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腦)세탁기⌟
2011.10.02.
정 동철
시대 하어수선한데 아내 잘 만나 얻어맞지 않으니 천만다행이다.
책을 보다 잠든 아내가 깰까 서제에서 부엌으로 다시 부엌에서 서제로 왔다 갔다 우연히 돌아가는 세탁기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찬바람 부쩍 커 아내 목쉴라 식당의 베란다로 통하는 창문을 닫으려는데 세탁기가 돌고 있어 가만보다 갑자기 빨래터의 아낙들이 떠오른 것이 이유다.
우주복의 둥근 얼굴가리개 모습을 닮은 투명창속에 이불이 돌아가고 있다. 지난주까지 덮는 둥 마는 둥 시원한 연초록 색상이 작품처럼 그려진 내 여름이불이 그 속에서 좌로 우로 뱅글뱅글 돈다. 돌다간 서고 섰다간 다시 돈다. 내둥 신기하다 싶어 바라보면서 옛 빨래터의 여인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한다.
대체 이 세탁기는 빨래 한번 하는데 몇 분이나 돌아가는 걸까?
대답해 줄 아내가 잠들어 호기심은 부엌문을 통해 세탁기 앞으로 이끌린다. 탈수에 불이 들어와 있다. 행굼이 껌뻑거린다. 그때마다 멎었다간 돌고 돌다간 수도꼭지와 연결된 호수가 팔딱거린다. 갑자기 휙 돌더니 섰다간 방향을 튼다. 과연 얼마나 돌고 도는 걸까?
결국 이 짓을 기약 없이 했었을 옛날의 어머니를 생각하니 새삼 어지간히 힘든 일이셨겠구나 싶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개울물에 빨래며 요강을 행구던 아낙들, 마음먹고 큰 빨래는 냇가로 이고가 빨래방망이로 죽지도 않는다 할망구 시어미 두들기기 얼마였을까 절로 이해가 간다. 술에다 계집질주제에 헛기침 얄밉고 거드름에 속 터져 또한 냅다 영감택 두들겼을 게 연상되니 웃음이 터진다.
하지만 웃을 일이 아니다. 내가 맞지 않는 게 다행이니 말이다.
천지개벽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빨래는 고사하고 40대 부인에게 해장국 안 끓여 준다 했다간 두들겨 맞는 세상이라 한다. 50대엔 웬 전화냐고 꼬치꼬치 묻다 맞고, 60대엔 옷 갈아입을 때 어딜 가냐 물을라치면 역시 얻어맞는다. 70대엔 같이 가면 안 되냐 하다 맞으며 80대엔 아침에 눈을 뜨니 아직도 살았다고 얻어맞는단다.
어느 신문에 실렸다며 아내가 전해준 요지의 대강이지만 한대도 맞은 적이 없으니 나 얼간이는 얼마나 다행한가.
아내의 말인즉 헬스클럽의 저녁이 되면 어디를 쏘다니다 몰려드는지 북적거리는 여편네들로 법석이라 한다. 환자들 중엔 숫제 미사리 즐비한 야간업소로 몰려가 자정을 넘기며 술과 노래에 수다를 버무려 스트레스를 풀고 들어가기로서니 뭐 그리 잘못된 것이냐 대드는 경우 적지 않다. 누구처럼 몸을 섞고 놀아나지 않는 인내(?)를 대견하게 여기진 못할망정 뭔 불평이냐며 덧붙인다. 환갑을 눈앞에 둔 돈푼께나 지니고 있는 사장이 말한다. 아내는 여왕, 딸은 공주, 아들은 왕자, 그리고 자신은 머슴이라 한다. 요즘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 어디 있냐는 아내의 댓말, 여인천하가 틀린 말은 아니다.
때리기는커녕 헬스클럽의 저녁풍경을 아내 역시 말로만 들었지 보지 못할 정도이니 이 또한 얼마나 다행한가.
세탁기가 계속 돌아간다.
직업이 그래서인지 MRI(자기공명영상)통 속에 갇혀 띠딕, 따닥, 띠릭띠릭, 뚝딱 뜨르르 좌우간 와장창 번갯불에 콩 볶듯 요란한 가운데 뇌 구석구석 모양이 들어나는데 세탁기에 들어가 요상한 이념으로 세뇌(洗腦, 물든)된 사람의 뇌-생각,을 깔끔하게 세탁하는 방법은 없을까 자세히 살펴본다.
원심력을 이용한 탈수야 MRI든 CT(컴퓨터단층활영)든 통속의 몸을 가만히 두고도 자장(磁場)의 기기들이 돌아가며 촬영하듯 원통을 가속기처럼 돌리면 가능한 일이나 뇌세포에 찌든 그놈의 얼룩들을 말끔히 세탁하는 ‘뇌(腦)세탁기’가 가능 함직 하긴 한 것 같은데 영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맞지 않아 천만다행이나 내 머리의 한계를 안타깝게 여기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필경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나오긴 나올 것이다. 이적까지 예상은 대략 맞아떨어졌으니까.
아내가 깼기에 물어본다. 한 시간은 걸린단다. 호기심에 10여분을 앉아서 돌아가는 모양을 쳐다보며 옛 빨래터의 여인들이 얼마나 고생했을까 생각했노라하니 뭐 할일 없어 그걸 쳐다보고 있었냐며 말한다.
“당신이야 말로 얻어맞아야겠구려!”
머리를 세탁하는 방법은 정말 없을까?
세탁기 속에 내가 들어가면 혹 방법을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도깨비 방망이 같은 둥근 플라스틱이 세탁기 안에서 내키는 대로 두들긴다. 자고로 북어와 여자는 두들겨야 제 맛이 난다하지만 남자가 얻어맞는 것이야말로 비로소 바로 된 세상이지 싶다.
좌측이든 우측이든 좌우간 정지(停止)는 물론 진화(進化)가 아니라 이동(移動)의 동력(動力)이야 말로 진리인 듯 하다. 어느 쪽으로가 아니라 돈다는 사실 자체 말이다. 뜻도 모르며 욕쟁이로 뒤범벅이 된 것처럼 융합기술-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된 convergence technology, 을 유독 내세우며 마치 창조주인양 기세등등한 사람들과 정당정치와 시민단체의 이념적 융합 또한 미묘한 학자들로 해서 이마저 헷갈린다면 얻어터질 세탁의 대상이 분명하다. 나도 큰 문제지만 불행하게도 남녀 간에 특히 물정을 모르는 젊은 세대의 게임 감성적 사고에 편승하는 이런 사람이 부쩍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 작금의 숙제다. 심각한 실업률과 맞먹는 형편이다.
⌜빨래 뚝딱 뇌(腦)세탁기⌟가 발명된다 해도 아마도 턱없이 부족할 것이 뻔할 것만 같다. 걱정이 팔자인지 돌 떵이 처럼 무거워지기만 한다. 이건 전적으로 사실fact을 중시하는 나의 자연과학적 입장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단순한 기우가 아니라 공황과 같은 사회과학의 설(說)과 설만 뒤죽박죽 요지경이기에 그렇다. 자칫 이른바 규범norm이란 단어 한마디를 썼다간 SNS(Social Network Service: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서 작살이 나는 것이 현실이라 더욱 찍소리 한마디 못하고 있으니 대책을 어디서 찾을 건가. 차라리 뇌에 꼈다 뺐다 USB(Universal Serial Bus: 범용 직렬 버스)를 만들어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 얼룩진 머리를 덮어쓰거나 붙여넣기로 수정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급한 것은 우선 뇌(腦)세탁기가 발명되는 것을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겠다. 요리조리 맞는 것을 피하는 나 또한 세탁대상이 분명할 것이긴 하겠지만..... 2011.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