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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사슬에 묶인 뉴욕의 신문 덧글 0 | 조회 16,124 | 2009-04-17 00:00:00
정동철  


-쇠사슬에 묶인 뉴욕의 신문-

자유, 자유, 그리고 또 자유!
백주년 자유의 여신상이 황금 같은 낮과 밤의 현란한 불꽃과 크고 작은 3만 척의 배에 둘러싸여 허드슨 강(江) 하구(河口)에서 축하를 받던 날, 86년 7월 4일, 위대한 미국의 대통령 레이건은 연설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자유의 불꽃을 지키는 수호자 일진데! 이 불꽃을 드높이 치켜들어 오늘 온 세계가 함께 보도록 하자.”
과연 여신상은 이민(移民) 백주년 탄생 기념일에, 오른 팔을 높이 들어 맨해튼을 바라보며 거기에 불꽃을 지키고 서 있었다. 연설은 사실이었으며, 뉴욕타임스에 그려진 활자들은 어김없이 진실을 보도하고 있었다. 요컨대 자유, 그것은 미국의 대명사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랑하며 떠드는 자유는 정말 거기에 있는 것일까? 도대체 틈만 나면 대문짝만 하게「자유」를 강조하는 진의(眞意)는 무엇일까? 같은 날 워싱턴 D.C.에서 나는 그 자유를 또 확인할 수 있었다. 백악관을 끼고 의사당으로 꺾이는 한 부록 건너에 보이는 작은 빌딩 전면이「자유(Liberty)」로 점등되고 있었다.(주1) 그것은 여신상 백주년 기념 때문이라 치고, 동전마다 크기와 관계없이 새겨져 있는「자유」는 왜 필요했던 것일까.
혹시 자유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생각되어지는 말이 있다. 본래 행복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을 좀처럼 안 한다. 건강한 사람이 건강하다고 떠들지 않듯, 기회 있을 때마다 행복하다고 힘을 주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렇다. 상당한 일리가 엿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맨해튼이 자랑하는 뉴 월드 트레이드 센터 쌍둥이 빌딩을 끼고 도는 요크 빌 네거리에 뉴욕의 신문들이 무지막지하게 쇠사슬로 가로등 철주(鐵柱)에 묶여 있음을 본다. 25전을 먹어대는 가판(街販)대가 세계를 흔들어 대는 신문을 품에 안은 채 단단히 묶여 있는 것이다. 쇠사슬이 없으면 언제 어느 때 도망갈지 모른다는 그 도둑의 도시 뉴욕에서,「자유」라는 단어가 과연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 것인지 기묘한 연상에 이끌리는 것은 꼬인 나의 시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본질적 자유는 거기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자유란 단어에 관해 언어학적 이해가 없는 나로선 논리적 전개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자유의 어의(語義)를 개진할 의사는 당연히 없다. 그러나 자유가 평등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연이나 미국은 또한 평등이란 단어를 독점하고 있다. 자유가 그렇듯 평등이 미국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미국에 평등이 있는 것이 또한 사실일까?
자유는 다시 평화를 전제로 한다. 미국은 여기서도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평화를 누리고 있는 나라라고 강변한다.
자유, 평등, 평화, 요컨대 이 세 단어는 미국의 상징적 상표처럼 그들 언론은 독점 강조해 오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가판대는 철주에 이리저리 쇠사슬로 묶여 있어야 하는 비극을 전시(展示)하고 있다. 전연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미국의 도시 곳곳마다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흑인이 있는 곳이라면 예외 없이 말이다.
곧 평등이 없다는 뜻이다. 평화가 있지 않다는 말이기에 결국 자유가 거기에 없다는 결론이다.
미국의 진면목은 이제 서울에서 그 확실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미국은 결코 평등한 나라가 아니다. 항로(航路)의 이원권(以遠權)과 양담배로 대표되는 불균형이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 불공정을 떠들고 나온 것은 뉴욕타임스다. 남북간의 불평등 보도로 우리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이 뉴욕타임스였다면, 그럼에도 그들 미국은 한국에서 담배 판매권을 따내는데 성공적 단합을 이룩한 셈이다. 그런데 한미 항공 협상에서 6년 전의 약속을 참으로 무례하게 저버리고 있다. 철저하게 불평등의 관계를 영구화하려는 노골적인 얼굴을 내보이고 있다. 한미 행정협정(SOFA)에 이르면 과연 미국에 평등과 자유가 있는 나라인가 하는 것이다.
쇠사슬에 묶인 신문들을 어쩌자는 뜻은 아니다. 미국을 자유․평등․평화의 나라가 아니라고 비난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솔직히 그것은 우리의 일들이 아니다. 이렇든 저렇든 그것은 미국의 일이자 미국의 문제일 따름이다.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니며, 또 관여해서 될 일도 아니다.
문제는 우리들 자신의 시각이 어떻게 되어져 있겠느냐는 것이다.
미국을 에덴의 동산쯤으로 보려는 한국 사람도 있다. 미국은 과연 자유․평등․평화의 나라라고 바보처럼 입을 다물지 못하는 한국 사람도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분명히 그럴 것이다. 판단은 언제나 상대적이며 비교적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훨씬 자유․평등․평화가 없던 삶의 체험에서 보면 그것은 옳은 표현이다. 하지만 체험은 사람마다 같지 않다.
“여보시오, 뒤 주머니의 돈지갑을 조심하세요.”
워싱턴 부리지를 건너는 버스에서 생면부지의 백인이 맹하다는 듯 충고를 했다는 것은 이미 소개한 바 있다.
그러고 보니 나의 친구는 차에서 내릴 때 아예 자동차 카세트를 빼어 들고 나온다. 반갑다며 점심을 내는 그 친구가 그 세트를 식탁에 놓고 하는 말이다.(주2)
“잃어버리면 손해지. 눈 뜬 채 코 벼간다는 것은 바로 서울이 아니라 뉴욕이야!”
미국이 전부 이럴 리는 없다. 그러나 낙원이 아닌 불평등의 나라라는 것은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필라델피아 흑인 폭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그 지난날의 얘기도 평등하게 보도된 것은 없었다고 누군가가 꼬집었다.(주3)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그것은 정말 그들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 나라가 어떤 곳인지 그것은 있는 데로 알아둘 필요가 있다. 쇠사슬에 묶인 신문 가판(街販)대가 갖는 의미는 생각보다 훨씬 깊은 뜻을 시사한다. 절대적 자유, 절대적 평등이 없는 이상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지극히 간단한 것이 아닐까 한다.
양(洋)자(字)가 붙은 것은 예컨대 이원권(以遠權)이 보장되지 않는 한 아예 사용하지 않는 국민이 되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를 믿는 것은 약소 국가(?)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미제만 보면 사족을 못쓰는 얼간이들, 절제된 생활이 무엇보다 전제되어야 할뿐이다.


주1: 나는 필라델비아에서 열리는 한미 학술 대회에서 ‘한국에 있어서의 성 치료’에 대한 발표를 위해 미국에 갔었다. 때에 오랜 친구 김동욱군의 차에 실려 좀처럼 볼 수 없는 기념비적 행사를 보여주려고 뉴욕과 워싱턴 D.C.로 관광을 시켜주었다.
주2: 2001.9.11. 불행하게도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 카에다에 의한 테러로 무참히 무너졌다. 피해는 다음과 같았다.
뉴욕시
세계무역센터(WTC) : 실종 4972명, 사망 152명
아메리칸 항공 AA11편 탑승객 : 사망 92명
유나이티드 항공 UA175편 탑승객 : 사망 65명
워싱턴 D.C.
미국방부청사 : 사망 또는 실종 125명
아메리칸 항공 AA77편 탑승객 :사망 64명

주3: 앞의 친구가 아니라 대학 동기 동창으로 당연히 의사다. 훗날 LA에서 1995년 졸업 35주년 기념회를 할 때 회장이었던 나와 미국 주재 동기 회장이었던 이효빈의 얘기였다.
주4: 1968년 마틴 킹목사의 암살로 워싱턴 D.C.를 중심으로 흑인 폭동 진압은 일종의 전쟁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