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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와 내려보니 결국 그 자리 덧글 0 | 조회 15,158 | 2009-04-17 00:00:00
정동철  


올라와 내려보니 결국 그 자리


호수를 내려다보며 한동안 서있었다.
서산에 걸려있는 햇살이 호수 한 가운데를 비늘처럼 반짝이고 있다. 완연한 가을의 솔잎 내음이 거기에 물감처럼 배어들었다. 조금은 눈이 부셨다. 울긋불긋 호수는 점차 晩秋의 수채화가 조용히, 그러나 더욱 짙고 화려하게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며 거기에 내려앉을 참이다.
토요일 늦은 오후, 가을의 앞자락에 나는 이 호수 가에 왜 서 있어야 하는지 생각했다. 호수의 내력을 대충 알고 있다 해서인가? 하지만 한번씩 밀려오는 한기로 옷깃을 여미면서 까지 서 있어야 했던 이유는 그것이 아니다. 올림픽 화살이 과녁에 꽃이듯 <뒷모습>이라는 단어가 뇌리에 확실한 진동으로 신호음이 멎지 않았던 탓이다.

병원에 앉아 작정을 하고 상념에 젖어있었다. 내일 10월 15일은 법적으로 지하철 무료탑승이 시작되는 날이다. 왼지 그냥 넘어가기엔 빈 자라가 너무 큰 미묘한 언덕, 그대로 지나치기엔 마치 바보스럽다는 생각 때문이었던가, 하여간 꽤 오래 밀납 인형처럼 앉아있었다. 때에 불현듯 그 <뒷모습>이라 불리는 화살이 펄럭이는 태극기로 변해 일렁거리는 숨소리로 다가왔다. 지난 연말 어느 날, 海利가 건네준 몇 편의 글 중 <뒷모습>이란 것이 접속된 것이다. 이곳 호수를 향해 서울을 빠져 나오게 된 연유다. 물론 이 호수가 정말 뒷모습의 실체를 찾아내 줄 수 있으리라 믿어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과거를 일시나마 막아 빙글빙글 돌다간 결국 아쉬워 아쉬워 버텨 보지만 뚝 한 켠 낮은 턱을 넘어갈 수밖에 없는 그 물줄기엔 삶의 공통분모가 여울지고 있으리라는 생각만은 했었지 싶다.

며느리가 준 <뒷모습>은 사전 속의 단어가 아니었다.

그간 긴 6년을 마치고, 아니 7년(필자 주:예과 후 방위 6개월로 1년 휴학)의 준비 끝에 시험장에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저 남자를 내가 평생 사랑하고 보호해 주리라는 각오를 한 적이 있다. 그 이후로도 가끔 힘들고 지겨울 때면 그 날 춥고도 싸늘했던 날씨와 움츠린 그의 어깨를 생각하며 이상하지만 삶의 기운을 얻곤 한다.
결혼 후 친정을 다녀올 때마다 자동차에 반찬거리며 먹을 것들을 정신없이 챙겨주신 후 돌아서는 친정엄마의 뒷모습을 보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저려오며 가슴속에 울렁거리는 뭔가를 삼키게 된다.
TV화면 속에 빠져있는 나의 딸의 뒷모습을 보면 신혼여행지로 출발하는 차의 짙게 썬팅 된 창문으로 겨우 볼 수 있는 신랑신부의 뒷통수가 떠오른다. 도무지 엄마의 존재를 염두 해 두지 않은 무심하기만 한 뒷모습이다. 결국 그녀를 인간으로서 독립시켜보내기 위한 과정 속에 내가 존재함을 느끼는 순간이다.
며칠 전 손녀를 보기 위해 점심시간을 이용해 잠시 오셨다가 가끔 손을 흔들며 멀어 저가는 나의 시아버님의 뒷모습을 보며 새로운 에너지를 얻게 되었다. 나는 아버님의 앞모습보다 뒤에서 느낄 수 있는 실루엣을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상당히 구체적으로 뒷모습을 바라다보곤 한다. 당신의 곧은 다리와 내 남편의 흰 다리를 비교해 보기도 하고 걸음을 옮길 때 가볍게 흔들리는 손을 살짝 잡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싱겁게 웃어본다. 65세 치곤 의도적이다 싶게 곧게 펴진 자세와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과의 관계여부를 따져 보는 것도 재밌다. 당신의 곧은 생활 속에 의도적인 부분이 상당히 많이 깔려있기 때문에 늘 방심할 수 없고 내 남편이 숨막혀 하는 부분이기도하다. 그래서인지 남편이 심하게 구부정하게 걷는 건 일종의 반항인가 보다.
손녀와 춤을 추는 당신의 뒷모습은 문득 나를 슬프게 한다. 가장 행복한 시간, 그 아름다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 만큼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금으로선 그분의 뒷자태가 흐트러지는 건 상상이 되지 않는다. 결혼 초 내 남편을 비롯한 시댁 식구들이 하찮은 일까지 특정 종교의 교주에게 하듯 당신께 의지하는 게 못마땅했는데 종교의 힘이 그렇듯 지금의 나 역시 당신의 등에 기대고 있고 또 의지하고 싶어진다.
운동경기를 볼 때 다친 부위에 스프레이 파스를 쉬쉬 뿌려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뛰어나가는 선수를 본다. 아버님의 뒷모습이 처지고 지쳐 보일 때면 당신의 등에 쉬익 뿌려주면 힘이 솟고 든든해지는 스프레이를 꼭 구하고 싶다.
스프레이의 원료 중 우리가족이 들어가기를 희망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식구들을 부지런히 재촉하는 일이 나에게 남겨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바로 그날 원초적 힘이 솟았나 보다.

호수는 원래 거기에 없었다. 청계산 동쪽 계곡으로 흘러내려오는 물줄기를 막은 것은 50년쯤 전의 일이다. 6.25 전쟁이 터지기 전 호수가 있어야 할 곳 왼편에 국민학교가 지어질 때 쪽마루가 깔리는 것을 신기하게 여겼던 어린시절, 그 무렵인지 그 후인지 뚝을 쌓아 호수가 만들어졌다. 마치 한 인간이 태어나듯 그렇게 호수가 생긴 것이다. 거기 언제쯤 물이 가득 찰 것인지 그것이 관심사였던 나의 기억 속엔 미군이 주둔하고 나서 변했다. 학교 주변의 천막들 사이로 군데군데 쓰레기 구덩이를 누가 꼭두새벽에 차지하느냐는 것으로 그 날의 운세가 갈라지는 야릇한 시샘과 모험에 쫓기는 경쟁 속에 나의 마음, 나의 호수는 쓰레기로 채워져 가고 있었던 탓이다. 미군의 쓰레기는 돈이었었다. 때의 결정적 일이 일어났다. 그 호수에 젊은 여인이 빠져죽었던 것이다. 누군지 직접 본 일은 없으나 고무신을 나란히 모아놓고 자살을 했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미쳤기 때문이라고 했다. 양갈보의 누명을 벗을 길이 없었던 것이 원인이 였던가 보다. 호수에 대한 관심은 휴전과 함께 그래서 완전히 살아져 갔다.

호수는 그 옛날의 모습이 아니었다. 한데 도대체 나의 뒷모습과 무슨 상관이 있어 여기에 왔을까? 10분 거리에 선산이 있다는 것, 잊혀지지 않는 미친 자살, 인생의 화두 두 가지가 사랑과 성공이라 하지만 돈과 섹스로 가공된 허구에 지나지 않는 참이 오염된 죽음이 되어 그곳으로 갈 날이 보다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잠복해 있었던 까닭이 아닐까? 나의 고향, 태어났을 뿐 산 것은 불과 10개월간의 짧은 전쟁 때의 기억 뿐이지만 막상 호수를 내려다 보는 마음 속에 묻혀있던 갖가지 생각들이 이미 풍화되어 살아진 모자이크 조각들로 꿰 맞추어 뒷모습을 맞추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쓰레기 같은 것 뿐이었다. 명아주풀 죽, 염병, 어머니의 총상, 내 심벌이 더 크다며 키득거리던 원두막, 콩 살이, 변덕스럽던 어느 미군병사, 폭탄파편에 이글거리던 왼편 팔뚝의 피, 떨고 졸며 정처 없이 메달려 가던 1.4 후퇴 행렬, 그리고 할아버지 산소 앞의 드넓은 들판을 향해 내 것이라 다지던 꿈들, 그러나 깡통처럼 서울 비행장이 여의도의 역사 속에 묻혀버린 것 이외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한데 난데없이 고고학적 파편 하나를 찾아냈다.
호수가 전쟁 속에 완전히 머리를 감춘 그 해 4월, 부산행 뚜껑 없는 미군 화물열차에 실리자 그 후의 운명은 기묘하게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생쥐처럼 사흘 밤 나흘 만에 도착한 부산까지의 무서운 공포와 두려움은 인천 누님 집을 향할 때 마다 갈라지는 영등포 부산행 왕복 철길을 그렇게도 선망했던 꿈이 차디찬 이슬비 속에 잔인하게 으스러져 수동공격성의 이중적 태도가 자리를 잡게 되었음을 어렵사리 낚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였을 것이다. 그저 오르려고만 했다. 놀 때 놀지않고 잘 때 자지않으며 오로지 경마장의 눈 가린 말처럼 앞으로 뛰기만 했다. 높을수록 계곡은 깊고, 넓을수록 물살이 유유함을 미쳐 알지 못했으며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날이면 날마다 종지봉 휴게소에 헐떡거리는 숨을 반가부좌로 비워가는 마음을 채근하는 지금 비로서 알게 된 <앞>, <뒤> 단어의 뜻을 철저하게 몰랐으나 몸이 따라주었던 시절이었기에 그렇게 할 수가 있었을 뿐이다.
더구나 정상으로 가는 길엔 실측 지도가 없다는 사실과, 하산 길에 뒤가 앞이 되었으나 이미 그것은 앞이 아니고 뒤도 아니라는 점이 시간의 흐름을 타고 몰려 오기 시작한 것은 귓가에 잔설이 내리면서 의 일이다. <앞>은 앞으로 움직일 때만이 <앞>이다. <뒤>는 그런 점에서 아에 <앞>의 상대적 표현에 불과할 뿐 수째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올라와 쾌재를 불으며 돌아다 보니, 결국 하늘아래 그 자리 인걸…..

앞도 뒤도 결국 그 자리가 그 자리였다. 그래 봤자 겨우 뒷동산에 올라 중얼대는 넋두리에 불과한 형편에 나의 뒷모습은 꼬리가 길 것도 없다. 다만 그 내용을 내가 알 수 없으니 편하기로 더 할 것이 없을 따름이다. 지금 나는 나의 앞모습도 모르고 있는 판이 아닌가.
새벽 4~5시경 10월의 뒷동산은 캄캄하다. 펜 파이트로 길을 확인하면 내내 불을 끄기가 힘들다. 더 깜깜해 한 발자국을 내 뻗기가 힘든 까닭이다. 거울 없이 내 얼굴 알 길 없는 터에 내 마음의 앞모습을 비추어볼 곳이 마땅치 않으니 괜스레 불을 킬 일이 아니더란 것이다. 더더욱 불빛 있다 해도 없는 인생거울 앞에 앞모습이 보일 리 없으니 말이다.
비늘처럼 찰랑거리던 호수는 가장자리 낚시꾼의 발길을 재촉하고 바람은 좀씩 거셌다간 한숨 쉬는가 하면 다시 썰렁해진다. 운전석에 기어들어 내내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프라하 대통령 집무실 입구 우편에 일단의 노상 현악연주가 귀에 맴돈다. 나의 조국, 스메따나의 은은한 선율이 별나게 키가 작은 그리그의 웅장한 노르웨이 산하를 연상시키는 선율과 함게 하필 이때 밖의 스산한 풍경과는 무관하게 나의 마음을 감싸고 있는 것은 희한한 일이다. 프라하의 봄은 나의 격과는 전연 어울리지 않지만 며느리를 통해 손녀 娜熙 와 址熙로 이어지는 맥박 위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 마음의 소리는 일종의 비약이자 희망일 것이다. 하지만 딱히 알 수는 없었으나 모처럼의 포근한 여분이 입가에 감돌고 있었다. 필경 뭔가 이어지는 선율 속에 자유라는 느낌이 북 치는 소녀처럼 끼어 들고 있었던 것이 그 이유가 아니었을까?

이유는 없지 않았다. 며느리의 또 다른 글, <이루지 못한 일>로 부터 온 잔잔한 수혈에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어서 였던 것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살지 못한다.
돈과 시간 그리고 결국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대형 유리창을 통해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Running Machine위를 달리고 싶었다. 타이트하게 붙는 스포츠웨어를 입고 지금보다 3배나 더 되는 가슴을 흔들거리며 도시에 어울리는 땀을 흘리고 싶었다.
흔들거리는 기차 식당칸, 노을을 바라보고 앉아 맥주를 마시고 싶었다. 혼자라면 더욱 좋겠지만 여자 혼자 그런 여유를 부리는 걸 용납치 못한다면 아쉬운 대로 둘도 괜찮다.
발리 해변, 긴 의자에 비키니를 입고 누워 따스한 햇살 속에 너무나도 재미있는 책을 읽으며 한달 간의 휴가를 보내고 싶었다.
항구를 낀 유럽의 아담한 도시의 노천 카페에서 재즈 음악을 들으며 에스프레소 커피를 시켜 놓고 검정 원피스에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나의 우아한 모습을 반사되는 창문을 통해 보고 싶었다.
오페라 나비 부인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나올 정도의 목소리와 감동이 지나쳐 공포를 느끼게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오페라 가수이고 싶었다.
아들을 낳고 싶었다. 남들은 잘도 낳는, 하지만 아들 드문 집안 3대 독자의 대를 잇는 아들을 낳아 마음껏 잘난 채 하고 싶었다. 매번 임신소식을 듣고 쓴 약을 먹은 듯한 표정을 짓던 내 남편 보란 듯이 말이다.
역시 신은 오만함을 허락하지 않았고 인생은 공평함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서로 의지할 수 있는 가족들이 있고 나를 인정해 주시는 시부모님이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건강이 있다.
귀여운 딸이 둘이나 있고 착한 시누이도 둘이고 친구 같은 언니도 둘이다. 무엇보다도 인생의 반려자로서 한치의 부족함이 없는 보기에도 아까운 나만의 남편이 있다.
20세기에 해보지 못한 일이 아무리 많다 해도 나에게는 21세기를 함께 할 소중한 사람들이 곁에 있다. 세기가 바뀌고 세상이 날 힘들게 할지라도 나는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존재하며 행복할 것이다.
결과로서의 형태도 중요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뭔가 다른 정말 필요한 것이 있을 것이다. 21세기에는 그것을 추구하며 살고 싶다.

나는 나를 구속한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릴 <자유>를 비로서 갖게 되었다고 여겼다. 그것은 행운이며 행복일 것이다. 비록 나의 뒷모습을 모르는 숙제를 안고 왔다 해도 그것은 나만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을 방임할 수 있는 의미의 자유가 아니라 나만의 색갈로 살 수 있는 것이기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 온 너스레 건달처럼 말이다. 겨우 뒷동산에 올라 숨을 할딱 거리는 처지라 하지만 나의 뒷모습이 올라도 또 올라도 결국 하늘아래 그 자리에 있다 한들 21세기로 이어지는 나만의 자유는 결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함 때문일 것이다.(2000.10.14.)


후기: 다음 날 외손녀 고서연(초등 3년)이 쓴 생일카드 중엔 이런 글이 있었다.
“……아~ 참! 할아버지께서 제 소원 이루어 주실수 있어요? 제 소원은 할아버지
께서 100세, 200세까지 사시는 거예요. 저는 할아버지를 베리 베리 ‘엘 오
비 이’ 해요!”
(내가 오래 살아야 한다고 여기는 마음에서 시울이 붉어진 것은 아니다. 손녀
들의 마음속에 내가 그렇게 오래오래 간직 되어 살아있을 나의 뒷모습을 그들이
뭐라고 재갈 거리던 나는 그들의 팔딱거리는 영혼 속에 더불어 살게 됨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손녀의 그 길고 긴 세월만큼 그 행복함은 내
것으로 있다. 서해대교 사장교 470m를 걸으며 무병장수하라는 축원처럼 서산에
떨어지는 해는 유난히 크고 노을은 화려했다. 그 붉은 해를 가로지르는 길고 긴
다리가 거기 언제까지 걸쳐있을 터이니까.(200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