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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고향 덧글 0 | 조회 14,718 | 2009-04-17 00:00:00
정동철  


-침묵의 고향-

공항에서 집으로 오는 길은 허전했다. 텅 빈 생각으로 「가다 서다」를 반복하지만 짜증이 없었다. 짜증도 그러고 보면 사친가 보다.
나와 아내는 거의 말을 잊었다. 무엇엔 가 짓눌려 그저 무겁다는 느낌과 푹푹 찌는 밖의 날씨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전부였다.
같은 길을 2주전인가, 리무진 버스를 타고 올 때는 덥고 뿌연 서울의 공기에 관해서 북해도(北海島)와 완연히 다른 점을 아내와 얘기하며 아이들을 만날 생각에 정감(情感)의 부산한 자리를 틈낼 여유가 없었는데.....
오늘은 쾌적한 자가용을 손수 운전하며 내키는 대로 집을 향하는 넉넉함에 왜 이렇게 마음이 푸석푸석 찬바람이 스며들까? 둘째 딸이 두 아이를 데리고 시애틀로 가는 길을 배웅하고 오는 것이 안쓰러워서 일까? 아주 살러 가는 것이 아니라 마침 시카고에 연수차 먼저간 사위와 2주 후 딸의 친구가 있는 시애틀에서 합류하여 4주 후에 함께 돌아오게 되어있는 터라 일종의 휴가, 아니 풍요롭고 멋진 여름 휴가가 분명한데 왜 우리 둘은 이렇게 말을 못하고 청승을 떨고 있는 것일까? 사치스럽다는 생각 때문에?
한남대교 못 미쳐 왼 켠 강변 수영장에 빽빽이 들어찬 자가용들을 보면서 비로소 입이 떨어졌다.
“우리가 늙어서 그렇겠지? 여보! 돈을 줄 테니 저 틈바귀에 끼라고 하면 가겠소?”
“우리 수경(秀敬)이와 진(珍)이는 얼씨구나 할걸요. 두 아이를 데리고 고생길을 마다하지 않는 것을 보면 정말 답답해요. LA에서 갈아탄다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렇게 가지 말라고 말렸는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두 딸을 대리고 땡볕에 연포를 다녀왔던 그 옛날, 분명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고생 중의 고생이지만 마다하지 않았었다. 뒤늦게 아들을 하나 더 낳고도 연신 전국을 누비며 아니 간 곳이 없었다.(1) 그땐 풍요라는 단어가 아예 없던 시절이었기에 지금 생각하면 그야말로 끔찍한 일이다. 그럼에도 오늘 여름휴가 길에 외국 나들이를 하는 딸을 보며 안쓰러워하는 정체는 도시 무엇일까?
나는 원래 말을 즐기는 편이 아니다. 아니 말을 하지 않는 편이다.
금년 봄, 아내의 생일을 맞아 아들 며느리와 함께 제주도에 있는 지중해 풍 호텔 파라다이스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야말로 부럽지 않은 풍요로운 2박3일간에도 말보다는 몸으로 표현을 대신하곤 했다.(2)
며느리가 사준 다금바리를 먹고 이색적인 호텔 라운지에서 커피로 비릿한 뒷맛을 깔끔하게 희석할 때 축하의 시 한편을 내밀었다. 말이 없는 대가였다.(3)

세월, 긴 긴 세월
땅과 바다와 하늘이 빚어준
우리의 땅,
당신 마음 따스한 깊은 속에
마음이
커튼 넘어 지평선을 본다.
변할 듯 불변(不變)의 진대지(盡大地)!
다시
땅과 바다와 하늘이 빚어 낸
갈림길
우리의 삶이 있다해도
지평선 한결같이
우리 두 마음속에 영원하리라

에어컨 소리가 선풍기 바람에 휘어 들어오는 서재(書齋)에서 나는 계절을 외면하고 한가롭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아내는 이내 수영장으로 갔다. 어쩜 수다를 떨 것이다. 끈끈하고 칙칙한 밖의 뿌연 공기와 동떨어지는 쾌적한 책상에 앉아 생각의 얼음 조각을 쪼아가면서 그림과는 전연 다른 외로운 고독 속의 포로(捕虜)라는 느낌을 좀처럼 지우지 못하고 있다. 신나고 부푼 여행을 떠나는 딸에게 아내가 내뱉던 말에 저항감을 갖으면서도 결국은 아내 마음과 같은 것이었을까?
“이게 무슨 고생이냐, 돈 쓰고 고생을 하다니, 답답하기만 하구나..... 서연(瑞姸)아, 엄마 말 잘 듣고, 잘 다녀오렴. 빠이빠이... 서연(瑞姸)아! 지연(知姸)아...!”
들었는지 어쩐지 훌쩍 공항 출구로 사라지는 세 식구의 잔영(殘影)을 그리며 무거운 마음은 침묵 속에 앙금으로 가라앉는다.
갑자기 글귀 하나가 마음을 스친다.
「침묵은 금(金)」
침묵의 고향을 향한 나의 질병(疾病)은 아직도 욕심의 울타리를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명예를 가졌으되 나이 들어 멋과 맛은 메말라 뒤틀리고 주판알만 퉁기면서 뺄셈에 허기(虛氣)를 느끼는 동안 딸과 손녀들은 하늘 위 근사한 비행기 속에 높이 나르고 있다. 머리 속의 주판이 아내와 함께 재빨리 움직일 것이다. 돈이 아니다. 고생길에 관한 얘기다.
고생과 즐거움의 주관적 차이가 곧 세대 차이라는 사실을 아내와 나는 까맣게 잊고 마냥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니 입가에 쓴웃음만 여울진다. 그것은 풍요로울수록 상대적으로 오늘에 충실하는 젊음과 과거 속의 아픔을 끼어 안은 채 막상 바라볼 수 있는 미래가 거의 없는 늙은이의 차이로 해서 빈터를 채우려는 자구책인지도 모르겠다. 공허의 정체이자 침묵의 고향일 것이다.
그래도 끝내 굽히려하지 않는 것은 알량한 「삶의 의미」를 곱씹어야 된다는 고집이다. 좀처럼 물러서려 하지 않은 병, 딸과 손녀들에게 우리들은 과연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 것일까? 영원하리라는 외침은 메아리 없는 자위(自慰)에 불과할 것이 분명하다.
그나저나 정말 지금쯤 하와이 상공(上空)에서 두 아이에 치어 지쳐있는 것은 아닐까?
다이아몬드 헤드와 진주만(眞珠灣)의 애리조나 메모리얼이 상상(想像)의 스크린에 서로 다른 의미로 교차한다.(3)
화산(火山)의 폭발과 일본의 기습 폭격(1941. 12. 7.)은 침묵(沈黙) 이외 달리 삶의 의미를 말해줄 방법이 없을 것이다. 조형물이나 군사기지(軍事基地)로 되어버린 다이아몬드 헤드가 나를 포함한 3대에 명시(明示)할 것이 없는 이상 그저 흔적(痕迹)으로 나와 아내의 마음속에 아무런 증거도 없이 옛 노래가 될 따름일 것이니까........

(1)주: 1970년 전후 몇 년, 당시는 자가용이라는 것을 타고 다닐 때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버스를 타고 자갈길을 털털거리며 다니곤 했었다. 괴로움이라고 해 봤자 아이들이 행여 힘들까 그것이 걱정이었을 뿐이다.
(2)주: 3남매가 결혼을 하여 손녀만 4명을 보고 있던 시절까지 나와 아내는 2대의 렌터카를 이용하면서 제주도 곳곳을 누비곤 했다. 나는 그 옛날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었다는 그 호텔의 이색적 분위기를 무척 좋아했고 모두가 같은 심정이었다. 친손녀 娜熙와 함께 옆방에 나란히 아들 내외와 함께 묶게 된 것은 보기에 따라 상류층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 호텔을 온 가족과 더불어 자주 이용해왔던 것은 외국 여행보다 비경제적인 점을 인정했지만 달러를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3) 주: 나는 1963년 호놀루루의 내력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알라모아나 센터 꼭대기에 접시 같은 레스토랑은 빙글빙글 돌고, 와이키키 해변은 해운대보다 그리 낫다고 여기지 않으려는 저항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