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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본적이 없다. 덧글 0 | 조회 16,238 | 2015-12-28 20:40:59
관리자  

나는 나를 본적이 없다.

2015.10.04.

정 동철

의사동인 박달회 수필집 제42집(2015.12.14.)에 수록됨

 

 

잠은 잘 잤나요?”

“... 밖에 샥씨가 많겠어요.... 언제 뵈도 박사님 멋지시니까.......”

박사님! 나도 박사님 좋아해요.... 정말 박사님 멋져요.... 사랑해요!”

오십대 담담한 즘마의 말을 받아 예쁘장한 숙녀, 아직 여고생티를 벗지도 못한 어리광 말로 이어진다. 한바탕 깔깔 웃음이 몰아치는 여자병동.

끼어드는 인성교육후의 또 다른 말과 말,

박사님, 왜 그렇게 멋지시죠? 멋진 운기를 우리들에 나누어 줄 수 없나요?”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또 돌아보고있지 않나, 또 까르르....

아내에게 말했다. 밖에 여자가 많겠다고....

듣고 보니 참 재미있네요, 하긴 나 말고 밖에선 어지간히 잘 하는 사람이니까?.... 좋겠구려.......”

 

아침 6시 반쯤일 것이다.

오라버니, 웬일로 오늘도 나오셨남, 띠띠빵빵-휠체어환자 밤사이 화장실 들락거려 잠못자게한다 부쳐진 별명, 어젠 조용해 잠도 잘 잤어라...”

옆 병실, 성경을 끼고 사는 40대 여인은 예외 없이 내손을 잡고 말한다.

박사님, 아침은 드셨어요? 박사님 좋은 냄새 나네요..... 손 왜 이리 따듯하시죠? 박사님 정말 좋아요...”

팔층 남녀병동에선 아예 두 팔로 나의 허리를 감싸고 옆의 할머니는 손을 잡는다. 마치 그래야 되기라도 약조한 듯,

아침은 드시고 나오셨어요? 전 샤워하고 이렇게 단정하게 있어요... 박사님! 겉과 속이 다르면 안 되지요...”

내가 밤새안녕이라 돌아보며 묻던 말을 먼저 한다.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 늘 듣는 얘기지만 분명한 것은 나의 손이 따듯하다는 사실이다. 나의 손을 만지는 손마다 차갑다. 상대적으로 그만큼 내 손이 따스하다는 것은 꽤나 위로가 되는 모양이다. 땀기로 젖은 칙칙한 따스함이 아니라 보송보송 거기엔 80노인 할아버지 의사가 아니라 비록 내가 먼저 손을 내미는 법은 없어도 정감이 흘러드는 청춘(?)을 감지하고 있는 것 같이... 반드시 만지지 않아도 눈으로 또한 같은 느낌 전해지고 나의 미소와 손짓 통해 이 같은 교감은 여자들만이 아니다. 나이 고하를 떠나 곳곳 나의 눈과 마주치는 남자들 역시 멀리서도 안녕하세요!’ 정겹기만하다.

방방 구석구석 둘러보며 주치의가 누구인가를 떠나 이리 묻고 저리 말하며 자연스런 관찰 회진’-이 병원에만 있는 생활 속의 들러보기 회진, 모두 가족과 진배없는 아침 식전 시간이다. 집안의 어른을 맞는 듯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정식 회진과는 전연 다른 분위기다. 오늘도 나오셨네요, 멋져요... 사업가 노장의 얘기다. 회진은 내가 하는데 인사와 걱정은 그들 몫이다. 역할이 바뀌었다.

그날은 한글날이다.

 

한데 순간적으로 밀려오는 생각, 그들이 표현하고 있는 의미들이 과연 나의 실체에 해당하는 것일까?

나는 날 아직 한 번도 본적이 없다. 나로부터 흘러나간 이미지가 그들 마음을 통해 사진처럼 돌아오고 있는 현상을 듣거나 거울에 반사된 나를 느끼고 있었을 뿐 그것이 참인가 싶어 드는 생각이다. 대체 한 번도 본적 없는 나를 뇌 어디에 저장하고 있는 걸까?

연구소가 아니더라도 뭔가 사물을 알려면 일단 실물을 자신의 눈으로 똑바로 봐야한다. 현미경이든 망원경이든 이치는 같다. 그렇더라도 보고자 하는 것이 나의 시각중추에 있는 기존의 어떤 이미지의 간섭을 받는다. 정확히 말하면 뒤통수 시각중추 첫 단계에서 망막을 통해 들어온 빛의 음양陰陽정보가 해체 재생산되고 있기에 감지되는 그들의 말 그대로를 나라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솔직히 나의 쌩눈으로 나의 쌩얼을 본적은 한 번도 없다. 그 얼굴을 보고 한바탕 웃는 유쾌한 병동의 까르르풍경 그 주인공이 나라니 정말 나일까 의문이 생긴다는 것이다. 보는 사람은 참이라 할지 모르지만....

뭔 해괴한 소리냐고? 그럼 시각장애인은 란 개념이 없단 말이냐고?

나는 대머리라는 것을 안다. 안다고 생각한다. 의치를 빼면 80청춘이 아니라 골골 담방구를 물던 오두막집 옛 할머님의 합죽과 전연 차이가 없다. 거울속의 그런 나를 본다. 눈은 가늘어 맵고 입가의 웃음은 어딘가 불균형, 비 대층이다. 좌우 비 대층이 아니라 마음과 마스크의 비 대층 말이다. 한마디로 나는 나의 실체-실존이라 해야 하나?,를 있는 대로 본적이 없기에 아리송해 생기는 의문이다. 별난 노인, 할일 어지간히 없다고? 하긴 정신과의사도 미친다니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100주년, 금년이다. 빅뱅은 50주년이다. 난해한 것이긴 하나 뭔가 느낌이 있다. 이런 글귀들이 그것이다.

인간들은 자연이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관측자의 자격을 부여했다는 자부심을 갖는다. 자연이 우주라는 무대를 먼저 마련하고 그것을 바라볼 인간을 객석에 초청했다고 생각하는 것 말이다. 양자물리학자들의 생각이다.

고양이 역설이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안다. 상자 속에 넣은 고양이, 거기에 우라늄 덩어리를 넣어두면 붕괴되는 성질로 점차 우라늄원자가 상자 속에 많아질 것이다. 그 힘을 망치에 연결해 한계치를 넘으면 고양이 머리를 쳐 죽게 하는 상자다(엘빈 슈뢰딩거, 193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한데 상자속의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떻게 아나? 붕괴되어 나온 원자는 점으로 된 입자지만 그것이 발견될 확률은 간섭문의를 일으키는 파동으로 이해된다. 기묘한 양자물리학, 결국 죽고 살고를 확인하는 길은 뚜껑을 열어 관측 즉 관찰행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바로 객석에 초대된 인간의 관측행위가 거기에 해당된다는 것, 이것이 뜻하는 것은 바로 내가 나를 보지도 않고 알고 있다는 것이 참 인자 물음표가 붙게 되는 이유로 통한다. 정신 나간 의문일까?

병동으로 가보자. 거기엔 예외 없이 안정실이 있다. 간호사의 설명과 함께 냉정한 오감이 반사적으로 작동되어 관찰한다. 의사로서의 객관적 눈과 머리가 번득인다. 보고 있는 내가 나를 모르는 주제에 관찰은 정말 참일까? 헷갈린다.

느림의 미학이 필요 없는 늙은 나이, 답지 않게 걸음은 빨라 그땐 매우 심각해진다, 개방병동과의 머리싸움은 미소로, 하여간 한바탕 웃음 뒤 다시 진료실 불을 켠다. 과연 내가 본 것과는 달리 들은 것이 나의 정체란 말이 맞나?

 

분당에서 새벽마다 지구 한 바퀴이상을 달려온 고속화도로, 비로소 중요한 오늘의 뉴스와 과제를 보며 정리, 때에 대합실 접수대의 출퇴근지문인식기,

안녕하십니까?-‘의 발음이 유난히 올라간다. 버튼을 눌러주세요... 잘못 누르셨습니다. 다시 한 번 눌러주세요.... 감사합니다.‘

근래 발견한 어떤 방송국 여자아나운서의 말투, 북한식 높은 음성으로 강요하듯 일방적인 대개의 남자아나운서와는 달라 무척 호감이 가는 말투를 닮은 기계음에서 공식적 하루가 시작된다. 개별면담을 위해 병동으로 다시 올라간다.

의문은 끈질기게 비켜서려하지 않는다. 나의 정체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처음부터 원래 집 같은 병원을 인수한 것은 아니었다.

대합실 입구 승강기문이 열리자 셔터가 가로막는 아침 6시의 병원, 너무 이르다는 신호다.

대체 없던 회진은 왜 하나 여기가 군대냐? 개인 장 위 손가락으로 쓸어낸 먼지 들이대며 이게 병원이고? 이러나저러나 환자의 인권과 자유를 간섭하지 말라며 삿대질이다. 회진 좋아하시네.... 환자의 의무란 아예 없는 곳 그 밥에 그 찬이라더니 그 직원에 그 환자, 굽힐 나는 아니라 줄기차게 단호했다. 민원과 인권침해고발은 넘치고 치료하는 병원이 아니라 호텔을 희망하는 여인숙을 방불케 했다. 며칠 전엔 벼르다 주인이 바뀌었다기에 미적거리던 보험공단에서 조사가 나왔다. 왜 이 병원만 유독 환자가 많냐는 것이었다. 8월 어느 날 결국 그들은 병원을 떠나면서 남겼다. 아주, 아주 나쁘게 생각했던 병원의 인상(인수전)을 지우고 가게 된 것 참으로 큰 소득이라 했다.

과연 거기 나의 정체가 깃들어있을까? 나도 모르는 나인데?

잊을 수 없던 시작 201341, 병원은 이제 가족과 같은 말 그대로의 병원, ‘지성병원, 지성이면 감천이라 지극정성 치료적 본연의 병원 거기 뇌 의학연구소가 뒤 미쳐 합세하고 있다. 우연? 10년 전 일기의 한 토막이다.

 

20058306:18 수 비

()기능 이상(以上)으로 척하지 말라!

정신과를 하겠다는 한 의학도에게 던진 말이다.

고전적 자기만의 머리 스타일을 고집하는 이유, 안경테 사이에 낀 먼지를 씻느라 ‘2’, ‘3’, ‘5’, ‘7’,번 역시 자신만이 좋아하는 수에 맞추어 30분 이상 닦아야하는 저변의 청결, 말하자면 외모와 청결이라는 브랜드로 자신의 이미지를 특화하여 남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 확인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것은 결국 뇌 이상(以上) 척하지 말라!”라는 말을 어기고 있는 결과다. 그는 그가 잘 알고 있다는 자신을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얼굴을 한 번도 본적이 없음에도 말이다. 5십 만원을 써가며 볼링을 배워야 하는 것, 골프는 사람과 어울려야 하는데 사람관계는 2시간이 한계, 또라이라고 여길 때 프로급 볼링 스코어를 내 보이기 위해서다. 국가대표에게 레슨을 받는 이유라 했다. 신경세포와 회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정신, 행동일 터인데.... 어떻게 치료를 해야하지?

 

나는 어떤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나의 의문을 어떻게 치료해야하나?

대체 그 많은 시간들, 사방 100m의 장애물 없는 넓은 잔디밭 중앙 한 끝에서 눈을 감고 제대로 가 본적이 없다. 15m쯤 가면 완전히 우측으로 기운다. 다음날엔 좌측으로... 그나마 눈을 뜨지 않고선 견딜 수 없는 절벽, 시각정보 그것 없이 내 속에 저장된 뇌 정보만으로 걸을 수가 없다. 똑 같다.

뇌의 다양한 기능을 통제 제어하기 위해서는 선상의 점의 순간순간 오관을 통한 입력을 받지 않고선 박쥐처럼 움직일 수 없다는 것, 코디가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늘 놓친다는 것은 상식이다. 결과는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기능으로 쏠림현상에 의존한 삶, 그 잘못을 터득하는 것이 사구백비四句百非라는 데, 너와 나는 있다/ 없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 대체 뭔 뜻인가? 대칭파괴? 빅뱅이 생겼단 말인가?

그 속에서 잘난 척 해야 한다는 것, ? 실로 희한한 일이다.

생존Survival의 원칙에서 원인을 찾는다. 병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든 규정일 뿐이고 석가가 깨달은 불법佛法이라는 것도 원래 있었던 것이지 그가 만든 것도 아니므로 경전에 노예가 되면 그 또한 없는 것이 된다는 자신만의 주장, 그것은 자유의지를 강조하며 생존을 위한 것이라 뻗대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거기에 나의 실체가 있다고? 의문의 시작은 10년 훨씬 전이다. 하나 매양 그자리가 그 자리다.

 

적어도 하루 두 번은 돌아보는 병동, 가족 같은 병원을 다져가며 공식직함 대표원장이지만 박사님으로 통한다. 실무원장 아들이 있기에 그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실제가 아들 병원이다. 환자들이 알고 모르고를 떠나 관례가 된 것이다. 부자간에 한 직장에서 운영자의 입장 같이 있다는 것은 롯데만큼이나 쉬운 일 아니라 사람들 갸웃하곤 한다.

그러나 하고 있다. 그게 나의 정체? 그럴 가능성 크지만 나라고?

기억을 통해 이미 저장된 정보들을 불러내어 모의실험을 더듬어 자신의 정체를 그린다는 것은 팩트fact. 참과는 거리가 있다. 간극의 차이 일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모르긴 하나 원하든 아니든 어찌됐든 내가 된다. 생사를 떠난 고양이처럼.

인간사 60억 하나같이 똑같은 경우가 없다. 같은 경험을 했다 해도-기억이 같은 것으로 되었다 해도, 회상될 때 거기에 함께 묻어나는 감정의 깊이의 높낮이가 당대 사회상징성을 바꿀 수 있다는 일종의 새로운 창조가 된다 한다. 창조성을 떠나 모두의 주장이 같지 않은 이유다.

자연은 우리에게 어떤 것도 말한 적이 없다. 내일을 시물레이션simulation모의실험하면서 빈약한 감각정보를 통합하는 정신, 선험적 결과에 의한 것이든 뇌가 외부세계를 뇌 안에 내적 인지認知지도를 만들어 끌어들여 한바탕 웃으며 보이고 듣기는 바깥세상에 대한 이미지로 산출되든 그래서 분석적 내가 존재하든 하여간 그것이 내가 되는데 또 다른 문제 하나 그럼에도 그것은 결코 인공지능으로 계산되는 연산이 아니라 일종의 새로운 창조임이 맞는 것일까?

내가 나의 쌩 얼을 나의 쌩 눈으로 한 번도 본적 없었다했다. 이런저런 되먹이와 모의실험에 관여한 세세하고 잡다한 것들, 샥시가 많든 적든 사구백비에 의한 평상심平常心이란 말과는 관계없이 작동되어 왔기에 그것이 바로 나, 나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는 나를 보고 있는 것이 되는 셈이다.

? 나라고!

 

에덜만은 말한다.(제럴드 에덜만, 1972년 생리의학 노벨상 수상) 팽창이론과 고온 대폭발(Big Bang)에서 떨어지는 온도와 늘어나는 시간함수로 대칭파괴가 이어져 입자가 생기고, 진화과정에서 기억원리가 뒤따라 결국 고차원적 의식이 가능해진다는 것, 즉 정신(마음)이 태어난다는 사변, 그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운 논리이긴 하나 적어도 지금은 그런 것들을 전제로 나를 나라고 접수하려 한다. 복잡하다. 매우 엄청나게....

그렇게 믿으려 한다. 믿어야 하겠다. 시종이 어딘지는 물론 모른다. 그것은 불가피한 한계, 분명한 것은 그러나 아무리 떠들어도 결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y으로는 풀어지지 않게 될 유일무이의 나일 것이라는 것은 버리지 않는다. 실험가능하지 않았을 때 아무리 세련된 논리라도 무용지물, 그것이 인지심리학, 해서 정신이란 블랙박스 속을 들여다보려면 생물학(유전자가위 CRISPR포함)은 물론 양자물리학적 증명이 필요하고 결국은 해낼 것이라 하나 나의 무식은 바로 지금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미묘한 굿거리들은 결단코 인공지능은 풀지 못하리라 믿는다. 어쩌면 대칭파괴를 통해 생명체의 발견을 찾아보려는 빈약한 대한민국의 발버둥이 배경에 자리잡고 있음일 수도 있다.

 

이쯤 불문곡직하고 역설계 공학적 정신의학이라는 것을 따져보겠다는 것이 나의 현실이고 보니 그것은 편견일까, 고집일까, 아니면 지독한 무식일까?

고양이가 아니라 여백은 뭔가 텅 빈 상자일 뿐이다. (2015.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