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그려진 나의 흔적
2011.6.20.
정 동 철
우습게도 나에게 주중 가장편안한 시간은 운전석에 앉아있을 때라 했다.
정신적 경매시장에서 뛰쳐나와 치명적 해방감이 늙은 핏줄을 타고 흐를 때 빠리의 소녀시대가 절대적 청중 가속기(加速器)의 열광을 통과하는 진동과 같은 맥박인가보다. 화끈하다. 스트레스. 반물질(反物質antimatter-물질을 구성하는 소립자의 반입자로 조성되는 물질, 물질과 반물질이 만나면 순간 폭발적 섬광으로 소멸된다는 것, 현존 물질세계에서 반물질은 아무도 잡아낼 수 없다고도 했었다.), 비록 16분밖에 잡아두지 못했다던 우주정거장의 실험(2011.06.05.)에서 춤추고 있는 듯 그런 결과일수도 있다. 착각 아니면 교란이란 표현이 더 현실적이다.
양성자의 충돌이 어떤 것인지 나는 모른다. 물질과 반물질의 충돌이 빛으로 사라진다는 그 빛의 의미는 물론 실체 또한 모른다. KTX의 시간표로부터 빅뱅을 감히 연상할 수 없는 빈곤하기 짝이 없는 정신적 양성자의 충돌로 초정신적 현상(반물질)이 고압으로 신경조직을 강타하는 흐름을 느끼게 될 거란 착각 그것이 혹 환각이라 부른다 해도 그저 후련할 따름이다.
나의 생활과 머리 속 어디에도 진리(眞理)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동(移動)과 열정만이 존재할 뿐이다. 세속적 부정부패가 어느 한구석 예외가 허용되지 않는 뒤편에 신선한 공간이라곤 눈 씻고 본들 어디에서도 찾아낼 수 없는 당연한 결과에 의한 것이다. 전(前)대통령의 자살과 지금 네거리 신호등이 설치되기까지 칙칙한 물감이 얼룩지지 않은 곳은 없다. 들이쉬는 공기, 벌컥거리며 마시는 물, 정확하게 청정의 증거는 아무데도 없다. 결국 찰나적이나 정신(물질)과 환각(반물질)의 충돌에 따라 빛으로 살아지는 섬광만이 참이라 느껴진다. 인간의 입으로 아니면 손으로 표현되는 어떤 것도 진리 자체와는 전연 닮은꼴을 확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이동(移動)⌟-변화(變化)나 진화(進化)가 아니다, 만이 만고의 진실이리라는 믿음을 더욱 강조하는 근거가 되어준다.
캐나다의 손녀들이 멀어져가고 있다. 패이스북facebook에 번득이는 다채로운 내용들contents과 속도감, 따라갈 명분을 잃고 야누스의 과거란 중심축으로 관심이 고인다. 당연히 잊혀진 길목의 할아버지, 우주기아가 되는 것이 나의 몫이다.
며칠 전의 전화,
“정동철박사님이시죠? 옛날에 TV에 나오셨던 분 맞죠?.....”
“................?”
“어디에 게신가 114에 물어보니 이름이 있어 확인하는 거예요.”
매우 명쾌한 30대쯤의 여인이다. 무슨 용건이냐고 문는다. 게시다는 것을 알았으니 마음이 놓인다는 것으로 끝이다.
누군가 날 구속하려 한다. 숫한 여인들, 결국 그들이 지니고 있던 나에 관한 흔적을 찾아 귀소본능처럼 한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 다녀갔다. 뭐라 해석해야 할지 그것은 명확하지 않다. 일종의 관계의 확인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거기 대체 나의 흔적이 어떤 모양으로 그들에게 그려져 있는 관계들일까?
고속화라는 가속기가 계속 치닫는다.
반정신 과의 일대충돌을 예고한다. 관심사는 어떤 색깔의 빛일지 그것이다. 하늘색? 쪽 빗 바다산호색? 아니면 싱싱한 산야의 초록색? 혹시 이글거리며 수평선을 박차고 떠오르는 태양의 아찔한 색? K팝 요동치는 배경색, 아니 흙색일지도 모른다.
궁금하다. 너에게 남아있을 나의 흔적이 네 가슴에 분명 있을 것이다. 거기 저마다 강조하는 초라한 가짜 정신 어쩜 거기에 사랑이 있었음을 말해줄 것 같지만 허공일 것이다. 네 마음속 나의 흔적은 나의 정신이 아니고 너의 선택임에도 거기에 매달려 인간적 정신이라 강조하고 사랑, 진리를 강요당한다. 허구.
가로등이 좌우로 누워있다. 앞쪽 저 멀리 서있다가 가까워질수록 다시 빠르게 누어버리는 가로등의 입체적 가상정신은 이내 한 점으로 모아진다. 섬광은 거기에 없는데 그게 정신, 예술이라며 모두가 떠들썩하다.
그런 걸까? 허상. 이동(移動)뿐인데......
고속화도로에 들어서면 가슴이 조이고 눈이 피곤해진다. 사실이다. 그보다 언제나 상위에 있는 것은 해방감, 그리고 움직인다는 것, 동시에 잡초같이 다양한 상상들이 날아간다는 점에서 빈 자리를 누리려한다. 마음을 비우라지만 현재 나의 수준으론 한계다. 소화불량 바로 불편함이다. 말하자면 원초적 불안이 찰나적 위험을 바꿔치면서 이동(移動)하는 가운데 모두 살아지고 있는 까닭이다.
그것은 아마도 나의 이중적 행태와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종일 잔머리만 굴리다 껌뻑거리는 습성을 상쇠하려는 뜻인 듯 달리게 되는 시간이 가장 편하다는 절규로 미화됐음이다.
너의 마음에 그려진 나의 흔적에 관해 이런 나의 습성이 과연 포함되어있을까?
가장 가깝게 생각해 본다.
아내의 마음에 그려진 나의 흔적 그것은 무얼까. 아들과 딸들에 남겨진 흔적이란? 보일 듯 그러나 안개 속이다. 친구, 그리고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환자들, 특히 인지행동요법이라는 정신치료를 한다며 상대방에 그려진 나의 흔적을 본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치료에 있어 그것이 성패를 가른다며 목을 매지만 허사다. 엇비슷한 의미로 상대방의 형상이 나의 마음에 그려진 모습 그 흔적을 정확하게 본다는 것 그것은 내 마음이라 쉬울 듯 그러나 역시 어려운건 마찬가지다.
어떤 흔적을 그들에게 남겼을까.
결국 섹스라 불러도 좋을 운전석의 동력으로 자신의 영역에 복속시킨 후 사랑이라는 단어로 그들 마음속에 쪼아둔 것이 바로 나의 흔적은 아닐까. 귀소본능에서 예외적 그 한 여인은 누구일까? 반물질 말하자면 비인간성으로 충돌하여 이미 이름모를 색으로 날아간 것에 연민을 잡으려 허우적거리는 내가 가장 근사한 답이지 싶지만 모를 일이다.
인간이 만든 인생의 가공적 진리는 어차피 그렇게 끝나는가보다.
맑고 깨끗했던 들녘 밤하늘의 별똥이 순간의 선을 만든다. 처음부터 없는 선 흔적의 의미는 물론 태초부터 진리(眞理)란 없고 이동(移動)만이 있었을 뿐 진화(進化) 역시 가당치 않았을 테니까.
감히 너에게 그려진 나의 흔적을 알려 넘보다니....... (2011.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