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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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이 무너지는 소리 덧글 0 | 조회 16,029 | 2009-04-17 00:00:00
정동철  


-벽은 무너지고-

놀랍게도 도처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독재가 무너지는 소리, 권위 주위가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길바닥이 내려앉는 소리, 소리와 소리가 눈뜨고 가는 곳마다 들린다.
언제 쌓아올린 벽이었던지 하여간 무너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급기야 체제가 흔들리는 소리까지 들려오고 있다.
무섭다. 두렵다. 소름이 인다. 어디선가 난데없이 튕겨 나올 것 같은 총칼과 귀신들, 사람마다 얼굴들은 그래서 어둡다. 무언가 변고가 일지 않고서는 수습되지 못할 그런 망령들이 불행하게도 우리의 감정을 에워싸고 있다. 공동묘지의 소름 돋는 밤과 같이......
무너질 때 무너지더라도 정신과의사의 눈은 도덕성의 벽, 정당성과 진실성의 벽을 버티려고 한다. 하지만 공자 왈 맹자 왈 할 형편이 아니다. 그런 기회가 원천적으로 없기 때문이다.
엉뚱하게도 수입(輸入) 장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유난히 거슬린다는 사실에 마음이 머문다. 어딜 가나 수입 상품이 시선을 끈다. 백화점의 수입 코너가 한산하다고 울상을 짓던 때가 며칠이나 지났을까. 그런데 가는 곳마다, 집집마다 수입 상품이 벽을 무너뜨린 지 오랜가보다.
남의 얘기를 할 때가 아니다.
어지간히 고집께나 세웠던 나의 집도 별 수없이 무너져가고 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해마다 외국에 나가지만 기를 쓰고 물건을 사지 않아 쩨쩨한 샌님이 된지 오래지만 나의 나라, 나의 집에서 수입품이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을 보고선 솔직히 시쳇말대로 나 또한「인식의 변화」를 깨우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밥술이나 먹는 사람이 외제를 사주어야 국산품 수출이 가능하다는 공식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시 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수출 단가가 높아졌다고 한다. 책임은 노임 상승이라 한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부(富)의 분배 방식으로 수용해야 할 일이다. 외국의 보호 장벽이 높고 두터워졌다고 한다. 논리적이고 합리적 서구인의 우월적 사고방식을 앞세워 천박한 욕심을 은폐하고 있다. 정부 관리가 땀을 흘린다. 뒤늦게 국회 사절도 나섰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의 관료이며 국회의원인지 정체가 불투명하다. 자신의 호주머니부터 챙겨야 할 이유 때문인가 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지난해 시사 주간지 타임이 한탄한 적이 있다. 미국 가정의 40%가 일본 제품으로 채워졌다는 것이다.(주1)
문호(門戶)는 개방되어야 할 것 같다.
「나」는 그것들을 사서 쓰지 않으면 된다. 지금도 국산품을 찾아 헤매는 나의 고집을 꼬집지만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벽은 이미 무너지고 있다해도 무력한 소시민이 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뿐일 것이다.
황홀한 외제 앞에 한번만이라도 생각해 보는 습관이 내가 익혀야 할 최선의 목표라 또 한번 다져본다.(주2) (89. 5. 11)

주1: 1988년의 미국 통계를 인용한 타임지의 보도 내용이다.
주2: 불행하게도 결국 나의 그 알량한 벽도 무너졌다. 21세기에 들어와서다. 수출대국으로 나라의 위상이 바뀌자 ‘사주어야 팔 수 있다’라는 명분을 빌려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