신은 고무주머니에 넣어 송환했기 때문이다. 한편 귀국 짐에는 미군 PX 앞의 진풍경의 대가로 TV와 심지어 냉장고까지 가지고 왔었다. 못하면 바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