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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덧글 0 | 조회 14,653 | 2009-04-17 00:00:00
정동철  


적과 흑

스탕달의 이야기를 할 생각이 아니다. 따라서 소설 제목처럼 성자(聖者)와 군인(軍人)의 얘기가 아닌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적과 흑」이 왜 떠올랐을까?
갑자기 스페인의 투우장이 뇌리를 스친다.
햇볕 하나로 관광객을 모아 짭짤하게 재미를 보는 열정의 나라, 또레도 성곽(城郭)속에서 흑색의 투우가 빨간색에 취해 결국 등에 칼을 맞고 쓰러지는 그 혈사(血沙)의 광장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최근 각종 분규마다 머리에 매는 띠는 대체로 빨간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글씨도 그렇고 플랜카드도 그렇다. 깃발도 예외가 아니다. 열광하는 리듬의 군중은 경찰과 뒤엉킨 투우처럼 칙칙한 색이 많다.
웬일인가. 우리는 투우의 나라가 아닌데 어쩐 일인가.
빨간색을 선택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나는 물론 알지 못한다. 정신과 의사의 상징적 시각으로 볼 때 열정과 피로 연상되어지는 것만은 알고 있을 뿐이다.
왜 하필 빨간색이 선택됐을까? 섭섭한 느낌이 귓가의 머리카락을 흔든다. 마음은 탁한 청계천 공기만큼이나 답답하다. 나와 같은 시민은 투우 정도로 생각하려는 발상이 어딘가에 있는 것 같은 까닭이다. 사리 분별없이 빨간색이면 무작정 흥분하여 덤벼드는 그 시커먼 투우가 대중이라고 혹 없으이 여긴 것이 아닌가해서이다.
결과는 하여간 소란스럽다. 화염병과 최루탄의 공방전이 전국 곳곳에서 불붙고 있다. TV화면 또한 그 일색이다.
대중은 과연 투우인가?
대중은 우직할지 모른다. 민중은 그렇게 붉은 색만 보면 흥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중을 그렇게 얕보아도 되는 것일까? 민중을 그쯤 간단히 치부해도 되느냐는 것이다. 분명히 민중 속의 모래알 같은 나는 슬며시 화가 치민다. 아마도 우직한 탓인지 알 수 없다. 인간 내면의 심성(心性)은 어찌되었든 적어도 시커먼 투우 취급을 받는 것만은 싫다.(주1)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현상을 분석할 만큼 예리한 지식도 지혜도 없다. 다만 바보가 아니라고 외치고 싶은 것뿐이다. 그만큼 우둔하고 단순하기에 빨간색이 선택되었다면 역시 별 수 없는「칠 뚜기」인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주2)
하지만 자꾸자꾸 외치고 싶은 것을 어찌하랴.
나, 민중은 시커먼 투우는 아니라고....... 나, 민중은 흑(黑)도 적(赤)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따름이라고........ (89. 5. 3)

주1: 중앙일보(中央日報) 2001.6.15. 사설에 <‘붉은 띠’를 풀어라>가 실렸다. 뒤늦은 저널리스트 시각이 아닐지.
주2: 놀랍게도 2000년 의료 대란이 한창일 때 의사집단의 군중집회에서 역시 그 빨간색이 선택되었고 나 역시 그 속에 있어야 했다. 비록 빨간 깃발을 흔들지는 않았지만 그게 그거라는 점에선 한숨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