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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한 노년의 여유 덧글 0 | 조회 15,810 | 2013-12-28 22:03:42
관리자  

 

아내와 함께한 노년의 여유

2013.01.26.

정 동철

 

 

옷집 계산대 앞.

딱히 살 것 정한 바 없는 아내가 1층 여성전용매장으로 자신의 것을 기웃거리며 더위를 식히는 듯 문득 나를 향해 슬며시 다가선다. 미소 조용히 터트리며 내 신발 내려다 보란다.

세상에... 아침 이슬에 젖을 새라 걷어 올린 바짓가랑이 바로 논두렁 걷다 나온 폼세다. 양말이 겉으로 올라와있다.

젊음의 상징이라 해야할 자라라는 옷집 매우 경쾌하게 붐비는 토요일 오후다. 뱀처럼 꼬인 계산대 대기 줄 꼬리에 보란 듯 노인의 망녕(?)이 연출되고 있었다. 놀람도, 당황도, 황급함도 그러나 거기엔 그런 것들이 없었다. 형광등? 놀라운 일이다.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관행으로 보면 흉일세라 수선스럽게 매무새를 바로잡았어야 마땅했을 처지였다.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바짓가랑이를 올린다. 아내 다시 바른 발을 보란다. 같은 수준이다. 두 눈에 넉살스런 웃음만 오간다. 명풍 가죽잠바와 잘 어울리는 모자 그리고 선글라스로 멋진 코디, 조금 건방을 떨던 내가 농군의 행색이 되어있는 모습 갓 쓴 두루마기 자전거처럼 언밸런스의 극치 채플린의 희극 그 자체다.

볼 사람 생각해서 입는 옷 아니고 듣는 사람 눈치 보며 하는 강연 아닌 처지, 대체 언제부터일까? 굽이굽이 세월이 엮어준 굴곡의 꾸러미인가? 아마도 개밥바라기별과 샛별, 노을과 아침, 저녁과 새벽이 다를 뿐 정체 몰라 유난히 빛나는 별, 오직 하나의 금성(金星)이라 불리는 행성(行星)임을 몸으로 익힌 탓인가 보다.

사진을 찍어둘 것 그랬지?.....“

 

늙음 그러나 감출 수 없는 티는 결국 배뱅이굿거리, 아내와 함께 한 노년의 여유라 위로한다.

이층 남성용 세타와 모자를 둘러보다 구두를 권하는 아내의 주문, 집에 걸려있는 것들과 어울리는 조합이 연상되어 신어봤다-정확히 말하면 그런 류의 신발은 원천적 거부감으로 아내를 무안하게하곤 하던 관례에, 순간포착 가격표 2만원에 홀려 신어보게 된 것이다. 적당히 맞았다. 이태리에 본점을 둔 젊은이용 자라-저렴한데다 세일로 세타를 29천원에 산 것을 입고 있었기에, 80에서 두 해 모자란 할아버지가 들리곤 했던 별난 취향이 결국 속일 수 없는 둔탁한 나이로 구두를 신고 벗다 터지기에 이른 웃음의 미학? 여유다. 어쩌면 아내와 첫 데이트에서 얻게 된 여유와 자신감, 덜거덕거린 세월의 굴곡에서 되찾은 첫 만남의 원형이 부활된 셈이다. 재생이 아니라 죽음의 신호를 알아차리며 명쾌한 출발점을 새로 확신하고 있음이다.

여유, 세월로 짜여진 부활의 원형(原型)을 다시 맛본다. 적어도 우리에겐 그렇다.

한 달에 두세 번쯤 만나곤 하는 친구가 있다.

넌 명품만 입니? 몸에 맞는 게 신통하구나...”

그러나 모르는 소리 인색한 늙음(?), 저렴한 가격에 빠진 매력과 취향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나만의 소박한 멋이다.

 

VIP란 명목으로 백화점 1년치 주차권 스티커와 김 선물세트를 들고-사실 그래서 나왔지만, 껄껄 깔깔 다시 백화점 식당가 한식집으로 들어선다. 엄청 춥다는 날 잠바 속 덮어쓴 자라의 모자아래선 땀이 밴다. 훌훌 벗으며 안내된 곳에 앉는다. 떡 만두를 우물거리다 눈에 띈 모녀 바로 통로 옆, 유난히 보기가 좋다. 대여섯 돌돌한 어린 딸은 엄마와 도란도란 다부지게 얘기를 나눈다. 냉면 발 몇 올씩 후루룩 귀엽기만 하다. 보고 또 흘깃 본다. 바로 앞엔 내 또래의 하얀 할아버지가 홀로 무언가를 머고 있다. 좀 있으려니 그 앞에 똑같은 모녀가 자리에 앉는다. 옆자리의 나이와 엇비슷하다. 엄마는 정면으로 딸은 뒤통수만 보인다.

우린 저렇게 귀여운 아이와 이젠 같이 앉을 기회가 없겠지?”

고만하던 두 손녀 실크로드인터콘티넨탈에 앉았던 기억들이 멀리 볼 수 없는 밴쿠버의 고등학교와 중학교 학생으로 변한 그들, 저맘때 할머니 떨어지기 싫어 , , ..”신조어로 보채던 모습만 어른거린다.

택시를 예외적으로 내가 먼저 탄다. 아내의 왼쪽 무릎연골 안의 인대가 운동선수도 아닌터에 살짝 찢어져 큰 사위로부터 치료를 받고 있어 다리가 설어서다. 아내를 위해 스포츠카대신 세단을 몰고 다니는데-스포츠카 좌석으로 들어가는데 엄두가 나지 않아, 오늘 토요일인 것도 어정쩡하여 아예 택시를 타기로 했다. 나설 때와는 달리 천원이 더 나왔다. 백화점 골목으로 들어서면 꽉 막힌 길 아내가 나설 때와 달리 백화점출구에서 바로 탄 택시가 집으로 오는 길이 더 막혀버린 탓이다.

 

아내와 함께 한 여유 세월에서 얻은 꾸러미, 달리 바꿀만한 것이 없다. 대한민국 이름 거룩하나 자기착취의 피로사회에서 총체적 부정(不淨), 부실(不實), 폭력(暴力)들이 샛별이든 개밥바라기별이든 뭐라 불리던 아니면 엔트로피Entropy와 정치/언론의 엇나간 진보로 하여금 대충돌에 의해 자폭하든 우린 어차피 금성이란 행성 하나라는 것 이외 더는 달리 생각할 여분 없음이 전부일 뿐 그래서 인가보다.

세월에 엮인 부활의 원형 여유 촉촉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