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수필
게시판 > 수상수필
왠지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 덧글 0 | 조회 16,793 | 2009-04-17 00:00:00
정동철  


왠지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

화창한 일요일 아침.
진달래꽃은 힘없이 엉켜 그 싱그럽던 생기를 접고 있었다. 대신 잔디의 계절이 아시아 선수촌 공원을 뒤덮고 있었다. 상큼하고 신선하기만 했다.
아내와 나는 지난해 아시안 게임의 젊은이들이 한껏 몸과 마음을 펼치고 겨루던 추억의 공원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돌고 있었다.(주: 1986년 아시안 게임이 끝나자 그해 12월, 15동 65평으로 대치도 미도 아파트에서 이사를 끝냈다.)
버려진 휴지, 짓밟힌 담배꽁초, 그리고 아무렇게나 뒹구는 병들을 주워 쓰레기통에 습관처럼 집어넣으면서 그래도 깨끗한 공원을 거닐고 있었다. 상쾌한 발자국 사이에 아내와 이런 저런 말을 나누며 걷던 그날, 우리는 멈칫 젊은 가족 네 식구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남편과 아내와 그리고 아직 유치원도 다니지 않는 듯한 어린아이 두 명을 거느리고 잔디밭 한가운데에서 앞마당처럼 뛰놀고 있었다. 30대 중반의 부부와 아이들, 자연과 어우러진 모양은 보기에 좋았다. 다만 강박적으로 잔디밭이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정작 놀란 것은 남편과 아내의 서로 다른 모습이었다.
남편은 골프채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쑥을 뜯는지 아니면 잡풀을 뽑는지 아이들과 옹기종기 이곳 저곳을 더듬고 있었다.
아시아 선수촌의 공원은 아파트와 붙어 있다.
휘두르는 그 남자의 골프채 머리로 잔디가 어떤 꼴을 당해야 하는지 그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한바퀴 돌면서 다시 만난 그는 제왕처럼 아내와 아이들을 뒤로 이끌고 구 지 산책로를 피해 잔디밭으로만 내내 아침 햇살에 번쩍이는 골프채를 어깨에 메고 당당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당연히 아빠의 의젓한 모습을 따라 신이 나서 이리 뛰고 저리 쫓고 있다.
당당하고, 오만하고, 그리고 법(法)없이 사는 사나이, 시민 공원을 사유재산인 양 자기 집 앞마당처럼 휘젓고 다니는 이 남자는 대체 어떤 가장(家長)일까?
돈푼이나 있겠다는 것은 짐작이 간다.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직위가 웬만하겠다는 점도 알만하다. 처자식들을 대동하고 아침 산책을 나왔으니 가정적이라는 가능성도 엿보인다. 문제는 그의 시민 정신이다.
그는 분명 전제형(專制型) 가장일 것이다. 모든 것이 그의 말 한마디로 처자식들이 손발처럼 움직이기를 바라는 사람, 아니면 아부형 가장(家長)일지도 모른다. 바깥 사회생활에서 골프를 칠만한 위치이나 눈치를 보며 굽실거려야 하는 데 찌들어 처자식 앞에서만은 당당한 모습으로 또 다른 아부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어쩌면 아예 각목형일지도 모른다. 천하가 마음내키는 대로 휘두르는 골프채에 공이 날아가듯 그렇게 세상을 치고 살던 습성이 몸에 배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
사실 불쾌했다.
엄연히 들어가지 말라는 팻말이 어른의 키만큼 높게 적혀져 있는 잔디밭을 마음대로 드나들고, 게다가 골프채를 휘 들으며 도무지 공원 질서를 정반대로 해석하는 모습, 그나마 거드름까지 있는 대로 피고 있었으니 유쾌할 까닭이 없다. 안하 무인의 꼴불견이 바로 이런 것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중요한 것은 사실 나나 나의 아내가 느끼는 불쾌감으로 그치는 일이 아니란 데 있다. 대부분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건드리고 있었다는 점도 그렇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가장의 두 아이에게 우리가 기대할 훗날의 마음이 어떤 것일까 하는 점이 더 중요한 문제다. 천진 난만한 어린아이들이 아버지를 따라 무법자(無法者)가 될 수 있다는 점도 그렇겠지만 언젠가 아버지의 모습을 알아차리고 반항으로 이어질 때 그 폭발력은 어떤 방향으로 터져 나올 것인지 가늠할 수 없다는 점이다.
각목의 아들딸과 이 무뢰한 가장의 아들딸들이 혁명을 외치며 틈만 나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고 가정을 해 보자. (주: 1987년 각목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민주화 데모였고 또다른 하나는 깡패를 의미했다.) 고함을 치고 돌을 던져야 하는 이 애 띤 우리의 딸과 아들들이 저 천진난만한 마음속에 아버지로 인해 무럭무럭 자라게 된다면 그것은 생각만 해도 섬 짓 하다.
그럼에도 나의 망막에 맺히고 있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영상, 저 아이들과 기세 등등한 젊은이들의 얼굴들이 뿌옇게 같은 자리로 엇갈리며 자리를 잡으려는 것은 웬일인가.
이것은 나만의 병일지 모른다. 나에겐 한동안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되어 앙금처럼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