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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저귀와 청진기 덧글 0 | 조회 16,832 | 2009-04-17 00:00:00
정동철  


기저귀와 청진기

좀 된 얘기다.
둘째 손녀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니까 적어도 4년은 됐지 싶다.

혈압이 멋대로 오르내리던 때다.
보기와는 달리 소심한 성격에다 품위 유지가 행여 다칠세라 눈치가 늘 앞질러 툭하면 에피네피린이 반사적으로 뿜어 나와 긴장감에 휩싸이곤 하였다. 그러나 체면을 지켜주는 방어체계는 부실해서 여기저기 뚫고 새어나오는 허드레를 막기가 쉽지 않았다. 혈압이 일정할 리 없었다. 그게 나의 정체였다.
잴 때마다 달랐다. 그야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지만 그 폭이 워낙 커 기웃거렸다. 고혈압인가 싶다가는 나만이 아는 나의 불안증(不安症)의 한 표현이라 여겨 아니라는 판단이 서기도 하지만 일단 알고 지내야겠다는 심정이었다.
“그 혈압기(血壓器) 있지, 그거 하나 사다 주겠니?”
손목에 시계처럼 차고 언제나 잴 수 있는 혈압기를 받은 것은 이제나저제나 부탁 한지 한 달을 훨씬 넘어서였다. 아들이 다니는 바로 병원 앞에 의료기 상이 있어 나 같으면 금세 사다줄 일이었다.

기저귀는 그랬다.
벙긋하면 아내를 재촉해 새벽에 킴스에 가서 바로 갖다 주었다. 손녀 일이라면 껌벅 죽는다는 아내의 말이지만 그게 좋은 걸 어떻게 하랴. 실제로는 벙긋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미리 준비해두는 것이 관행이었다. 장한 일이라도 했다는 식으로 틈이 없었다. 사이사이 갖다 주는 형편이었으니까 부탁할 여지를 아예 주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부탁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서 앞질러 한 일이다. 어쩌다 기저귀가 떨어졌다 해도 며느리는 부탁한 적이 없다. 근처에서 사다 쓰는 것이다. 내 할 일을 뺏는 것 같아 서운할 정도였다. 아들은 더욱 그랬다.
혈압기를 부탁 받은 아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수련의라는 신분이었으므로 정신없이 돌아가는 형편에다 내가 또한 의사이기에 급한 것은 아니라 여겼을 터이다. 의사들이란 전문적으로 판단되는 의학적 상황을 알고 있으므로 환자와는 당연히 입장이 다르다. 차갑다 못해 굼뜬 기분을 아픈 사람들에게 안겨줄 소지가 많다. 뻔히 아는 사실인데 환자와 그 가족이 보채고 다그치는 일에 어지간히 찌들어 살아온 내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가 환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그에겐 더더욱 혈압기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몇 번인가 얘기를 하자 받아 쥔 혈압기는 잠시 좀 그랬다. 기저귀로 몸에 밴 안달 때문이다. 그러나 좋았다. 흐뭇했다. 잊지 않고 사 왔다는 사실만이 기뻤다. 필경 아들이라는 점에 의미를 부여하여 뿌듯하기까지 했다.


그랜드 하야트호텔, 인도네시아 발리.
룸 3232, 2002년 6월 24일 오후 6시 32분이다.
널퍼지게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꿈에서 만나요>
무라까미 하루끼라는 사람이 쓴 제목이었다.
자칭 이미지즘이라고 한 그의 글을 읽다가 어디선가 문득 ‘참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아버지와 겸상을 한 조반이었다.
참새 한 마리가 밥상에 올라왔다. 먹음직하게 잘 구워져 있었다.
냉큼 아작 아작 먹어버렸다. 정말 맛이 있었다. 숭늉을 마시자 밥상이 물러갔다. 그 때 작은어머니가 나직이 말했다.
“아버님 드시라고 하지....”
“...............?”
당연히 내가 먹어야 한다고 여겼는데 무슨 얘긴지 몰랐다.

이른 아침 나무를 한 짐 해올 때였다. 제법 엉성하던 지게가 조금은 녀석들의 나뭇짐처럼 모양을 갖추어가던 어느 날 작대기로 잠시 버텨놓고 지껄이는데 참새란 놈이 왔다갔다했다. 돌 하나를 주워 팔매질을 했다. 놀랍게도 알아차린 참새가 날아가는 방향에서 적중되었다. 분명히 말하면 우연히 충돌했을 뿐이다. 나는 새를 떨어트렸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 조금은 신기했고 녀석들이 환호했다. 바로 그 참새를 자랑스럽게 갈퀴로 받친 한 짐 나무를 내려놓으며 작은어머니에게 주었다.
“내가 잡은 것인데 내가 먹는 것을 왜?.........”

화끈거린 것은 발달된 상상의 재생 기능이 DVD로 발동했을 때다. 그 때는 정말 나는 이상하게 갸웃거렸었다.

아버지와 나는 그만큼 부자유친(父子有親)의 절절한 경험이 없었던 탓이었다.
줄 곳 헤어져 살다가 제사(祭祀) 날이나 명절 때그 때도 제사가 없었으면 오시지 않았을 것이다만나는 아버지, 6.25 전쟁이 터져 서울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피난 생활로 비로소 같이 지낸 몇 개월이었다. 어머니는 같은 마을에 함께 피난을 왔지만 6촌 댁에 있었다. 당신의 딸과 비슷한 첩과 사는 아버지 집에 들어와 지낼 마음이 아니었으니까 사실 나라고 육친(肉親)같은 그런 기분이 있었을 리는 없었다. 9번째 첩이 때의 작은어머니였다니 어머니의 심정은 결코 같은 지붕에 기거할 마음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 역시 한번도 그녀에게 ‘작은어머니’라는 호칭을 써본 적이 없었다.
참새구이는 당연히 나의 몫이라 여겼던 족한 이유다.

한데 하루끼가 붉게 나의 얼굴을 달구도록 날아든 ‘참새 한 마리’는 그놈의 이미지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었다. 수영장 옆 바닷가의 댈랑댈랑 나부끼는 깃발에 맞추어 햄버거 냄새가 침을 돋구었던 것이 이미지화 된 것이 연유다. 아들 내외와 두 손녀가 그 곳으로 간 것을 보고 무심히 수영장에 아내를 두고 호텔 방으로 들어왔다.
샤워를 하고 아직도 나이답지 않은 젊음의 나르시즘을 즐기려는데 방바닥이 불쑥 튀어 오른 것을 발견했다. 슬리퍼에 힘을 주고 밟았다. 제자리로 들어갈 줄 알았던 것이 대신 먼지만 푸석거렸다. 벼란 간에 바닥이 갈라져 혹시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우스 키핑에 전화를 넣었다.
바로 현지인 인도네시아 남자가 왔다. 프론트에 연락을 하더니 방을 바꾸어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라고 말부터 했지만 뒤 미쳐 짐을 나르는 것이 번거롭다고 여겼다. 이틀 후면 떠날 것이기에 바닥이 갈라져 혹시 내려앉는 것이 아닌가를 묻자 그렇지는 않다고 했기에 마침 침대와 침대 사이의 돗자리를 가리키며 넓직한 것을 갔다 덮어달라고 했다.
침대에 누워 책을 보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별로라 싶던 책이 며느리가 읽는 책이었기에 좀 더 눈에 힘을 주다 어느새 책 읽는 자신을 잊었다. 다시 표지 제목을 보고는 저자가 말하려는 예의 이미지즘을 발견했다. 그때부터 푸석거리는 먼지처럼 그놈의 참새 한 마리가 푸덕거리게 된 것이다.

저녁을 뭐로 먹을까 궁리를 하며 출출한 위의 반응을 느끼는데 아내가 들어왔다. 아들 방으로 전화를 돌리니 저녁 생각이 없다고 했다. 간단히 방에서 식혀먹겠다는 것이었다. 낮에 먹은 것이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삼각대에 올려놓은 캠코더로 자신들의 그림을 열심히 담는 듯 나와 아내에겐 앵글이 오지 않아 조금 그랬지만 바닷가로 사라진 후 위산(胃酸)을 자극하는 냄새가 잠시 지나쳤을 뿐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비약은 저녁을 궁리하던 마음에 그놈의 참새가 계속 퍼득거리며 마음의 계기판을 흔들었다.

그러자 다시 확확 달아올랐다.
대체 그 때 나는 어떤 자식이었기에 아버지에게 드시라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아작아작 먹어치웠단 말인가. 나이 열네 살, 전쟁 때다. 고기라곤 구경도 하기 힘든 시절이라 환장한 것이었던가?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심한 태도, 철없는 일종의 천치, 그것은 그때까지 살아왔던 삶의 총체적 표현의 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아쉬운 것은 그 때 그 모습의 사진이 없다는 점이지만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벌떡 일어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달아오르는 뒤통수의 용수철이 너무 강렬했던 탓이다.

돗자리로 감추어진 호텔 방, 한국인은 받지 않는다던 호텔 방의 풀석거리는 먼지처럼 그날의 그 따가운 상흔은 오랜 세월의 이자(利子)로 원금보다 훨씬 크게 갑자기 다가오는 듯 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뭐 드셔야죠?..... 네, 그럼 그렇게 하세요.”
반사적으로 뭔가 썰렁한 기분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러 저리 생각을 돌려봤다.
그러고 보니 전화 속의 아들은 자연스럽고 말 그대로 다소간의 배려와, 정신과 의사가 주장하는 <개체(個體) 존중(尊重)>이 어려 있었다.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무슨 버거를 그들 네 식구끼리만 먹었다는 사실은 늙은 나만의 <과거 집착형>에 따른 섭섭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그가 초등학생일 때 아파트 단지 내의 이웃 아버지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야구나 미식 축구공 놀이를 수도 없이 해왔던 과거가 있었기에 대체로 스스로 하는 일 자체가 늘 자연스러웠고 그것은 부모 자식간의 법도를 어긴 적이 없었다.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나의 입장에서 이미지화되었고, 한발 더 나가보니 과잉보호에 대한 일방적 러브 콜과 같다는 사실을 곰씹어야 했다. 과잉보호는 준 만큼 기대가 크고 그래서 자신이 만든 기준에 미치지 못할 때 실망과 울분을 터트린다. 나를 찾는 상당한 부모들의 얘기다. 그것은 나에게도 예외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그날 저녁 아내와 나는 야채 참치 깡통을 뜯어 조금 남은 김치에다 맥주를 곁들여 때웠다. 한결 속은 편했다. 신체적으로는 그랬다. 마음은 그러나 이성(理性)과는 달리 문풍지가 가을바람에 떨 듯 펄럭였다. 옛날의 그 아버지가 그러하셨을까?

기저귀와 청진기

뜬금없이 별똥처럼 스쳐가는 생각만은 지워지지가 않는다.
이제 이성보다 감성에 더 충실하게 된 늙은이가 되었나보다.
2002.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