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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와 행복 덧글 0 | 조회 17,349 | 2014-06-13 12:25:58
관리자  

대화와 행복

 정 동 철

 쓴 글이 없어 이런 글을 올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안전 안전하지만 붠가 변하는 것이 있어야 하근할 것이다.

7년 전의 현실이나 지금의 주변이 변한 것은 없다. 사람 사는 것이 그럴 수 있다.

문제는 힘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린다는 사람들의 일부 인생들은 말로는 대화지만 사실 대화는 아예 없다.

그렇게 사라왔고 살 것이다.

더 옛날의 글도 비슷한 것은 수도 없다. 날 중심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글이 그렇다.

우정 비교차원에서 올리게 됐다는 점을 밝힌다.

 

 

 

빵과 권력만으론 살 수 없잖아요? 지쳤어요. 정말 지쳤습니다.”

세상을 호령하던 검사, 이어 고액 수임료로 풍요롭던 정치가는 평생 호통과 명령을 대화라 여기며 살았기에 대꾸 자체가 용납되지 않는 삶에서 이제 남편의 성질을 더는 견딜 수 없다며 떠나겠다는 여인의 호소다.

자식들이요? 모두 잘 됐죠. 성공했다고 합디다. 성격이 애비를 닮아 괴팍해 온전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아들들이 없어요. 부자간(父子間)의 얘기라는 것은 피 터지는 전쟁과 같습니다. 조선말기 대원군처럼 호통뿐, 결국 저까지 갈라서게 되네요.”

 

많은 사람들이, 특히 가정에서 대화는 절대적이라고 한다. 부부는 물론 자녀와의 대화, 그러나 막상 밥상머리의 대화라는 것이 대부분 그 유효기간은 밥상에서 뿐이다. 뿐인가 일방적 훈시라 썰렁한 식탁은 뿔뿔이 제방으로 흩어지고 막상 이야기는 TV와 간접대화나 컴퓨터와 단둘이 진행된다. 한 지붕 모두 남남이다.

툭하면 싸우고, 척하면 가출에다 욱하면 한바탕 싸움이다. 아예 자폐증이나 우울증으로 벙어리가 되기 일쑤다. 허구한 날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 정치인들의 대화방식으로 흠뻑 오염된 터라 특별히 증거를 델 것도 없다.

 

지붕이라는 단어가 나와서 얘긴데 한 지붕 아파트엔 30가구 이상이 살고 있다. 벽하나 사이, 엘리베이터로 오르내리지만 옆집 시신(屍身)이 보름이 지나도 모를 만큼 대화라는 단어는 사라진지 오래다. 거듭 강조하지만 나라의 높은 분들이 대화를 한다면서 훈시에다 괴변을 늘어놓고 대화를 자찬하는 형국이기에 그런 현상이 이상할 것도 없는 처지다. 대화와 행복이라는 어휘가 영 어울리지 않을 따름이다. 행복이라는 것이 눈먼 올빼미 같다.

 

직장인들 예외일수가 있겠나? 윗사람들은 젊은 친구들 버릇없다고 혀를 차고 아랫사람들은 선상(線上)의 폭은 네 것이라며 침묵으로 일관하다 치켜뜬다. 미팅이라고 열정을 쏟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관계로 떠들지만 역시 주장일 뿐 듣겠다는 사람은 없다.

프리츠 파펜하임이 쓴 <현대인의 소외>라는 책을 보면 지갑 속의 플라스틱 사회적 관계는 수없이 많지만 로봇처럼 기계적 컴퓨터문자뿐이라 인간적 정()이라곤 어디에도 기대앉을 자리가 없다한다. 대화는 고사하고 소외감 이외 느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현대인이라는 얘기다. 기왕의 얘기라 증거 하나만 더 데겠다. 독방에 가두어두면 환청과 환시로 정신병이 된다. 오관을 차단하면 길어봤자 3일이다. 우주공간을 날아갈 우주인 테스트를 위해 시험하면서 확인한 것이다. 중죄를 지면 독방에 가둔다는 것은 특대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래서 기를 쓴다. PC를 통한 네트워킹으로 싸이질이든 채팅이든 뎃글이든 무슨 동호회라는 것을 통해 대화를 한답시고 요란하지만 것도 여전히 모니터와의 관계일 뿐이다. 대등한 양방향 대화가 아니라는 뜻이다.

소외감이라는 이질적 왕따 같은 느낌을 갖는 사람은 더러 인간적 구석이 남아있는 사람일수도 있다. 매트릭스처럼 도()가 튼 것도 아닌데 모두가 박사들이라, 누가 인정한 것도 아닌데 뭣이 꼬였다하면 광란의 살인적 영화가 인간세를 대신한다. 가령 사회적 왕따가 그것이다. 미국 버지니아 텍에서 벌어진 조승현씨가 그 예일 것이다.

드라마에 미치게 된 세상이 아마도 그런 연유일 것이다.

 

당연히 결과는 불안하다. 초조하고 심란하다.

그것도 탈레반의 끔찍한 공황(恐慌)과 같아 당장 엎어져 죽을 것처럼 질리기 십상이다. 아니면 철학자라도 된 양 살아야 할 가치가 없다며 우울증이라는 울타리를 치고 옥상옥의 묘한 카프카의 성()을 만든다.

도회지든 농어촌은 물론 전기가 흐르는 곳이면 사방에 밤마다 빨간 십자가(교회)가 수도 없이 널려있지만 열린 문은 어디도 없다. 광적 기복신앙만이 판을 치는 바람에 말이 대화지 이해관계로 거의 미칠 지경이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드라마마다 넘치고 책방마다 가득하지만 막상 찰나적 오르가슴과 같은 희열이상 진득한 아랫목의 따스한 행복은 현대판 사전 어디에도 없다.

 

왜일까?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대화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몸짓으로 하는 대화는 도처에 널려있다. 이른바 비언어적(非言語的) 정보소통이라는 대화, 그것은 보도 불록의 벽돌처럼 넘치도록 가라칠 지경이다. 통신언어를 몰라 대화가 안 된다는 것은 순전히 변명이다. 도시나 농어촌 어디나 몸으로 하는 말은 투박하고 감정이 꼬여있어 서툴기는 하지만 놀랍게도 매우 익숙하게 염병처럼 번져있다. 마치 현대인의 수능 모범답안의 대화기법처럼 말이다. 핏대가 그것이다. 문제는 거기다 인간의 감정이 전화선같이 꼬여있어 전달과정에 배달사고가 생기는 바람에 주소가 엇갈려 대등한 대화가 존재하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가령 윙크를 하면 사랑이라 덥석 껴안아 성폭력이 되고, 아니면 왜 야리냐고 시비다. 학습된 비언어적 대화의 독해력이 표현과 더불어 난마처럼 암호화되어 통역이 필수라는 얘기다. 이른바 언어적 감정소통이라는 대화보다 생략된 몸짓언어가 대화의 길을 막아놓고 있다는 뜻이다. 우선 질러보고 볼 일이라는 것이다.

몸의 제스처나 사인은 오해와 망상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의 욕구만을 관철해야겠다는 것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싸우다 칼질이나 끔찍한 흉기가 난무하는 사태의 근본이다.

대화라는 것은 결국 간단치 않다는 얘기다. 뒤집어 말하면 자신만의 욕심만 버리고 진솔하게 말하고 진지하게 듣기만 하면 행복이라는 의미는 절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뿐인가 그럴수록 행복은 커지기 마련이다.

 

한국인의 자살률이 세계적이다.

공산치하의 헝가리를 여권도 없이 백지장에 입국허가증을 받고 여행한 적이 있었다. 당시 자살률 세계 1위의 헝가리, 왜일까 따져보니 20년이라는 시차를 제외하고는 결국 같은 구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고독하고 불행했다는 얘기다.

사람은 있어도 속내를 터놓고 얘기할 상대가 없다. 사방 바다는 없고 구릉지의 평원이 헝가리다. 시키는 대로 9시에서 6, 도시나 농촌이나 한결같은 공산주의엔 평등하게 잘 산다는 표어뿐 노력의 대가라는 차별이 없다. 만나는 것도, 보이는 것도 천편일률적으로 변화가 없는 평등, 숨통이 막히니 술에 의한 환각으로 변화를 만들어 순간을 넘기지만 결국 그 후유증은 자살이다. 수다스런 변화가 없는 곳은 죽음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예의 여인도 그러했지만 숨통이 막혀 질시사직전의 사람들이 널려있다는 것은 지금 우리들 대한민국의 사회적 현상이다. 고작 소리부터 질러보는 것이 전부다.

대화라는 것은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듣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거기 타협이라는 묘미가 한바탕 깔깔거리는 안주거리가 있을 때 사람냄새와 함께 살맛이 난다. 하지만 민주화운동의 인권과 평등이라는 구호만 뒤덮여 껄껄거릴 일이 사방천지 어디에도 여백이 없고 보니. 그나마 말 같은 얘기라면 그래도 견딜만하지만 코드가 엇나갔다하면 진흙탕에 코를 박아야하는 형국이라 아예 입을 봉해버린다. 대화는 고사하고 속만 부글거리니 결과는 병이다. 모두가 산송장들인 것이다. 할말이 혀끝에 올라서지만 입을 차마 벌리지 못하니 질식 그 자체다.

나라도, 기관도, 기업도, 학교도, 교회도, 결국 집까지도 같은 꼴이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조지오웰의 대형처럼 쇼를 하는 사람 이외엔 그나마 말초적 희열뿐 어디에도 비슷한 것은 없다는 결론이다.

 

칠순에 조금 철이 들어 아들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꼭 환자만을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이런 마음을 생각해보며 살려고 하지. ‘힘드시죠? 얼마나 어렵습니까? 어떻게 함께 해 드릴까요?’라는 식의 마음 말이야. 그러고 보니 거울에 내 모습이 아주 동안처럼 밝아 보이더라고. 하여간 내가 숨쉴 수 있는 방법이라고 판단한 것이지..... 얼마나 갈지는 모르지만..........”

 

정신과환자는 불행하다. 모든 정신과환자는 원하는 대화를 잃은 사람들이다. 그것은 형세판단이 언제나 자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거나 반대로 눈치만 봐야하기 때문이다. 자기만이 옳고 자신만이 모자라다는 것이다. 당연히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듣고 싶지도 않다. 세상에 자신만 있거나 반대로 아예 없다. 모든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직장이나 학교에 갔을 때 오리엔테이션을 받는다. 이곳은 뭘 하는 곳이고, 저 사람은 무얼 하는 사람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막상 자신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생각 자체가 없기 일쑤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이 가짜로 포장되어있음에도 진실이라 믿는 결과가 된다. 자신을 왕으로 착각하는 사람에겐 정체성이 없고 그런 사람은 타인의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듣기보단 역정만 낸다. 자신의 주장만이 지상최선이라 믿는 망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스스로 바보로 보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피해망상이라는 표현이 다를 뿐이다. 행복이라는 의미가 여보게 나 여기 있네!’하고 툭툭 치며 함께 할 리가 없다.

 

널널하게 웃으며 듣고 말하면서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는지 준비된 신뢰가 없고선 대화에 의한 행복이라는 그림은 말짱 허튼 짓이다. 느낀다는 것은 먼 나라 얘기일 것이다. (2007.8.2. 한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