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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저녁의 압축파일 덧글 0 | 조회 15,502 | 2009-04-17 00:00:00
정동철  


토요일 저녁의 압축파일

“갑시다”
“오늘은 집에서 하면 안 되요?”
“나가자 구…”
“꼭 가야 되요?”
“그러자니 까….”
오늘은 금요일이 아니다.

“대신 오늘 안주는 다른 것으로 합시다”
“그래요, 그럼. 나야 좋지만, 당신 그렇게 때워도 될는지… 그게 걸리네요…”
어찌저찌 하다가 우린 금요일을 호프집에 가는 날로 정했다.
오래 전, 몇 년은 되었지 싶은 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날 우리는 촌스럽고 텁텁한 생맥주 집에 앉았다. 프라이드 치킨 반 마리를 시켜놓고 생맥주를 부딪쳤다. 엄청 시원했다. 일상의 그렇고 그런 얘기들을 나누면서 작지만 새로운 시간을 즐기게 된 것이 발단이었다. 기름을 부은 것은 값이 아주 쌌다는 점이다.
한 주일은 언제나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살아가는 모양들을 주거니 받거니 사이사이에 빨간 얘기로 웃어대다 누군가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이리 씹고 저리 뜯으며 적어도 우리만은 멋지게 산다고 반증을 얻어내려 했다. 기차게 시원하고 쌉쌀한 맥주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갈 때 묘한 쾌감이 감도는 맛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부부간의 친밀한 유대감, 말하자면 궁합이 딱 들어맞는 이유가 마치 누군가를 씹어대며 깔깔거릴 수 있는 것이 정설인지를 시험하고 있는 피험자 같았다. 의도적으로 그러자고 맞장구를 친 것은 아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우아하게 배려하는 그런 마음을 자랑하며 서로 떠벌리고 있었다. 곰곰 따지고 보면 그런 것이 아니었나 싶었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주 5일제와 전연 상관없는 나는 어제 못한 예의 여유를 느끼고 싶었다. 3시간 강의를 위해 거의 책 한 권에 해당한 함축된 내용을 파워포인트에 담아 이동디스켓에 저장하고 난 후 이어 학생대표에게 보내자 한 숨 쉬어야겠다는 심사가 몰려왔다. 그 숫한 대중강연과 대학원 강의의 차이는 상식 그대로 장난이 아니었기에 풀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한잔 들이킬 만큼 깔끔하고 후련했기에 나섰다.
예의 호프집을 향해 반대방향으로 돌아 나섰다. 아내의 의견이다. 왜 이리로 오냐고 의문을 제기하다 바로 아내의 뜻을 알아차렸다. 미장원에 들려 머리를 10분 정도 다듬고 호프집으로 오겠다는 작전이 있었다.
‘여자들의 머리라니….. 압구정동에선 몇 십만원도 한다니 어이가 없지만 하여간 돈 잡아먹는 하마군… 아내가 그렇지 않아 다행이지만….’
아내는 지난 주에 한 것이 엉망이라 <원장>의 사과를 받아내어 무료로 하게 되어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아깝지 않나 여겼다. 대머리가 된지 오래라 이발소에 간 기억이 거의 사라진 지 오래다. 이해가 잘 가려 하지 않았다.
<헤어 케어>로 들어가면서 먼저 호프집에 가라고 했다. 마시며 기다리라는 것이 아내의 얘기였다.
흘깃 본 것이 죄였다. 통 유리 창 넘어 활기찬 움직임이 나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아내는 종종 말했다. 쉽고 가까운 길을 두고 힘겹게 먼 길로 돌아가는 것이 나의 특징이자 그것을 만끽하는 남자, 그 얘기가 귓가에 맴돌았다. 검은 복장의 여인들이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흥미가 발동한 것이다. 네거리 번잡한 찻길 난간에 본격적으로 기대어 관찰을 결심했다.
미용실 안은 초저녁의 거리보다 LCD화면처럼 아주 환했다. 아내가 <원장>과 뭔가 한 참 얘기를 나누다 자리에 앉았다. 어떤 여자는 비닐 봉지로 머리를 뒤집어 쓰고 헬리콥터 날개 같은 것이 빙글빙글 도는 아래에 앉아 수다를 떨며 간들어지게 웃고 있었다. 재미있었다. 윈도에 빨간 점자 네온이 윈 쪽에서 오른 편으로, 다시 가운데서 옆으로 갈라지다간 모아지면서 무슨 <펌>이라는 것들을 남기곤 바뀌었다.
웬 젊은 남자가 미용실로 들어갔다. 나의 눈은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갔다. 신문을 뒤적거렸다. 차례가 됐는지 자리에 앉자 미용사와 웃음이 오갔다. 미용사는 쌍권총의 사나이처럼 허리에 가위며, 빗, 그리고 뭔가를 잔뜩 차고는 물뿌리개로 머리를 휙휙 다듬었다. 여자의 손놀림과 남자의 흐뭇한 얼굴, 거기 아내는 원장과 뭔 얘기인지 신이 났다. 연신 웃으며 이어 원장의 가위질도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맥주 집으로 가서 우두커니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잘 했다고 여겼다. 계속 윈도에선 선전문구가 어지럽게 이동했다. 자동차소리는 요란하고 거기 자전거를 도로 난간에 열쇠로 잠그고 학원으로 올라가는 학생인지 배달 꾼인지를 보다 문득 <원장>이라는 단어가 머리 속에 꽂히자 TV에서 곳잘 하는 연상게임으로 빠져들어갔다.
미용원 원장, 학원 원장, 의원 원장, 그러자 이내 연상이 끊겼다. 주변의 어지럽게 걸려있는 간판을 보았다. 고시원이 보였다. 고시원 원장, 조산원 원장, 법원 원장, 국정원 원장, 그러자 또 막혔다. 간판을 봐도 <원>자로 끝나는 것이 없었다. 갑자기 바둑알이 그려진 곳에 기원이 있었다. 기원 원장, 동물원 원장, 식물원 원장, 금감원 원장, 유치원 원장… 그러나 또 막혔다. 머리를 짜기 시작했다.
<원장>으로 들락거리다가 제일 힘이 센 <원장>이 누구일까 생각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국정원 원장? 감사원 원장? 법원 원장? 그러나 결국 클레오페트라 처럼 씨자를 움직인 당대의 미녀, 그녀의 코가 조금만 컸어도 세계사가 바뀔 것이었다고 하니 <헤어 샆>의 <미용원 원장>이 제일 강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제아무리 권세가 하늘을 찌른다 해도 결국 <헤어 케어> 앞에선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미용사의 손에 좌우되는 신세니까. 그들은 돈도 잘 벌고 있다. 나 같은 의원 원장쯤은 아예 축에 낀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어떤 점에서든 쨉이 안 되니 말이다. 한참을 그렇게 들어다 보았다.
어찌나 역동적인지 신기했다. 모두가 웃는 얼굴, 부러웠다.
‘하필 나는 고작 의원 원장이 되었을까?’
생각이 한참 헤맬 때 빨간 네온 글씨는 계속 쉬지 않았다. 시선이 머물었다.
<예약제 실시, 성인 컷, 학생 컷 전문점>,… 셋팅 펌, 볼륨 펌, 메직스트레이트, 아이롱 펌, 크리닉 펌,… 연중무휴, 짧은 머리에 긴 머리 부쳐줌, 남성 컷, 학생 컷, ….. 비듬모크리닉, 탈모크리닉, 손상모크리닉,….뭐가 뭔지 알 길이 없었다.
‘세상에 웬 메뉴가 이리도 많은가!’
그 때 아내가 일어서는 것을 보았다. 남자는 안경을 벗고 연신 입이 귓가에 걸려있었다.
아내가 깜짝 놀라며 너무 시간을 많이 쓴 것을 미안해 했다. 거기 기다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동네 호프집으로 갑시다”
아내는 선뜻 동의했다. 깔끔하고 분위기가 제법 괜찮은 집을 비켜 단지내의 허술하기 그지없는 집으로 갔다.(금요일의 원조 호프집에서 갈아탄 후의 얘기다.)
조금은 살이 찐 아줌마가 환하게 반겼다. 냉방기를 피해 구석에 앉아 오뎅을 시켰다. 코디라곤 아에 반기를 든 듯 어울리지도 않는 무슨 빠 같은 칸막이 의자에 앉아 있노라니 음악이 들리고 이어 담배 냄새가 몰려왔다. 정장을 한 지긋한 신사가 어떤 여자와 마주보고 담배를 피고 있었다. 들으라고 병원이 있는 우리 빌딩은 전체가 금연구역이라고 소리를 높였다.
아내와 나는 500cc 잔을 치켜세우며 눈 도장을 찍었다. 담뱃불이 없어졌다.
뽕짝이 계속 울리고 나는 맥주잔을 거프 비웠다.
기분이 째지게 시원했다.
토요일의 오후, 디지털 카메라에 찍혀진 사진처럼 머리 속에 압축파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오늘만 같아라!’ (20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