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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산일수록 정상엔 나무가 없더라 덧글 0 | 조회 15,056 | 2009-04-17 00:00:00
정동철  


높은 산일수록 정상엔 나무가 없더라

에베레스트 정상에 나무가 없다는 것은 눈 때문이라 치자.
백두산이나 한라산 정상도 그렇다. 분화구를 대신한 물 때문이라고 설명해도 되는 것일까? 하다못해 북한산도 마찬가지다. 인수봉(人壽峰)이야 바위라 그렇겠지만 백운대(白雲臺)역시 그러하다. 물론 거기도 바위가 자리를 잡은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주목(朱木)나무 군락을 내려다보는 소백산 비로봉(毘盧峰) 일대엔 패랭이꽃과 국화꽃이 대신하고 있을 뿐 관목(灌木)이 없다. 무슨 이유일까? 여름의 1500m(정확히 말하면 1439.5m) 정상에는 눈도 바위도 없었다. 그야말로 대머리처럼 정상 바로 아래는 나무가 무성하다.
왜지?

“산은 높을수록 나무가 없고, 사람은 무거울수록 머리털이 적지........?”
“웃기네... 대머리가 정상과 같다 이거지......... 하기야 정박(鄭博)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정동철! 정동철! 정동철!..........
서울로 오는 버스 속에서 알 수 없는 젊은 의사들이 연호를 외쳐댈 때 설마 날 보고 대통령에 출마하라는 뜻은 아니겠거니 인사말로 웃기려다 꾸겨 삼켰던 정황을 상기하면 친구의 말인즉 빈말이 아닐지 모른다.
‘창조자는 생각이 없고, 생각하는 사람은 창조를 못한다고 하는데 그런 뜻이 아니지.....’
껄껄 웃었을 뿐 뒤의 말은 속으로 뇌인 대답이었다. 대청봉에 나무가 없다는 얘기는 듣지 않았으니까.........

어의곡으로부터 비로봉으로 오르는 길은 장난이 아니었다. 1500고지라고는 하지만 800m 쯤에서 시작한 것이므로 6~7백m에 불과한 산행(山行)이 이토록 힘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가파른 길이 아니었기에 줄곧 앞서 가던 1100고지쯤에서 잠시 쉬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너무 앞지른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 데다, 그날 따라 복대를 차고 올랐기에 숨이 버거웠다. 허리가 부실해 행여나 삐끗하면 동행들을 힘들게 할지 모른다는 방비책이었다. 시원하게 흐르는 도랑물 옆에서 귤 하나를 까먹고 륙색을 메니 웬일인가. 무게가 달랐다. 갑자기 무거워진 것이다. 숨이 턱에 걸리면서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횡단(橫斷)이 아니면 친구들이 더 왔을 거야. 오르다 힘들면 내려올 때까지 쉬고 있으면 문제가 될 게 없으니까.........”
그들이 안 온 것은 버스가 이미 비로봉 넘어 비로사(毘盧寺)아래 삼가리 매표소가 아니라 아예 풍기읍에서 기다리기로 되어있었던 탓이다. 충청북도에서 올라 경상북도로 내려오는 6시간의 횡단 산행이었기에 따라서 중도 포기가 안 된다는 점에서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산이라면 낯선 형편은 아니다.
도선사 주차장에서 할닥고개를 넘어 백운대를 끼고 올라 능선(稜線)따라 정능이나 아카데미 하우스로 내려가는 솔로(Solo) 산행을 즐겨 온 역사가 몸에 배어있던 탓이다. 비록 근교 북한산이라 하지만 누구랑 같이 가면 말을 하게 되고 뭔가를 뻑적지근하게 마시고 먹어야하는 그런 것이 싫어 쉼표 없는 혼자만의 산행은 20여 년 전 나의 관행이었다.
허구한 일요일마다 산 어귀에 들어서면 제법 엄숙해지곤 했다. 뭔가를 낚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대가 있었다. 득도(得道)의 대박을 노렸을 것이다. 하지만 번번이 경험하게 되는 것은 중턱에 이를 때 땀방울 속에 모든 기대는 헉헉거리며 내쉬는 숨과 더불어 깡그리 공중분해 되는 것이었다.

올랐다. 땅만 보고 한 발 한 발 옮겼다.
예와는 달리 무슨 대박 같은 기대는 거기 없었다. 꼬불꼬불 높낮이가 멋대로 된 산길을 탓하지 않았다. 무력한 다리를 탓할 틈도 없었다. 날씨를 탓할 마음은 물론, 그렇다고 산행을 후회하지도 않았다. 운명처럼 그저 오르고 또 오르기만 했다. 마치 초행길의 인생처럼 그저 그렇겠거니 마냥 헉헉거리며 올랐다. 마음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 타자(他者)와 나의 구분이 없는 오직 한 발 한 발뿐이었다.
맞다. 마음의 구석구석 방마다 크고 작은 욕심과 척하는 허세들로 난장판 같은 동대문 로데오가 거기엔 없었다. 마음의 방은 어느새 텅 비워버렸다. 편할 것도 아플 것도 없는 마음, 다만 육신만이 발바닥에 달라붙는 지남철을 땅에서 떼려고 허우적거리기만 했다. 도리 없이 쉬어야했다. 이 미친 짓을 왜 하느냐는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내려갈 산에 왜 올라왔냐고 탓할 여지도 없었다. 그게 인생이니까. 아니 인생인지 아닌지 그것은 그때 생각이 아니었다. 산과 나무, 하늘과 바람이 뭐냐고 의문을 갖는다는 것보다는 쉬다 또 쉬며 오르는 것뿐이다.
거의 정상에 이를 무렵 갑자기 땅이 천길 낭떠러지로 푹 꺼지는 듯 발작적 소름이 온 몸을 덮쳤다. 전율이 몰아닥치는 것이다. 알리의 나비 같은 잽이 날아드는 듯 벙벙한 기분이었다. 대체 8월의 푹푹 찌는 더위에 어울리지 않는 소름이라니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졸도 직전의 죽음이 이런 것인가? 분명한 것은 몸 어딘가가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비로소 포기라는 단어를 생각했었다. 그러나 결코 탓하지는 않았다. 마음뿐 몸은 포기하지 않았다.

10여 년 전부터 산행이 뜨악해지면서 자신의 체력을 시험하는 곳이 북한산, 예의 익숙한 등산로였었다. 같은 시간대에 얼마나 견디느냐는 것으로 자신의 체력을 가늠하는 버릇이 있었다. 아직은 4, 50대와 큰 차이가 없다고 여겨왔었다. 고희(古稀)를 두 해 앞둔 나이에 그래서 소백산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산행에서 처음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늙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다행히 쥐는 나지 않았다. 비로봉 충청도 쪽을 바라보며 친구들과 풀썩 주저앉아 냉동실에 얼렸던 깡통 맥주를 터트렸다. 네 명이 두 개를 나누어 마셨다. 짱이었다. 그 상쾌함이라니.
“세상에, 이렇게 좋을 수가!”
천하를 발 알에 눕힌 형편에 짜릿한 얼음과자 같은 맥주를 마실 수 있다니, 모두의 입은 탄성뿐이었다. 부러울 것이 없었다.
고생 끝의 낙이 이런 것일까?

비로봉에서 비로사(毘盧寺)로 내려오는 길은 절벽이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어설퍼 한 짐 나무 지게를 지고 내려오던 전쟁 때의 위험과 같았다.
늙은이들의 공통어(共通語), 천상 <나면 봉지>들이다. 먹고 나니 남는 것은 천덕꾸러기 신세라 휘청거리는 다리가 못마땅해 쭉정이 인생을 자탄하면서 결국 버스에 앉았다.
그건 앉아본 사람만이 안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 다리가 돼지고기에 막걸리로 마비가 되면서 서울행 고급 버스에 길게 자리를 하니 만고 강산이다. 또 하나의 진미, 산행의 뒤풀이 바로 안락함이다.
예의 연호, 정동철! 정동철! 정동철!..........이 오히려 성가실 따름이다.

연호라면 정치가 번개처럼 떠올라서일까, <인간의 8대 죄악>을 쓴 콘라드 로렌츠의 말이 기어들어 조금은 시끌 뻑적지근한 버스 속의 눈꺼풀을 가물가물하게 하였다.
인구 폭발로 마음은 험악해지고 공격성은 요란하다. 마음이 이와 같아 욕심이 가득하니 비좁아 욕심이 서로의 자리를 양보할 리 없다. 결국 싸움은 외부에서 공격의 대상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작금의 정치 판으로 이어지는 것은 잠재된 울분의 불가피성이다.
해결책은 정상의 나무 대신 패랭이와 들국화로 확 뚫린 구릉(丘陵)처럼 편안함이 거기에 있어야 함일 것이다. 게걸스런 정객이 독야청청 악어와 같은 욕심을 고고한 웅변 속에 감춘 모습이 아니라 민초가 힘겨워 땀으로 좁다란 방 속의 구겨 넣은 잡다한 상념들을 떨치고 활개칠 정상이 되어야 시원하겠다는 것이다.

금년도 세계 1위의 유머가 신문에 소개된 적이 있다.

사냥꾼 두 명이 숲 속에서 사냥을 하다 한 명이 쓰러졌다. 동료의 기절해 당황한 사냥꾼은 휴대 전화로 긴급 구조를 요청했다.

사냥꾼: 제 친구가 죽은 것 같아요. 어찌 해야 하나요.
긴급 구조대 교환: 진정하시고 시킨 대로하세요. 먼저, 친구가 죽은 게 확실 한가요(Lets make sure hes dead).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한발의 총성이 들리고 사냥꾼이 다시 말했다: "확실해요. 다음엔 어떻게 하죠."

지난 1년간 4만 여건의 우스개 소리에 대해 70개국, 2백 만 명의 네티즌이 참여한 투표 결과에 따른 것이라 한다. 와이즈먼 교수는 "유머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게 하거나, 긴장된 상황에서 정서적 충격을 줄이거나 일종의 부조화로 인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라며 "멍청한 사냥꾼 얘기는 3대 요소를 모두 갖췄다"고 평가했다.

높을수록 정상엔 나무가 없다는 것 역시 웃기는 얘기라 할 것이다.
정치는 유머가 아니다. 늙은이는 멍청한 사냥꾼의 부속물로 족할 것이다. 값이 어떻게 치부되든 좋게 떠나주어야 할 존재들이다. 다만 감투 없는 비로봉의 상징적 비석이 되면 다행일 뿐이다. 바라는 것은 그러나 높은 사람일수록 울창한 조건으로 과대 포장하여 뽐낼 일만은 아니지 싶다는 얘기다.
200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