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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성당을 건축해야 합니까? 덧글 0 | 조회 15,667 | 2009-04-17 00:00:00
정동철  


성당을 다시 건축해야 합니까?

경주(慶州) 힐튼호텔, 성재 미술관에 진열된 작품 중 하나의 제목이었다.
성당을 다시 건축해야 합니까?
현대 젊은 중국(中國) 작가들의 활동을 엿볼 수 있는 7월 초(‘97), 나는 그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목매한 사람을 딛고선 천사(天使)’라는 부제(副題)가 인상적이다. 성당 건축을 위한 유명한 신부님들의 학수(鶴首)회의가 앞 벽면에 커다란 사진 속에 있었다. 그 앞 회의 탁자엔 신부(神父) 대신 구겨진 종이 뭉치가 그들을 상징하고 있었다. 스쳐 가는 생각들이 어수선했다.
이따금씩 예외적 경험이 느낌이란 채에 걸려 쌓여 가는 곳이 교회다. 어느 날이었던가아내가 안내를 책임지고 있다 해서만은 아니지만 신자(信者)가 아닌 나로선 이것저것 배우게 되는 곳 중의 하나다. 목사님을 비롯해서 어떤 재벌의 총수가 시무 장로로 있으나 인사를 나누지 않는 나의 묘한 고집 속에 역시 그날도 특별한 경험을 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시니…」
찬송가 가사에서 느낀 별난 체험이 아니었다. 찬송가가 가야금 독주의 독특한 색깔로 바뀌어 파도처럼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밀고 당기며 튀는 가락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여백(餘白) 속에 우리의 혼(魂)이 수북히 쌓여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던 탓이다. 일본이나 중국의 것과는 맛이 다른 것은 물론이다.
목사님의 설교는 그러나 어쩐지 공허했다.
심은 대로 거두리라 열변을 토하는 가운데 암(癌)과의 가파른 전쟁을 하고 있던 두 ‘성도(聖徒)’가 모두 <옥(玉)합 축제>를 위해 치료비를 내놓았다는 것이다. 감동 그것이라 했다. 두 사람을 위해 통성 기도를 하자고 했다.
멀거니 장내를 두리번거리며 들려오는 소리들에 나는 전연 다른 감정을 불러오고 있었다. 찰칵 찰칵 빨간 검수(檢數) 집사의 손끝에 머리 한 몫을 보태주는 나는 교회의 암세포(癌細胞)일지 모른다.
“도대체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있으며, 거기서 무엇을 하기에 그 치료비를 냉큼 받고 사람의 입을 빌려 감사 기도로 대신하고 있는 것인가요?”
자그마치 27억 여 원의 돈이 <옥합 축제>를 통해 모금되었다고 했다.
수 백억 원의 건축비가 들어가는 ‘성전(聖殿)기금’을 위한 부흥회도 있었다. 초대형 교회, 북한의 동포를 위해 수억의 기금을 모아 옥수수를 보내고 계속 그렇게 기도하자는 이웃사랑은 과연 초호화(超豪華) 대형 하드웨어가 왜 필요한지 이해하는데 계산이 쉽지 않았던 나, 거기 나의 저항감을 내몰고 가야금 특유의 끊어질 듯 이어지는 얼을 체험한 것은 감동적이었다. 그것은 실로 예외적이다.
수 십 억대의 파이프 오르간이 수학적 홀수 배열로 무대 전면(前面)을 꽉 채워 설교대(說敎臺)를 압도하고 있었다. 설교대는 대체로 왜소하다는 것이 나의 일상적 느낌이었다. 바로 그 앞에 우리의 얼과 한이 담긴 가야금을 통해 잘 어우러진 한복을 비집고 나온 여인의 손이 찬송가를 타고 있었다. 소리는 여백 속으로 거의 희미하게 살아지는 듯 예배당(실제는 강당)은 인척조차 느낄 수 없는 고요로 변했다. 마치 분명 가야금을 타는 여인은 있는데 소리가 없는 것이었다. 적어도 겉으론 그랬다. 그러나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 엄청난 파이프 오르간에서 내뿜는 소리가 가야금 독주를 뛰어넘지 못하리라 여겼기에 뭉클거리는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마치 자본주의 A급 태풍이 서양식 민주주의처럼 압도하고 있는 대형 파이프 오르간 앞에 보잘것없이 초라한 조그만 가야금이 나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다는 것은 단순한 감동이 아니었다.
나는 늘 생각한 적이 있었다.
왜 예수는 서양 사람이었을까?
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며 천당(天堂)이라는 허상(虛像)을 결코 바라보지도 않는다. 스스로 볼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절대자 신(神)이라는 거대한 산을 향해 통성기도 할 때 거기 메아리 쳐 들려오는 자신의 목소리를 하나님의 성령(聖靈)으로 해석하지 않고선 위로 받을 수 없는 나약한 인간, 아니 죽음과 두려움을 모면하려는 그 애착과 욕심 때문에 교회는 기하 급수로 늘지만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은 연약하여 어리석은 무능아(無能兒)로 전락되고 있다는 것을 보고 있다. 프로이트의 얘기가 아니라 나의 조막 만한 소견이다.(주-1)
나의 믿음은 놀랍게도 이렇게 다르다. 그럼에도 교회에 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인생을 배우러 2-3시간을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울타리가 없는 것이 교회가 아니라 너무나 굳게 드리워져 있다는 것, 통성기도의 애절한 마음은 거리로 나오기가 무섭게 교차로의 신호등(信號燈)을 무시하는 위선, 전직 국무총리 대기(待機) 전담 장로의 조아리는 미소, 새로 등록한 신자를 환영한다는 면담실(面談室)은 목사님들의 먹거리 장으로 떠들썩한 세속(世俗), 교회 앞마당의 알칼리성 식품 선전 대형 플래카드, 2중 국적의 미국(美國) 시민(市民) 담임 목사의 본토 영어가 섞인 기도(祈禱), 이른바 성도(聖徒)들이 지금에 이른 고난과 슬픔을 함께 한 바 없던 원론적 설교,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힘겨운 헌금은 마치 도박장의 밑천을 방불케 하는 은혜의 대가들로 죄를 강요당하고 있는 것들, 그러기에 코앞의 진상(進上)과 교활함만이 통용되는 교회 상부(上部) 구조, 바로 이런 모순과 불평등이 있음에도 어린양들은 나름대로의 집을 지키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보고 배울 수 있다는 것은 값진 헌금의 대가다. 그 모순과 갈등은 나에게 모두가 귀중한 선생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비난하고 헐뜯는 것으로 일관하지 않고 거기서 거울처럼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읽어 낼 수 있음이다.
아내와 나는 이미 약속한 바가 있었다.
지금의 교회를 아내에게 소개한 것은 나였다. 교회로부터 강연을 부탁 받는 일이 많았던 나는 역시 그 교회가 청탁한 강연을 끝내고 느낀 소감이 그 중 좋았다고 여겼었다. 대신 아내가 본래 다니던 교회로부터 이전(移轉)하면서 결코 <권사(勸士)>가 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주-2) 권사가 되면 그때부터 나는 교회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소박한 믿음, 목사의 몫을 신도가 깡그리 하는 그런 신앙은 적어도 나에겐 맹신자(盲信者)로 판단되었다. 장인(丈人)이 목사였던 이유만은 아니다. 아내의 종교적 자유를 핍박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높은 자리로 올라가 걸맞지 않는 삶으로 위선을 더욱 두텁게 강화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가야금 찬송은 나의 언어로 삶의 의미를 지그시 계속 토해준다.
나, 비록 신(神)을 믿지 않지만 절대자를 향해 강구하는 마음속에 피어나는 생명들이 숨쉬며 용기를 잃지 않고 사는 모습은 따스하기 그지없음을 본다. 네거리의 약속처럼 신호등을 비켜서는 현실을 아쉬워하지만 그 약속을 저버리지 않으려는 삶이 왕왕 그곳에 있는 것이다.
직선 보단 곡선, 빽빽한 기계 보단 여백의 넉넉함이 죽어 가는 무례함을 생수처럼 신선하게 일구어 주는 것, 바로 가야금 찬송가는 우리의 넋을 이어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일차적으로 아내를 위해 교회에 간다. 권사 출마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라 했다. 이차적으로 삶의 또 다른 싱싱함을 보는 것이 거기에 있기에 주일 헌금 보단 이웃 돕는 봉투에 더 많은 돈을 넣게되는 마음을 시험하곤 한다.
우리 모두는 미워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바로 이웃이자 울타리를 쳐야할 필요가 없는 <우리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왕왕 기도는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버리기 위한 것이라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경우가 있으니 그것 또한 기쁨이다.
성당(교회)을 다시 건축해야 합니까?
버리는 기도의 소리를 듣게 될 때 삶의 참뜻이 함께 숨쉰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

(주-1): <교회가 망해야 신앙이 산다>는 뜻의 책 한 권이 2001. 7. 나왔다. 톨스토이의 단편 두 노인-예핌과 에리쎄이-을 통해 예배 장소보다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마음이 있는 곳이 중요하다고 한 것과 유사한가?
(주-2): 강북에서 강남으로 1980년 이사를 했기에 먼길을 가느라 고생을 하며 망설이던 때였다. 그 조그만 교회에선 아내와 나에게 권사나 장로의 자리를 준비하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부질없는 것이었고 결국 아내를 강남으로 옮기도록 한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내를 교회에 태다 주고 또 다리러 가는 일은 싫지가 않았고 늘 그렇게 했었기에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트인 인간관계가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이곳 대형 교회 역시 사람을 알아보는 눈은 더욱 더 흐렸기에 사람을 쓰는 방법은 매우 요령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