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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네 덕에 산다. 덧글 0 | 조회 17,489 | 2014-06-25 21:06:54
관리자  

 

고통, 네 덕에 산다.

2014.06.25.

정 동 철

 

일종의 전쟁을 연상시킨다. 순수한 이념보다 이념을 빌미로 기왕에 취득한 기득권 인사들이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이해관계로 팩트-fact, 그 자체를 그들의 막강한 힘의 구름으로 가려 국민의 눈을 어지럽게 하고 있다. 엄청난 비극이다. 한국의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 청문회를 통한 사실을 근거로 한 심판을 받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 강조하고 또 하고 싶다. 청문회다운 청문회,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언제나 팩트, fact, 사실 그 자체를 근거로 해야 함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후회하면 그땐 이미 망한 뒤일 가능성이 클 것이라 생각된다. -2014.06.21. Facebook.

 

애도의 감정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그렇게 뼈저리게 듣던 ‘6.25전쟁에 관한 어떤 글귀도 내가 보는 신문은 물론 이른바 SNS로 죽고 못 사는 그곳에서도 그런 개념 자체가 살아졌다.

나는 문창국씨 지지자가 아니다. 지지에 앞서 그를 전연 모른다. 최근 국무총리로 지명되면서 그의 교회 강연을 듣고 본 것이 전부다. 그래서 좀처럼 쓰지 않는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고, 행여나 했지만 결국 자진 사퇴의 길을 선택했다.

울컥 애도 감정이 몰아친다. 왜지? 알면 찬성하고, 모르면 반대한다는 것, 틀린 말이다. 찬성이든 반대든 알고 나서야 결정하는 것이 원칙, 그 원칙이 무너진 까닭일 것이다.

 

정신병동의 노래라는 나의 컴퓨터 저장항목에 글 하나를 다시 불러 읽으면서 쓰디쓴 혓바늘을 다독이려 수필이란 형식을 선택한다.

오랫동안 정신병동에서 주(週)마다 해 온 이른바 인성교육이란 것들, 언젠가는 책으로 엮을 마음을 가지고 있으나 그때 책 제목이 정신병동의 노래로 남을지 그것은 정해진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에게 했던 강연(교육), 다시 고통 덕에 내가 버티게 되리라는 마음을 다지며 2년 전 전했던 내용을 음미하면서 답지 않게 대한민국을 생각해 본다. 늙은 보수 꼴통이............

 

정확하게 2년 전의 연설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그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녹화로 남기진 못했지만 미리 준비된 일종의 원고다. 실제 아래 글을 보면서 입원환자들에게 강연을 하지는 않았다. 전국을 돌며 그 많은 강연에서 원고지를 보며 연설한 적은 한 번도 없는 습성이기에 그러나 별반 차이는 나지 않을 것이다.

 

준비됐던 글은 이랬다.

 

 

 

처절한 고통의 전환점

2012.06.25.

정 동 철

환갑을 넘은 6.25,,

1950, 62년 전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랴, 영국 어떤 언론의 조롱을 받던 대한민국, 토요일 세계 7번째, 전후 첫 번째 ‘20-50회원국이 되었다.

무엇을 뜻하는가?

삼일 후, 62년 전 628일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바로 거기에 갑작스런 고요로 15살 어린 호기심은 신작로를 기웃거렸다.

쥐 죽은 듯 별안간 남영동쪽에서 탱크가 괴물처럼 다가왔다. 순간이다. 줄행랑 집으로 뛰어들었다. 뒤미처 따따따 솜이불 속에서 따발총인지 뭔지 콩 볶는 총소리에 질려 있었다. 다시 고요 그리고 바로 요란한 환호소리. 재차 신작로 뛰어나왔을 때, 대체 이게 웬일인가?

김일성장군만세! 만만세!”

붉은 깃발이 뒤덮었다. 어디서 나온 것일까,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만일 바로지금, 같은 일이 오늘 벌어진다면 필경 거리는 더욱 붉은 깃발로 요란할 것이다. 좌파가 공공연하게 국회에 들어가 종북보단 종미가 문제라 외치는 형편이니까...

어린 15살 나는 그때 벽과 전봇대에 낙서하는 버릇이 생겼다.

- 대한민국 만세 -

이것은 겁 없이 당시 내가 쓰고 다닌 낙서였다. 마치 86년 공산권을 백지장 도장하나로 돌며 본 낙서, “나는 공산주의를 증오 한다처럼.

 

모진 고생,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 죽은 고사하고 상추가 아니라 명아주 풀로 연명 뒷간만 뻔질나게 가는 형편인데.., 것도 모자라 힘겨운 엄동설한 1.4후퇴가 시작됐다. 눈 바닥에 자다 깨다 이른 곳 유구 마곡사, 더 비참했던 것은 귀경 길이었다. 아산 어떤 초등학교에 수용, 염병(장질부사)이 돌자 매일 송장이 실려 나가는 틈에 용케도 살아 고등리(서울공항)에서 결국 나 또한 염병으로 죽다 살아야했다. 고생이 뭔지 그러나 철부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부산으로 가는 행운. 내가 실감한 고생은 그때였다.

부산 행 군용열차 뚜껑 없는 화물칸, 나는 너무 무섭고 추었다. 홀로 밤이면 미군의 랜턴으로 걸릴 듯 4월의 보슬비를 맞으며 덫에 갇힌 생쥐처럼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기약 없는 정차시간 드디어 도착한 부산 3일 만이다. 3년이지 싶었다. 부들부들 움츠러든 불안과 공포의 연속 바로 그것이었다.

나의 운명은 그러나 그 공포와 어머니와의 이별이란 쓰라린 고통으로 확 바뀌었다.

초량 산비탈 천막교실 맨땅계단학교에서 공포와 추위의 쥐새끼가 공부로 돌아선 것이다.

낙제직전의 노라리 2학년 초, ‘will’‘well’을 구분하지 못했던 나는 일약 시험답안지 5장을 쓰며 기다리는 친구에게 주고 또 주는 실력으로 성장했다. 피난살이 부산이기에 가능했던 것, 깡그리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이 야마엔 귀 먹이처럼 그랬다. 드디어 환도, 잿더미가 된 서울에서 결국 7.4:1이란 서울대학교 의예과에 합격했다.

공포, 굶주림, 이별, 잔인한 고통.... 그것이 아니었으면 아니 그때 함께 놀 친구가 있었다면 현재의 나는 고등학교 동창생 대부분의 현주소처럼 처량한 늙은이, 외면당하는 노인이 되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주정뱅이에다 빌어먹어야하는 노숙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 당시 나는 부둣가에 나가 힘겨운 하역대가로 살지 않아도 되는 덕분에 그 잔인했던 고통이 수학책으로 이어지면서 스스로 나의 운명을 바꿔가기에 이르렀다. 아픔, 고통 그것이 없었다면 현재의 나는 여기 여러분 앞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고통 네 덕에 산다, 불안 네 덕에 산다는 것은 사치스런 얘기가 아니다. 도처에 있는 비슷한 글귀, 불안과 고통 그 자체가 삶의 덕이 아니라 거기서 나의 미래를 볼 수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거기 전환점엔 결국 남달리 훨씬 큰 고통, 불안, 수모, 좌절감, 폐허를 딛고 일어난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대한민국의 역사 바로 그대로일지 모른다.

 

실망하거나 포기할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막연한 다짐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모진 고통, 남다른 수모, 분노를 삭이는 인내와 탓하지 않고 피땀의 일념과 노력 없인 의미가 없다.

언더우드의 기도,

-조선사삼의 의심과 화,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사람에게 그 고통을 일깨워주려는 것에 탓만 하는 조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

, 노름, 마약, 의심 병과 막 무간 성질, 그것은 결코 나 잘났다는 허황된 망상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전환점은 없을 것이며 재입원만 반복될 것이다. 여러분의 얘기다.

 

알베르트 카뮈가 작가가 된 계기는 이렇다. 앙드레드 리쇼 작품 고통’ (1931)-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 1차 대전에서 남편을 잃은 여인 테레즈는 성적욕망(/도박/비난//남 탓)을 아들에 쏟다 한 남자를 만나 육체적 욕망이 쾌감으로 바뀌면서 아들은 벌여지고, 이어 쾌락의 한계는 남자가 떠남으로 드디어 아들과 자신의 모든 것을 읽게 되는 고통, 즉 욕망의 어긋남에서 시작된 고통-술과 도박 그리고 의심과 분노가 그러 하 듯,을 읽어 깨닫게 됨에 의한 것처럼 여러분, 여기 입원된 상황에서 그 고통을 계기로 삼지 못하면 기회는 다시없을 것이다. 탓하고, 분을 삼키지 못해 한을 품거나 날라리 허송세월 되풀이 한다면, 다행히 여기 맨토가 있다는 사실은 잠시나 잊지 말고 아로새길 일이다.

 

6.25전쟁의 처절한 고통(생사)를 극복하는 한국인, 지금 20-50회원국, 2차 대전 후 처음으로 가입된 유일의 나라, 거기엔 고통을 전환점으로 이겨낸 인내와 절박한 생존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 남의 일이 결코 아니길 바라고 또 바란다.

 

 

 

원칙을 이겨내지 못하는 한국사회, 진실을 조롱하는 풍토에서 너와 나 모두는 지켜야 할 법 앞에서 철저하게 그것을 무시한다. 그러나 너만은 지켜야한다고 삿대질을 서슴치 않는 사람이 웃 보이는 사회, 그래도 벗어날까 갖는 희망이 무너지는 사회를 몸으로 느끼며 말 못하고 그것도 숨어 애도하는 나의 현실, 자신이 너무 비참함을 감당하지 못해 하늘을 바라본다.

 

해마다 받는 일지노트 첫 장에 써두는 두 가지 글귀가 있다.

더도 덜도 나만 하여라!

악한 자 잘 된 것 원망하고 탓하지 마라. 오로지 나의 일에 당당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리라!

잘났다는 뜻이 아니다. 생긴 대로 거기에 충실하면 되리라 다지지만 과연 그럴만한 위인이 되겠느냐는 의문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 누군가의 시,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며 피는 꽃 어디 있으며,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꼿  어데에 있으랴..... 그래서 한가닥 고통 네 덕에 살 수 있음에 눈을 떠  이젠 먼 산만 바라본다.     2014.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