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뇌가 궁금하다
2014.04.23.
정 동 철
불가피하게 여기 쓰고 있는 ‘나’라는 대명사는 누구나 쓰고 있는 나라는 의미로서가 아님을 전제로 한다.
사전적 의미의 ‘나’라는 뜻이, 나의 실체를 정확하게 대변하고 있다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확실히 밝힌다면 나는 나를 모르며, 다만 뇌의 지시명령에 의한 탈을 나라고 인식하고 있어서다.
게다가 아직 어떤 것도 나에 의해 새로 창안된 결과를 내세울 그 무엇도 없음은 물론
모두 빌려 쓰고 있다는 것이 이유다.
곰곰 둘러본다. 아무리 봐도,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동안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쓰고 몸으로 한 짓 모든 것들은 따져보니 이른바 창조적 유일무이의 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분명치 않으니 당연한 결과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사실이다.
A4용지가 나오기 전 200자 원고지에 쓴 글로 치면 수 만장에 이른다.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했던 말, 대학 강의나 방송에서 그리고 어림해 천 수 백번에 걸친 다양한 집단을 대상으로 전국을 누비며 유창하게 쏟아냈던 강연의 단어들, 이들 언어는 결국 내가 만든 나만의 새로운 어휘가 아니었다. 그저 문화의 대물림 단위라고 하는 밈Meme(그리스 어근으로부터 미멤mememe)에 의한 것들, 쓰고 말할 때는 몰랐지만 한마디로 빌려 온 것뿐이다. 언어만이 아니다. 먹고 싸고 울고 웃고 난폭한 황홀감을 포함해 이른바 문화와 예술적 사고와 행동 모두가 이기적이든 이타성이든-그런 경우가 있었는지 모르겠다만, 다 그렇다. 깡그리 사진을 찍어내듯 몽땅 베낀 복사본일 수는 없다. 그것은 천재나 컴퓨터라면 몰라도 나에겐 아예 엄두조차 낼 수 없는 불가능 그 자체다. 분명한 것은 감정이란 떼로 절어 지워지지 못한 기억의 조각들을 조합하기까지 판박이처럼 같을 수는 없었겠지만 거듭 강조하지만 원천적 창안의 결과는 아니다. 저작권을 주장할만한 오리지널 창조적 정보는 결코 없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런 현상들은 정말 신기하다. 거의 80년을 살아오면서 나만의 것도 없이 먹고 살아왔다는 사실, 이미 있었던 것들을 교묘하게 이용하면서 목숨을 지금까지 부지해오고 있다는 것은 일종의 기적과 같은 얘기다. 그것은 그러나 역시 사실이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뇌Brain라는 기관이 머리통 안에 마치 허우대 요란한 텅 빈 컴퓨터 속의 조그만 중앙처리장치 CPU처럼 자리 잡고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 놈의 뇌가 얼마나 똑똑했기에 긴긴 세월 사기꾼처럼 능수능란하게 그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속임수를 통해 살 수 있었는지 기가 차다. 그래서다.
나의 뇌Brain가 궁금한 것이다.
대체 뇌에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어 거친 세파 속의 나는 인간들과 엎어질듯 결투를 멈추지 못하면서도 사멸되지 않고 오히려 진화되었을까? 결과는 오관을 통해 감지되는 정보로만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저마다 주먹다짐을 하며 주장하는 입장이 같지 않은 뇌가 있어서? 뇌의 역사, 말하자면 인간사를 들여다보면 뭔가 실마리가 잡히지 않을까 그래서 기웃거려본다. 느낌이다. 생각이 들뿐 그러나 사실자체를 단정할 수는 없다.
우선 뇌의 해부학적 구조와 기능을 잠시 집고 가야겠다.
나의 눈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기억을 더듬는다. 뇌는 대략 몸 무개의 2%정도, 1.5kg 안쪽이다. 두부보단 녹두묵에 가깝지만 보다 덜 물렁하다. 세포수가 천문학적이다. 거기엔 신경세포Neuron와 교질세포Glial Cell가있다. 건축물로 치면 뼈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 접착제와 같은 젤라틴 역할을 하는 교질세포, 이 세포는 흥분성이 없는 절연체다. 건물 뼈대 속에 전선과 전화선은 물론 다양한 연결파이프들이 가득하듯 뇌 안에만 바로 전선회로에 해당하는 신경세포(2천억 정도)와 혈관들이 현재 세상 어떤 컴퓨터도 따를 수 없을 만큼 빼곡하다. 교질세포와 신경세포 두 세포의 비율은 부위에 따라 또는 연구자에 따라 다르다. 10:1에서 1:1, 해마Hippocampus는 17:1, 소뇌에선 역전되기도 한다. 필요에 따라 그렇게 됐을 것, 진화는 결코 불필요한 것에 에너지를 쓸 만큼 한가하지 않다. 신경세포들은 서로 치밀하게 다른 신경세포와 연결되어 있다. 정보전환을 위해서다. 전선과 다른 점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한 가닥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신경세포에서 흥분된 정보가 다른 신경세포와 연결되는 사이엔 신경접합부 즉 시냎스Synapse가 있어 앞의 흥분성을 다음 신경세포로 넘길 것인가 여부와 강도가 조정되는 마디마디로 이어진다. 뇌 안의 시냎스는 자그마치 100조가 넘는다. 엄청난 회로가 있다는 의미 그 활동성이 얼마나 어마어마할까? 당연히 맨입으로 운행될 리 없다. 몸의 불과 2%밖에 안 되는 뇌가 우리 몸이 필요로 하는 칼로리의 20%를 소모하는 이유다.
뇌에 대한 관심의 초점은 바로 신경세포와 시냎스다. 전기적 뇌와 화학적 뇌라는 표현이 나오게 되는 근거는 그 흥분성이 전기적 현상과 신경전달물질Neuro-Transmitter이라는 화학물질에 의해 진행되기 때문이다. 궁금증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뇌의 특정부위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어떻게 정보를 방출 인식하기에 인간의 언행을 좌우하게 되느냐는 것이다. 기억, 공간개념, 인지, 판단은 물론 쾌감과 고통, 기쁨과 슬픔, 사랑과 증오 등과 같은 감정적 현상들까지 지휘하는 원천적 출발점에 뇌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본다. 거창한 얘기지만 나 스스로가 아는 것이 아니라 역시 과학책을 통해 기억하고 있는 정보다.
인간의 시발은 대충 2백만 년, 생명체의 출현은 38억 년, 생명이 존재하게 될 지구의 나이가 40억년, 그리고 지구라는 존재가 있게 될 빅뱅Big Bang에 의한 우주탄생은 138억 년 전이다. 2014년3월17일 하버드 스미소니언 천체물리센터가 밝힌 ‘중력파의 흔적’이 생중계된 것에 근거하고 있다. 약 138억 년 전 대폭발이후 지금과 같은 우주가 생긴 우주 인플레이션cosmic inflation 이론에 대한 직접적 증거를 최초로 발견했다는 것이다. 대폭발 직후 매우 짧은 순간에 우주가 엄청난 속도로 팽창하면서 지금과 같이 평탄하고 균일한 우주가 형성됐다는 이론을 남극에 설치한 망원경 바이셉2BICEP2라는 관측 장비로 분석한 것이다.
그렇다면 뇌의 발원은 따라서 그때라는 것인가?
앞의 수치들에 대한 개념은 솔직히 나에겐 별 의미가 없다. 상상이 미치지 못하는 탓이다. 논리적으로 뇌라는 존재가 생성된 것이라면 그 발원사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수치들은 뇌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는데 전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너무나 큰 숫자 사이사이에 있었어야 할 현상들을 알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다.
여기서 하나의 실마리를 유추해 낼 수는 있다. 나의 뇌가 창안한 것은 아니다. 생명체의 출현이 38억 년 전, 그때 스스로 복제사본을 만드는 힘을 가진 분자가 처음으로 원시 수프 속에 무질서하게 나타난다. 그들은 매우 자유 분망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들 ‘불멸의 유전자-immortal gene'는 진화과정에서 어딘가 안주해야 할 곳을 찾기에 이른다. 우리의 마음과 몸을 만들어 낸 유전자, 자연선택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우리들을 그들의 은신 복제 진화하는 기계로 이용하기 위함이다. 이 유전자는 비정한 전쟁, 끊임없는 이기적 응용, 그리고 속임수를 통해 결국 유전자 자신만을 유지하려는 목적이 전부였다.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가 된 연유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유명한 저서가 1975년 출간된 바탕이다.
그에 따르면 침팬지와 인간의 유전자는 99.5%를 공유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인간을 포함한 어떤 종(種)도 유전자를 다음세대로 나르는 하나의 기계에 불과한 숙주로 활용했지만 유전자가 근원적으로 선경지명에 의한 것은 아니다. 미래에 대한 어떤 계획도 없다. 다만 유전자로 존재하려는 것뿐이다. 위해서 인간의 몸을 이용했다. 진화는 원래 미래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모든 개체들은 다른 개체보다 생존되는 자손을 보다 많이 남겨 그들이 갖고 있는 번식에 성공적인 유전자들이 다음세대에 많아지게 되어야 하는 이른바 ‘자연선택’을 위해서다. 다윈의 업적을 여기서 강조할 생각은 없다.
뇌Brain에 대한 궁금증이 이제 충분히 해소된 것일까?
천만에, 반대다. 단순히 인간이 유전자를 실어 나르는 로봇과 같은 기계로 안주하게 될까? 존 메이너드 스미드John Maynard Smith는 제안한다. ‘우리의 뇌는 이기적 유전자에 배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정도로까지 진화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거다. 나의 뇌가 궁금하다는 해답에 실마리가 거기에 숨어있음을 비로소 천년 동굴의 한줄기 빛처럼 어스름 쏟아본다. 나의 뇌가 창안해 내려는 자료에 원천적 용암과 같다.
마음, 정신, 그리고 영혼 이들의 존재에 대한 규명이 따라서 뇌에 대한 궁금증을 푸는 열쇄로 변신하게 된다. 분명 뇌는 객관적으로 오관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유기체, 몸의 일부다. 심지어 뇌Brain를 잡아먹는 간(肝)이란 표현까지 나오고 있다. 뇌는 간이 먹여 살린다는 의미다. 간땡이가 부었다는 속어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문제는 마음, 정신, 영혼의 실체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을 포함해 파인만Richard Phillips Feynman은 사람이 만든 허상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양자역학의 대칭성과 보존법칙은 주장한다. 미시세계의 입자파동에 대해 그 운동과 질량을 각각 정확하게 알 수는 있어도 동시적 측정이 불가능하다는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의 불확정성이론을 통해 단정적으로 결론을 짓는다. 정신분석에 학(學)을 프로이드Sigmund Freud 자신이 쓰지 못했던 것은 과학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현대판 무당에 불과하다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입자파동으로 해석되지 않는 어떤 존재도 우주상엔 존재하지 않는다는 양자물리학의 의미가 근거다. 신경-정신분석Neuro-Psychoanalysis으로 인지치료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가 뇌에 기질적 변화를 일으킨다는 연구로 정신의 의미를 에둘러 편입하려 하지만 난처할 뿐이다. 정신은 곧 뇌의 기능의 하나다. 영혼은 호수에 뜬 달을 건지려는 원숭이 짓과 진배없다는 것이다.
궁금증은 갸우뚱 가지에서 가지를 친다.
치매, 뇌경색, 파킨슨병, 뇌염, 간질... 뇌에 병이 생겼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된다. 정신병의 정체는 무엇인가? 정신이 뇌? 뇌 즉 정신이란 의미인가?
국제 진단분류표-11(ICD 11;WHO, 2015년 출간예정)이나 이미 지난 해 늦게 간행된 미국 정신의학회 진단분류표=5(DSM-5;Diagnostic Statistical Manual-5)는 공히 병Disease이라는 이름을 쓰지 못하고 있다. 같은 증상들의 묶음을 통해 장애Disorder로 분류되는 방법론을 택해 한계에 머물러 있다. 신경과학Neural Science에 의한 정신장애와의 인과관계가 하나둘 들어나면서 결국 ‘뇌의 병’이라는 쪽으로 기우는 축을 감당하지 못하기에 이른다. 과연 정신의 정체는?
불안하다. 심란하다. 짜증스럽다. 울화가 치민다. 그야말로 정신이 확 뒤집혀 미치겠다. 정신병이라면 모르겠건만 그게 뇌의 병이라니 도무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다. 과연 맞는 말인가? 정신도 뇌, 영혼도 뇌, 마음도 뇌.. 진짜일까?
손에 만져지지 않는 이런 현상들이 뇌의 어디에서 어떤 신경전달물질에 의해 진행되는 사실이 가시적으로 손에 잡힐 단계로 발전되어 가고는 있다. 음식을 먹는 쾌감, 색스를 통한 황홀감, 중독에 이르는 갈망은 물론 정신분열병에 이르기까지 달무리 같은 현상들이 유전정보와 함께 하나둘 밝혀진다. 뇌의 병이 아니라는 주장은 점진적으로 쇠퇴하고 영혼은 홀로 외롭게 종교적 울타리 안에 고립된 수도사처럼 기도를 한다. 단정해도 좋을까?
조금은 알 듯 하다.
나의 뇌가 궁금하다. 그 의미를 알 것 같아진다는 것이다. 맞고 틀리다는 것과 상관없이 생각했었다.
Mind seems to be not a State, but an "ing" of Homeostatic Host
for such as a running DVD, the series of the chapters,
without interruption, till dying.
So there would be Mind (consciousness, memory, cognition, judgment, behavior, and other brain manifestations) on the Super-Integrated Sequence Vital Energy(SiSVETM) hosting the electrochemical encoding and/or decoding chapters through synaptic processing.(Dr. Chung, Jan. 23, 2004)
진화 그것은 계획도 방향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앞에서 밝힌바 ‘불멸의 유전자’ 즉 ‘이기적 유전자’에 반기를 들 수 있는 메이너드 스미드의 뇌, 인간의 뇌는 본시 그가 밝히고 있는 서로 잘 어울린 유전자들의 세트가 ‘하나의 단위’로서 선택되리라는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ESS; 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이 등장된다. 원래 진화란 미래를 보지 못한다는 점에 착안 모든 개체들은 다른 개체보다 생존하는 자손을 보다 많이 남겨 그들이 갖고 있는 번식에 성공적인 유전자들만 다음세대에 많아지게 하는 이른바 ‘자연선택’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는 사실과 함께 문화적 유전단위 ‘밈’에서 그러하다. 동물의 세계에서 포식자와 피식자의 먹이사슬에서 그 원칙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종의 번식에서 보다 강력한 유전자에 대한 대물림을 위한 짝짓기의 혈투는 우연이 아니다. 인간은 같지 않다고 강조하는 것은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시스템, 문화를 중심으로 한 진화형태가 다를 것이다. 더욱 자기복제라는 유전에서 '집단적으로 안정된 전략‘(Collectively Stable Strategy), 엑설로드Robert Axelrod는 구지 이런 용어를 왜 만들었을까?
노란 물결이 지금 대한민국 전체를 향해 출렁거리고 있다.
‘세월호’가 침몰한 결과 못다 한 꽃들이 죄 없이 세상을 떠나게 된 결과다. 침몰은 물리-사회적 쏠림현상에 의했다. 이제 대한민국은 다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의해 한국 특유의 사회적 인재(人災)에 의한 오염된 격랑과 함께 쏠려갈 것이며 가고 있다.
“아프지만 장은 봐야한다.” 또는 “억장이 무너지지만 할 일은 해야 한다.”
나의 뇌에서 창안된 글귀가 아니다. 그러나 시사되는 바는 매우 크다.
외상후의 울분과 분노로 또 다른 쏠림에 의해 대한민국이 침몰할 것인가 아니면 외상 후 대한민국이 혁신의 재생을 향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우리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개체의 집단유전자로 남게 될 것이다. 바로 ‘밈’이다.
사람보다 문화적 시스템-미국의 경우 독립 200주년에 미국의 정체는 무엇인가를 Time지 표지 글에서 바로 ‘시스템’이라 했다.,을 믿어야 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의 뇌에 대한 궁금증이 풀린 후 뇌의 해당 위치와 기능이 얼마나 냉철하고 현명하게 진화의 본질에 충실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뇌는 뇌에 이미 존재한 것에 대한 것을 육신이라는 오관으로 입력된 정보와의 집합으로 재현되고 있을 것이기에 그렇다.
시스템을 믿고 따를 수 있으려면 감정에 의한 기억의 조각들로 뇌가 운영되는 것이 정지될 때 가능하다. 거기에 정신은 곧 뇌와 같은 기능이 내포된다. 뇌는 그의 출발점으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보를 지니고 있을 수 있다. 그것은 해독decoding할 수 없는 흔적으로 존재할 것이다. 이미 있는 것을 우리는 알아내고 있는 중일지 모른다. 이들을 근거로 몸이 아니라 이타적 배려라는 뇌의 각인(刻印)으로 진화될 때, 가능하게 될 기대를 갖지만 너무 멀고 험난하다. 넘어야할 산과 건너야할 강이건만 오염된 감정에 의한 뇌를 세탁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
내가 그러하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꼭 노란리본을 달아야 되는 모방이 아니라 뇌가 변해야 된다는 것, 나의 뇌가 궁금하다는 출발점이다.
뇌, 분명 아직도 궁금하다.
어떤 선택으로 길들여질 것인지 유전정보에 의한 태초의 내력이 모두 기억의 조각보처럼 남은 흔적에 진화법칙으로 버무려질 수 있는 것만 재생되는 것이 사실(事實)-인지(認知), 그것이 정신으로 불리게 된다는 점, 이의가 없는 건지 그것은 미지수다.
이기적이란 것은 태초의 유전정보가 그러하듯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서 우리만의 이기심을 삭제할 수 있을까? 뇌가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
JF 케네디의 말이 떠오른다.
승자는 문제에서 답을 찾는다.
패자는 답에서 문제만 찾으려 한다.
방경(方鏡)을 향해 침팬지처럼 거기 반사된 사람의 모습을 본다. 그것이 나라는 것, 그러나 뇌가 살아있다는 것은 볼 수 없다. 궁금하다. 방경(方鏡) 뒤를 보고 좌우를 살펴도 거기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방경(方鏡)에 비친 표정, 미소와 슬픔과 울분과 증오를 냉철하게 자세히 보면 그러나 바로 거기 뇌가 보인다. 그런 표정들은 바로 뇌의 표현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방경(方鏡)만 이리보고 저리 뒤집어보다 끝내 집어던진다. 뇌에 대한 궁금증은 풀리지 않는다. 거듭 강조하게 된다.
그게 나다. 그게 우리들이다. 그것이 바로 갈림길에 선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마음씨 착한 아줌마, 향나무 도마 위에 손수 보신탕을 정갈스럽게 찢어주던 그녀로부터 명절 선물로 삼계탕에 온갖 보약을 다 섞은 선물세트를 2개 사기로 했다. 으레 몇 십만 원이려니 필요한 갈비세트보다 낫겠다 싶어 말하자면 계약을 했다. 기절초풍, 심청이 인당수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심봉사 공양미 삼백 섬을 약조한 것처럼 자그마치 선물세트 개당 3천억, 위약금만 생각해도 소름이 인다. 버둥거리지만 부질없는 짓, 때에 눈을 뜨니 천만다행 꿈이었다.
왜였을까? 나의 뇌를 오래 보존해야 할 이유는 없어졌다. 요양원에 있을망정 더 살겠다는 의향자체가 없다. 아무리 이기적이라 하지만 남겨야할 유전정보가 없는 것이다. 다만 그 이기성은 그러나 한 곳으로 쏠리고 있음을 변명할 생각은 전연 없다. 이기적 유전자에 충실한 걸까?
현대차든 벤츠든 잠시 빌려 타는 나의 몸처럼 차에 따라 달라질 뇌는 아니다. ‘리즈lease인생’ 나는 유전자에 의한 기계, 이른바 나의 몸을 결코 장기대여(貸與)할 의향이 없다. 탄천을 매일 숨차게 뛴다. 대여를 위해서가 아니다. 라일락 향에 취해 되돌아서는 예술적 발걸음 역시 아니다. 다만 이기적(利己的) 선의의 관심을 볼록렌즈에 담아 자손에 물려주려는 것만은 기이 넘겨진 유전정보와 함께 본능적으로 준비되어야겠다는 것은 확실하다. 대한민국의 내일을 위한 기대와 희망 속에 결코 숨기고 싶은 이유가 없다는 점과 아주 같다.
“마음씨 좋은 놈이 꼴찌 한다.”
이것은 이기적 유전자의 입장에서 의인화된 표현이다.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에 그 많은 정치, 경제, 수학, 심리학자들처럼 심취될 수밖에 없었던 엑설로드, 그가 “마음씨 좋다”라는 말을 내놓았을 때, 심층학습Deep Learning이 고층건물처럼 가장 높은 뇌의 신(新)피질(皮質) 전두엽으로 모아지는 정보의 총화가 마음으로 표현되는 것과 조금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다. ‘해암 뇌 의학연구소’도 노란 물결이 희망보다 분노의 길을 택하기에 앞서 대한민국의 내일을 위해 다시 한 번 대답해야할 선택으로 넘어간다.
승자는 문제에서 답을 찾는다.
패자는 해답에서 문제만 찾으려 한다.
유전자에겐 없는 어휘의 나열들이다. 어휘는 유전되지 않는다. 따라서 매우 중대한 돌부리에 걸린다. 입자(粒子)로 설명되지 않는 것, 정신 즉 인간의 문화와 예술, 다르게 표현해서 이기적이 아니라 이타적 정신은 없겠는가 하는 기대, ‘밈’이 또 다른 유전의 단위가 될 수 있다는 주장 그것은 설득력이 없는가 하는 것이다.
도킨스는 말하고 있다. ‘밈’이라는 문화적 유전단위는 분명 왓슨-크맄Watson- Crick염색체 DNA 모형도의 짝을 이룬 형태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원시 수프에서처럼 무질서하게 제멋대로 떠있던 초기의 자기복제 분자를 닮았다 할 수 있다. 문화이론과 진화이론에 모순성을 배제해야 할 숙제를 푼다는 전제하에 우리 인간은 유전자의 기계로 만들어졌고 ‘밈’의 기계로서 자라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 바로 위의 글귀배경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뇌는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 그것은 유전자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원론, 누구도 깰 수 없는 점에서 그렇다. 이기성 그것은 절대적이란 점에서 마찬가지다. ‘가족사랑’이 화두로 등장하지만 가족이기주의, 지역이기주의, 파벌이기주의... 이기주의가 해석에 따라 달라지긴 하나 지배적인 것은 확실하다. 변이, 돌연변이에 의해 가능하리라는 기대, 문화적 유전단위는 마치 집단무의식처럼 나의 여생 즉 여백을 어떤 색으로든 물들게 할 것이다. 무슨 색인지 그것은 알 수 없다. 대한민국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이라는 왜곡된 표현을 뇌 의학적으로 해석하는 일에서 말이다. 해답은 소용돌이처럼 멤 돈다. 더는 씹을 수도 없이 빠져버린 늙은 수사자의 이빨, 스스로 무리를 떠나 황야를 향한다. 죽음이다. 나는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 관심은 그것이 아니라 ‘나는 언제까지 살아야 하나?’다. 보이는 것 없고 손에 잡히는 것 없다. 선택은 나의 권리이자 자유, 그래서다.
나는 나의 뇌가 궁금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