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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 덧글 0 | 조회 14,242 | 2009-04-17 00:00:00
정동철  


영락없는 허수아비
-성황당의 장승?-



거울에 반사된 나의 나신 전체, 거기엔 영락없는 황금벌판의 볼품없는 허수아비가 있었다.

수영을 할 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잠수력은 돌고래처럼 여전했고 물속의 나의 몸은 자유자재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지희를 들었다 놓았다 신나게 즐기고 있었다.
호텔 실내 수영장을 독식하고 있었던 우리는 그러나 내가 비켜주는 것이 아들내외와 그들의 두 딸을 위해 적절한 시간이라고 여겼다. 누구의 암시가 없었다. 그저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천연스럽게 나왔다. 자신만만했었으니까. 행여나 싶어 감시하는 수영장 관리인, 젊은 친구들이 쑥스러울 만큼 그들 앞에 뻐기며 나왔다. 샤워를 했다. 상쾌한 기분, 게다가 찔끔거리는 하초의 괄약근을 풀어놓으니 숨이 시원했다.
짤순이 속에 수영복을 넣고 거울 앞에 섰다. 아주 기분 좋게, 당당하고 우람한 미스터 남성을 자랑하듯 그렇게 거기에 섰다.

웬일인가!
이건 아니었다.
앞뒤로 왔다갔다하며 거울 속의 모습을 확인했다. 돋보기로, 아니면 망원경으로 원근법을 동원했다. 결코 그럴 수는 없었다. 임종을 거부하는 강렬한 울부짖음이 몰려왔다. 그러나 결국은 사실이었다.
반사된 모습은 바로 나였다. 내가 틀림없었다. 반사된 나의 몸은 내 것이 아니라고 외쳤지만 그건 전연 쓸모가 없었다. 거기 확실하게 존재한 것은 가을 거지가 끝난 누런 벌판을 몰아치는 바람에 버티기 벅찬 허수아비, 휘날리는 바람에 헝클어진 허수아비, 이제 거기에 더 이상 있으면 있을수록 쓰레기 같은 존재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몰골이 아주 선명하게 거기에 서있었다.
놀랐다.
정말 놀랐다.
그런 <정동철>일 수 없었지만 너무나도 확실한 나였기 때문이다.
웬만한 처녀의 젖가슴을 비웃던 탱탱한 모습은 비에 젖은 허수아비처럼 늘어지고, 무릎의 근육은 영영 다시는 펴질 수 없는 주룸진 가죽으로 축 처져있었다. 볼록한 배, 가느다란 정강이, 구부정한 어깨, 마치 모택동의 마지막 모습이 얼굴만 달리한 체 거기에 가면을 쓴 듯 표정을 잃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리 봐도 분명 <정동철>이 아니었다. 하지만 더는 봐 줄 수 없는 그 허수아비가 아주 강렬하게 말하고 있었다.
이건 너! 이건 너란 말이야!
대중가요의 천박한 뽕짝이 가슴을 두드렸다. 마치 신경질적으로 아무리 큰 동작으로 쫓아봐도 소용없는 쇠파리처럼 윙윙거렸다.

카운터에 키를 주며 옷으로 위장한 <정동철>은 방으로 향했다. 유별나게 장식된 그 많은 거울을 보며 두 개의 <정동철>을 확인하고 또 강박적으로 확인했다. 미쳐 몰랐던 동전의 앞뒤와 같은 모습, 텅 빈 머리를 버티고 룸 소파에 주저앉자 맥주를 마셨다. 기막힌 맥주 맛, 그러나 냉방 바람이 예와는 달라 선득했다.
생각이 휘몰아쳤다.
줄거리가 없는 생각, 시공을 초월한 꿈 같은 상념들, 가다-서다를 반복하는 가운데 맥주가 비워지고 거울 속의 나타났던 허수아비가 다시 아른거렸다. 갑자기 한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며칠 후 손녀의 생일. 7월 19일 토요일이다.
나희를 위한 6개의 촛불과 하트모양의 초콜릿 케이크 앞에 그의 동생 지희가 부른 생일축하노래를 듣기 얼마 전, 경주에서 보낸 그들과의 모습이 찍힌 영상이 모니터에 재생되어 나오면서 그 허수아비를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나는 영락없는 늙은이였다.
나와 아내, 둘 이는 69평 넓은 아파트에 편한 대로 살다 보니 그렇게 늙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변함없는 입맛과 서로를 원하는 열정, 그리고 금요일마다 즐기는 호프집, 대학원 강의, 전국을 누비는 강연, 게다가 아직도 시선이 집중되는 착각에 도취되어 만년 청춘을 누려온 터 인지라 재생된 화면 속의 모습은 나의 가슴이 커다란 구멍을 휑하니 뚫어 놓았다.
힐튼 호텔 라커룸 전면 거울 앞의 허수아비가 거기에 정확하게 인생 터미네이터처럼 확고부동하게 있음에 서다.

촛불 여섯 개가
초콜릿 케이크에 꽂혀
아빠가 당겨 준 성냥으로 예쁘게 피네

우리 모두 생일축하 노래 불러요
나희.
여섯 살의 생일을 위해

훅...훅….
볼록한 나희의 두 뺨
예쁜 바람에 초불 꺼지자
모두 함께 신나는 박수
지희가 덩달아 언니 위해 손뼉 치네

예쁜 나희
영리한 나희
나비처럼 사랑을 담아오네

의사가 되겠다고?
되고도 남을 나희
사랑하는 나희
할머니와 할아버지
곱고 고운 나희의 두 뺨에 뽀뽀를 한다.
그리고
꼬옥 껴안아 본다.

나희의 여섯번째 생일을 위해서
정말, 정말
축하, 또 축하한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분당에서
나희를 위해. 2003년 7월 19일

아기염소 동요와 함께 반짝이는 화면에 나비가 내려 앉는 그림을 타고 올라오는 귀절들이다.

드레스 사뿐이 걷어올린 손녀와 할머니, 그리고 나 할아버지는 그들을 안고 빙빙 돌았다.
이제 그만, 할아버지 힘 드시다니까….
나희의 엄마가 한 말이다.

사실 나는 힘들지 않았는데…...
손녀들을 위해 이제 차지했던 자리를 비워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아직 힘들지는 않지만………(2003-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