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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시대를 끝내며.. 덧글 0 | 조회 15,357 | 2009-04-17 00:00:00
정동철  


-종로 시대를 끝내며-
1991년 수필집 박달회

일단 결심을 하고 나니 시원했다.
기쁨인가? 하여간 외치고 싶었다.
나는 종로를 떠난다. 성공적으로 종로 시대를 끝내고 자랑스럽게 떠난다고 종로 바닥이 다 알 수 있도록 방을 부치고 목이 터져라 외치며 떠나고 싶었다. 보고 들으며 배운 그 숫한 데모꾼처럼 이 지긋지긋한 종로를 미련 없이 떠나게 되었다고.................
그도 그럴 것이 월세 신세를 벗어나 나의 사무실로 간다. 집주인이나 그 지배인이 보자고 할 때마다 철렁거리던 그 비굴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종로 바닥을 누빈 후 떠나게 됐다는 사실이다. 종로를 지배한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대표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정치 1번지 종로는 공연히 생긴 표현이 아닐 것이기에 그렇다.
나는 거기서 대한민국의 정신과의사를 상당 부분 대표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대중 매체를 장악했고, 전국을 누비는 명연사(名演士)의 자리를 굳힌 후였던 탓이다.
그러나 웬 일인가?
서글프다. 허전하기까지 하다.
그 건물이 나의 것이었다면 결코 떠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한 이유다.

내 생애의 황금 시기는 종로(鐘路)였다.
나가라고 할 때 철렁했던 마음이 막상 90년 12월로 마감을 결정하니 쓸쓸하기 보단 지금 것 매달린 자신을 조소하게 된다. 억지였을까?
이유가 있다.
날이 갈수록 메케한 매연(媒緣)을 더 이상 들이마시지 않아도 된다. 겨울이면 별나게 춥고 여름이면 숨통이 막히는 더위만 해도 그렇다. 그뿐이 아니다. 하구 한날 파고다 공원을 끼고 배열된 국방색 인형과 흉물스런 전경 버스를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또 다른 하나의 꺼리다. 집에서 출퇴근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것도 그렇다. 차가 꾸역꾸역 쏟아져 한가롭던 88대로가 막히기 시작한 것이다. 남산 제2터널을 통과한다는 것은 일종의 전쟁으로 바뀌어가고 있을 정도다.
수시로 강요된 눈물을 흘리며 마치 특종이라도 취재할 양 카메라와 녹음기를 휴대하고 다녔지만 이젠 그런 짓도 부질없어 끝나게 됐다. 전연 아무 말도 없었다는 듯 무수한 만남과 이별들이 무대 위의 연극처럼 90년으로 종로 시대를 끝내기에 나로선 홀가분하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주1)
그러나 겉 다르고 속 다른 인간성이 나의 마음속에 지저분하게 깔려있음을 본다. 엎어져 살다가 헤어져야 할라치면 자질구레한 허점을 마구 쏘아대야 직성이 풀리는 그 치졸한 마음씨 말이다. 무엇이라 불러도 상관없지만 그런 마음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종로 시대는 기묘하게 시작되었다.
개업을 망설이고 있었다. 친구가 그의 직원을 시켜 대리(代理) 계약을 했다. 나의 의견은 반쯤으로 족했다. 얼결에 종로 네거리에 자리를 잡은 것은 1974년 3월이었다.(주2)
일희일비(日喜日悲)의 나날 속에 숫한 추억이 시작되었다.
만 16년하고도 몇 달이 보태지는 종로 시대는 나에겐 인생 제3의 시기였다.
군의관 시절(주3)을 뿌리치고 나온 것은 사회 제2기를 마친 셈이다. 결국 종로 시대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인생 제3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의사로서 개원은 최후의 목표다. 1974년은 그러나 한국 근대사에 의미 깊은 중심부에 의미가 도사리고 있었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 체제와 함께 비상 계엄령이 동시에 선포되었다. 한편 1979년 7월 1일 전국민 의료 보험제가 전면 실시되는 의료계의 변혁이 있었다. 그것은 자유계약제가 아니라 강제 계약제에 의한 것으로 개업가(開業街)에 중대한 분수령을 기록하게 되었다. 그 여파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주4)
1974년 6월 23일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으로 대왕코너에 살고 있던 나는 비가 오는지도 모르고 출근할 수 있는 새 시대를 맞이했지만, 대통령 저격 사건에 의해 육영수여사가 피살되었다. 이듬해인 1975년 2월 12일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가 실시되고 같은 해 5월 13일 ‘유신헌법 비방 금지 대통령 긴급 조치 제9호’가 공포됨으로 시국은 나의 병원이 있는 파고다공원 주변을 중심으로 반항이 극에 이르고 있었다. 다음해 1976년 3월 1일 3.1 민주 구국 선언이 발표되는 소용돌이는 나의 병원 앞마당 네거리에서 거의 일상의 데모와 체류탄 공방을 보고 또 보며 안타까운 시대를 한탄해야 했다.(주5) 그래서였나, 너무나 많은 사연들이 수 만장의 원고지(原稿紙)와 함께 희로애락의 깊고 큰 질곡을 관통하며 쌓여가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새로운 역사를 쓰기도 했다. 정신과의사로선 엄두도 내기 힘든 외래(外來) 전문의원을 개척했고, 한국 최초의 <성 치료>를 시작하여(1976년) ‘한국 임상 성 학회’를 창설했으며(1987.7.1.), 역시 일찍이 없었던 의과대학 의국(醫局) 단위의 정신의학보(精神醫學報)를 주간(主幹)하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신경정신과에서 창간(創刊)하였다. 전국 정신과 회원에 최신 전문정보를 무료 배포함으로써 접하기 어려운 외국 저널과 연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1977. 3.)(주6) 한편 서울 YMCA와 함께, 태화 기독교 회관, 사랑의 전화(주7)등에 발 벗고 나서 봉사활동을 위한 가능한 조약돌을 쌓아갔다. ‘여성의 전화’를 설립 운영함에 있어 많은 여성과 머리를 맞대고 열약한 환경과 싸우기도 했다.(주8)
특별히 개원 초기에 매우 깊은 정신적 힘이 되어준 이현우씨와의 만남은 잊을 수 없었다. 애환을 함께 하는 가운데 또 다른 하나의 준령을 넘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교 외래 교수를 비롯해서 경희의대, 한양의대 외래 교수로서 의과대학 학생 교육과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로서 나름의 전문적 역할을 피할 수도 없었다.
종로의 햇볕과 그림자, 그리고 낭만이 어찌 없었겠는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고통, 화려한 대중매체의 등단과 명강사(名講師)(주9)의 호칭을 들어가며 기라성(綺羅星) 같은 위치를 지키기에 이르렀다.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에 동시 연재를 위해 출근 버스 속에서까지 교정을 봐야했고 TV를 포함해서 라디오에 고정 출연을 소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연히 종로를 떠난다는 것은 깊은 사랑과의 이별과 같은 미묘한 감정이 뒤섞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떠나기를 잘했다고 여겼다.
아니 더 퍼붓고 싶은 이유들이 많기에 오히려 그때까지 머뭇거린 자신이 미련스럽기까지 했다.
인사동(仁寺洞)은 나의 본적지다. 마주 보이는 네거리에 앉아 고쟁이 속까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내보였던 16년의 결과로 디스크 환자가 되어 떠나야 하는 서글픈 마음은 사실 적지 않았다. 옆집 선배 의사는 세상을 떠났고, 종로 길이 넓어지면서 관철동을 젊은이들에게 빼앗긴 후라는 점이 화났다.
개업하던 날 보신각에서까지 보였던 나의 형광등 간판을 달 때 붉어지는 얼굴을 외면하던 중, 철면피가 되고서야 지금은 입(立) 간판 하나 없이 지내다 떠나는 것을 조금은 다행으로 여길 뿐 무던히도 암울했던 세월을 잊고만 싶은 것은 정말 야릇하다.
그래서일까?
그럼에도 텅 빈 영혼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지 그것이 숙제로 남는다. 지하철, 자가용, 버스, 아니면 택시로 오가는 한 시간 전후의 나만의 공간은 엄청난 창작의 보고였었다. 그것을 보상받을 방법이 있을지 망막하다. 보지 않았어야 할 것을 보았고, 하지 말았어야 할 것을 하는 가운데 상상의 나래가 원고지와 방송 매체를 타고 끈질기게 이어진 것은 고통과 기쁨의 다양한 색상들의 조각보였다. 얼마나 많은 조각들을 기어 왔던가.
결국 잠실 아시아 선수촌 아파트 15동,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정문 앞으로 떠난다.
내 이름으로 된 몇 권의 책을 쥐고 이제 1990년을 끝으로 종로에서 영원히 떠나는 것이다. 종로 시대의 끝자락에 이어질 여운은 다양한 색깔로 그 꼬리가 결코 짧지는 않을 것이다. 보내는 마음, 기다리는 마음의 세월이 어떤 것인지 그것을 그려내기엔 역부족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당장 출퇴근의 자원(資源)에서 태(胎) 줄을 끊는 심정을 무엇으로 대체해야 하느냐는 것이 자꾸 다가선다. 솔직히 아무리 이유를 갖다대도 속상할 뿐이다.
두려움이 있었다. 기쁨이 있었다. 흥분이 있었다. 보람이 있었다. 희망이 있었다. 변신이 있었고 아픔과 고통이 있었다. 슬픔도 있었다. 나와 종로의 현실은 늘 그랬다.
그늘과 쫓김 속에서 몇 잠 만에 누에가 진통의 실을 풀어내듯 그래서 삶이 숨쉬었던 곳, 그러나 정작 서글프고 허전한 마음은 애당초 함께 했던 종로 시대의 암울한 시대적 출발에 그 끝을 보지 못하고 떠난다는 사실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는 다소간의 거리가 있으나 군사 정권은 최소한 1993년까지 확보된 상황이다.(주10) 그 후를 예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그 후 보복의 악순환은 못다 본 화장실을 뛰쳐나온 기분이다. 가장 씁쓸한 종로 시대를 떠나는 감회다.
그래서다. 속으로 새겨본다.

“내년엔 웃으며 살게 되겠지.?!”
91년으로 이어지는 새 해는 찌든 매연으로부터 해방된 또 다른 세계가 나를 신선하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리라는 상상 때문이다.
거기 싱그런 꿈을 키워보리라(주11)


주1: 툭하면 터지는 최루탄 가스와 무지막지한 전경과 싸우는 결코 현명하다고 볼 수 없는 데모를 사진에 담으려 나는 노상 망원 카메라와 그들의 소리를 녹취하기 위해 펠립스 제품 포켓 녹음기를 지니고 다녔다.
주2: 1974년 초 친구 조동섭-동구약품 사장-이 개업을 망설이는 나를 끌어내기 위해 디테일을 하고 있는 그의 직원을 시켜 파고다 공원 건너편 네거리의 ‘파고다 피부과 의원’을 인수하도록 계약을 했다. 미령지에 작성된 내용은 권리금_______ 그는 나의 왕진 치료에도 불구하고 6년전 사망했다.
주3: 1960. 4.부터 1967. 10.까지 마산 훈련, 대전, 논산, 대구, 하와이, 춘천, 대구, 비에트남, 부산으로 이어졌다.)이 사회생활 1기라면 청량리 뇌병원(주: 1967. 10.부터 1974. 3월까지, 당시 원장님은 최신해 박사였다.
주4: 결국 초기 의료 수가를 상식 이하로 정했던 관계로 의사의 대량 범죄자 양성의 씨앗을 만들고 2000. 7. 1. 의약 분업 실시가 재정파탄으로 이어져 김대중 대통령 스스로가 사과를 하기에 이르렀지만 결국은 절묘한 뒤집어쓰기로 의사의 부당 과잉 청구라는 굴레로 문제의 핵심을 피해가는 해괴한 방식으로 넘어가고 있다. 언론 세무 조사와 함께 의사에 대한 세무 조사는 세정을 국정 운영의 도구로 이용하는 전형적 모델을 펼쳐가게 되었다. 시민 단체라는 홍위병 운운하는 공방이 비등한 것이 2001. 6.의 현실이다.
주5: 조금 구체적 주석이 필요하겠다. 군의관 훈련 중 1960년 4.19.로 이승만씨는 下野하고 윤보선씨-4대 대통령, 1960-1962-는 1961년 5.16. 쿠데타로 박정희씨에 의해 1962. 3. 24. 박정희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해서 물러났다. 1963. 12. 17. 제3공화국이 시작되어 1979. 10. 26. 김재규씨에 의해 시해 당할 때까지 5-9대에 이르는 대통령의 막은 내렸다. 거기 시정의 중심부에서 나는 산 중인이 된 셈이다.
주6: 정신의학보 1권 1호의 권두언은 이정균 과장님, 마지막 수상은 최신해 박사님의 ‘정신과 의사와 문학’이었다. 첫 호는 당시의 외국 최신문헌을 요약한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주7: 방송인 심철호씨가 개설한 ‘사랑의 전화’를 위해 정원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를 비롯해 나의 열성은 컸었다.
주8: 1975년 유엔의 세계 여성의 해 선포를 계기로 여성들은 사회 민주화 운동과 함께 여성 억압에 대한 독자적인 대항 운동이 필요하며 남녀관계의 민주화 없는 사회 민주화는 공허한 것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대중 여성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여성 억압의 문제를 부각시켜 새로운 여성 운동이 필요한데, 특히 양성의 평등을 침해하고 모성을 파괴하는 아내 구타 문제를 중요한 과제로 삼게 되었다. 1983. 6. 한국 여성의 전화 창립. 나는 아내 구타라는 상담에 대한 순수 여권을 위한 입장에서 창립 위원으로 참석하였다. 이화수 교수, 김희선 현 국회의원, 이계경 전 여성신문 사장, 2006년 현재 국회의원, 손덕수 교수, 이영애, 박인덕 교수 등이 참석하였고 후에 정희경 전 국회의원, 이인호 전 주소련대사, 등의 활동이 두드러졌었다. 후에 여성 운동으로 발전, 변신하면서 나는 스스로 사퇴했다.)
주9: 중앙일보(中央日報)에 사진과 함께 명강사로 몇 사람의 대학교수의 대열에 끼어 있었다. 1990. 박성수 현 전주대 총장, 원호택 서울사대 심리학교수, 박종심 교수등과 함께.
주10: 1991. 4. 19.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공식 방한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이미지를 그렇게 역사가 만들었을 것이다. 역대 대통령을 하나의 단어로 엮은 유행어가 돌고 있다. 총, 칼, 물, 돌, 꽝-뻥-이라는 것이다. 박정희씨로부터 현 김대중 대통령에 이르기까지의 항간에 도는 표현이다. 2001. 7.
주11: 원저와 달리, 자구수정에 가감이 있었음을 밝힌다. 2006년 노무현 정권에 대한 입장은 여기 주석에 참고 되어 있지 않았으며, 지금에 생각하면 스스로 자화자찬 참으로 못난 자신을 확인하게 된다. 다만 다른 글과 같이 야사의 한 토막으로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의미만을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