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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험생과 부모 덧글 0 | 조회 15,980 | 2009-04-17 00:00:00
정동철  


꼬투리는 잡지도 잡히지도 말자

유월이 되기가 무섭게 거의 동시에 일거리가 몰아 닥쳤다.
“선생님, 저는 죽고 싶어요. 집-학교-공부, 집-학교-공부, 집-학교-공부밖에 모르며 살아요. 저는 말짱 허수아비였으니까요. 왜! 왜 이래야 되지요? 친구가 말하더군요. 무슨 재미로 사냐고.... 되물었지요. 대답이 웃겼어요. 여자 친구, 그리고 술과 담배, 그런 것이 재미라는 겁니다. 왜지요? 이러면 안 되는데 왜 그래야 합니까. 그런데 정작 모를 일은 그들의 성적이 나보다 좋다는 거예요. 무엇이 옳고, 무엇이 진실인가요. 선생님, 전 포기했어요. 학교는 이제 질색입니다. 어차피 전인(全人)교육은 표어(標語)죠. 점수 올리려고 가는 학교에서 제 아무리 집-학교-공부를 되풀이 해봤자 소용없다면 학교 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선생님, 그렇지 않아요?”
날씨와 함께 지쳐버린 수험생들이 어머니를 따라 억지 춘향으로 주저앉자 일단 말문이 터졌다. 거침없이 쏟아지는 얘기는 비슷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학생들과 씨름하느라 하구 한날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쉴 틈도 없이 세 칸 남짓 침침한 면담실에 갇힌 곰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 쏟아지는 강연을 감당하자니 정말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정작 기막힌 문제는 나같이 피곤한 사람이 아니라 수십만 수험생과 그들의 어머니라는데 있다. 그것은 추정이 아니라 현실이다. 나의 피곤은 사치에 불과하다. 맷퀴한 그림자가 꽃다운 이팔청춘의 마음을 뒤덮고 있는 어버이를 위해 열변을 토해보지만 과연 그 결과가 무엇인지 거기에서 또 다른 공허를 체험해야 하는 것이 실정이다.
서울 YMCA에서 강연을 했을 때의 일이다.(주-1)
제목은「수험생의 슬럼프 극복 방안」
프로그램을 담당한 실장과 그 전날 확인 전화를 하는 가운데 난리가 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좌석 예약을 받아 준비를 하고 있던 실장은 비상 대책을 세우면서도 거절하는데 진땀을 흘려야 했다는 것이다. 주문대로 수용한다면 만 명 정도도 넘을 판인데 좌석은 고작 5백 석, 강당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친교실에 스피커를 연결하고도 그것은 새 발의 땀 정도라는 것이다. 이미 기독교 방송국에서 녹음 강연이 며칠 자로 방송될 예정이라 밝혔지만 방법을 찾을 길이 없던 이들 봉사자와 그리고 기를 쓰고 들어야 되겠다는 학부모. 녹음 테이프를 만들어 배포하는 방안까지 제시가 됐던 이 아우성의 핵심이 도대체 어디에서 출발했느냐는 것이 곧 관심이자 우리 사회의 답답한 현실이다.
그 전날 밤 나는 잠을 설쳐야 했다. 그 날 따라「컬러로 본 1950년」이라는 다큐멘터리가 TV로 방영되었다.
어쩌면 그 속에 나의 어린 모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묘한 옛 생각과 37년이 지난 오늘의 수험생을 마음속에 번갈아 그려가며 이미 준비된 자료를 다시 다듬어야 했었던 강연. 과연 현장은 TV 조명과 카메라 플래시와 그리고 그 많은 청중으로 해서 난장판이었다.
<정동철>의 강연이 기발해서 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주중 행사처럼 되어 있는 이곳 저곳의 강연이 줄을 잇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해도 그것은 착각이다. 수험생을 둔 안타까운 부모가 그만큼 많다는 것이 이유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슬럼프에 빠져 머리를 조아려 참에 취해버리는 학생이 널려있다는 뜻이다. 아니 더 명확히 말 하다면 자녀와의 껄끄런 관계를 모면하면서 기발한 효과를 얻어낼 수 있는 묘책이 요구되는 그런 마음이 전국 곳곳에 번져 있었다는 증거다. 폭팔 직전의 이유 없는 반항아들의 수험생을 어떻게 구슬려 위기를 넘기느냐가 문제의 핵심인 셈이다.
우선 불을 끄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절대 절명의 요구였다.
결론은 꼬투리를 잡히지 말라는 것이었다.
꼬투리가 잡혔다하면 주객이 전도된다. 수험생은 때를 기다렸다는 듯 나자빠지기 일쑤다. 그렇게도 순종적이던 아들이 맞상대를 불사하는가하면 보란 듯 가출을 하거나, 심지어는 골탕을 먹어보라고 자살까지도 거침이 없다.
이미 상전(上典)이 되어버린 수험생이기에 꼬투리가 잡히지 않는 요령은 간섭과 강압이나 비굴한 회유책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때는 늦은 듯 싶지만 수험생 자신을 위한 자신의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 조성과 그런 요구를 뒷받침하여 그렇지 않고는 길이 없다는 점을 일깨워주는 것이 상책일 뿐, 전면에 나서 마치 부모가 공부를 대행(代行)하듯 수선을 떤다면 어디선가 반드시 꼬투리를 잡히고 만다는 얘기다.
알다시피 10대 말년의 청소년, 소녀의 심리적 특성은 새로운 자아 개념을 확정지으려는 정체감과 독립심, 그리고 이상주의와 충동성이 교차하면서 또래의 친구나 이성과의 교제를 넓히려는 때다.
자신의 배를 자기가 직접 저어가고 싶어한다. 극성스런 부모가 자녀의 배에 올라타 노를 부모 마음대로 젓는데 울화통이 터지지 않을 수험생이 몇이나 될까. 이미 4당 5락이라고 몇 년째 시달려 오고 있던 그들이다. 녹초가 되어 지칠 데로 지쳐버린 판국에 그러나 그것은 도리 없이 자신의 일이자 문제라는 느낌이 와 닿을 때 그들은 기꺼이 자신의 문제를 극복해 해 낼뿐이기 때문이다.
한데 연중행사처럼 반복되는 이 입시 지옥에서 가족 전체가 몸살을 앓아야 하는 이 일이 언제까지 반복되어야 하는 것일까? 자녀 교육 문제로 얼마나 많은 부부가 싸우고 있는지 그것은 안중에도 없는지, 입시의 병폐는 하염없이 반복되고만 있다.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왜! 왜? 왜……」라고 외쳐대는 학생들은 조만간 데모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부모가 아직도 많다. 원하는 대학에 극성을 부려 입학시켜놓고 뒤 미쳐 자식을 잃어 통탄하는 어머니 또한 적지 않다. 그뿐인가, 일류 대학을 나오고 장가 시집가면 그들은 거의 부모를 외면하고 만다. 극성 부모의 자녀일수록 그 가능성은 언제나 높다.
안목이 필요하다는 것은 당연하다. 누구를 위한 자녀 교육인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부터 부모는 진작에 치부해야한다. 자녀가 대학생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그런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제도상의 문제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수요 공급의 원칙이 좁은 대학으로 제한되어 있는 이상 도리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자녀 자신의 문제다. 대학생이 학사 경고를 받느냐 여부는 부모가 할 일이 아니라는 엄연한 뜻에서 그 의미를 냉정하게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덧 부친다. 제도상의 보완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학 학비를 대폭 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볼 필요가 없어야 한다. 분수를 알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대학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도 그것은 필요하다. 동시에 장학제도의 폭을 또한 대폭 늘리는 것이다. 돈 없어 우수한 능력이 중도 포기된다는 것은 비극이다.(주-2)
입학 기준이 그렇다고 학력고사만으로 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고교 생활을 통해 사회적 나름대로의 활동 상황이 어떤 것으로 되어 왔었는지 평가되는 것이 필요하다. 내신 성적이 아니라 교내-외 활동, 운동, 고적 답사, 봉사와 같은 것이 실적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방학 동안의 다양한 사회 봉사 활동 등이 평점으로 환산되어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탁상에서 말로만 자문자답하는 혼란스런 정책보다 수험생의 앞날을 위해서 우리가 이제 분명한 대답을 준비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고 본다. 거기에 부모가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또한 절대적이다. 대학생이기 전에 사람다운 사람을 입학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1) 1987년 여름 수험생을 둔 부모에 대한 강연은 연중 행사로 여기저기서 수없이 쇄도했다. 서울 YMCA는 내가 봉사하고 있던 곳이었으며 그래서 다양한 교양 강좌를 맡곤 했으므로 그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강당은 좁다. 주말마다 양주동 박사의 해박한 유머와 맞장구를 치며 東亞방송을 위해 녹음했던 곳이기도 하다.
(2) 2001년 11월 ‘이해찬 1세대’가 수능시험을 보고 나와 울음바다를 연출했다. 누구나 대학에 갈 수 있다고 <국민의 정부>가 내세운 의도는 순수했을지 모른다. 문제는 학생들의 실력을 하향 평준화하는데 기여한 것이었다. 결과 준비되지 않은 탁상공론이나 1회성 영웅주의 발상으로 <2002년 2월 한국의 교육 현실>(중앙일보 2002. 3. 1.)은 ‘이해찬 세대’ 신입생, 대학서 과외 시킨다며 꼬집고 있는 실정에 이르렀다. 下向 평준화가 아니라 上向 평준화를 해도 세계화 시대에 살아남기가 어려운 현실은 기초학력의 부실로 대학 강의를 따라오지 못하는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선의의 경쟁에서 돈 없이 기회 평등을 시장 원리에 맡기는 연구와 실험적 검증을 거쳤어야 했음에도, 국민의 정부 政策者들은 오히려 醫藥분업과 함께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고액 과외와 서울특별시 特區 대치동 일대로 몰리는 수험생을 막기 위해 세무 조사가 한창이지만 그것은 要컨데 비극이다. 그와 같은 부산물의 참극은 더 이상 없었으면 할뿐이다. 2002년 3월 15일자 미 과학기술 전문지 Science는 2000년대 초 理工界기피로 2010년 한국의 고도성장은 어려울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강연을 할 때만 해도 지금과 달랐음에도 걱정이 태산이었다. 理工界마저 외면당하고 있는 우리의 미래는 암울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