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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출의 변 덧글 0 | 조회 16,869 | 2009-04-17 00:00:00
정동철  


- 불출의 변 -
1980년 전후의 글

몇 불출(不出)중에 하나라도 관계는 없다.
아내에게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공교롭게도 어느 교수님이 스스로 생을 끝냈다. 어떤 국회의원의 스캔들 때문에 부모들은 왈칵 놀랐으며, 가짜 선생님으로 학생들이 분통을 터뜨렸다. 뿐인가 아파트 뇌물 사건으로 가난한 마음을 아프게 한 시제(時制)에 나로 하여금 거기 떳떳하게 어깨를 펴고 말할 수 있게 한 내조자(內助者)가 됐음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주-1)
요약하건대 돈과 여자, 그리고 권력이란 낚시밥에 걸려 낭패를 만나는 난국을 사전에 막아주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만큼 나에겐 그 매력적 관심사에 넘어갈 가능성과 위험이 항시 준비되어 있었다는 반대어(反對語)가 되기도 한다.
다행히 아내는 내가 권모술수로 권력 언저리에 낄 위인이 못된다는 것을 일찍이 간파했다. 따라서 아파트 특혜자가 안된 것은 처음부터 얘깃거리가 못 된다. 여자에 대한 경계심은 뒤늦게 생겼지만 그것도 주변 인물들의 지조 없는 설왕설래가 원인이었으나 나를 자살로 이끌지는 못했다.
돈?
돈은 문제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아내는 돈을 좋아한다. 물론 나는 더 좋아한다. 그러나 목적은 다르다.
아내가 좋아하는 돈은 작고, 그저 아파트 하나를 살 정도에 있었다. 연탄에 손이 망가진다는 것은 그 나이에 결코 사치가 아니다. 그래서 34평에 소원을 겨우 풀었다.(주-2)
그렇다고 그것으로 소원 성취가 됐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아파트를, 증권을, 연립 주택을 굴려보겠다고 주문했던 것을 보면 욕심이 없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하나 그 무슨 딱지(아파트 입주권)를 사면 분명 얼마가 남는다는 선의(善意)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보면 아예 복부인(福婦人)의 현대적「아내」상(像)과는 거리라 크다. 숫제 그런 말부터가 가당치 않음이 분명하다고 나는 믿는다.
아내는 경제권이 확실히 남편에게 있어야 되겠다는 원칙에 동의를 하고 있다. 전근대적 보수성을 정당화하려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바로 그런 까닭에 나는 아직도 집에서 왕이고, 그래서 자신을 갖고 내 잘난 맛에 소꿉장난 돈벌이에 만족하고 산다.(주-3) 적어도 아내는 스스로 직업전선에 나서 남편인 나로 하여금 움츠러드는 열등감을 만들지 않고, 그렇다고 바보 같은 현모양처를 이기지 못해 불로소득 오로지 기도(祈禱)에 매달려 하나님의 은혜가 굴러 떨어지기를 바라는 넋빠진 그런 맹신(盲信)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주-4)
얼마나 자랑스러운 아내인가?
불출(不出)인들 어떠랴.
그녀를 사랑했기에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다. 난 아내의 정신과 육체적 건강을 바라고 있다. 그녀는 나에게 바로 그런 희망을 내내 저버리지 않은 것은 물론 오히려 소담한 선물로 되돌려주고 있다.
실로 고맙다는 마음을 간직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1) 1978년은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사원용 현대 아파트 특수 분양 사건(6월)·경상북도 敎委 중등 교사 자격증 부정 발급 사건(7월)·成樂絃의원 여고생 추행 사건(8월) 등 이른바 「3大 스캔들」이 한여름에 잇달아 발생하였다. 이 중에 경상북도 교위 사건에 관련된 피고인은 李聖祚 前교육감 등 1백21명으로 재판 사상 최고에 이르렀다. 한편 그 해에는 유신 2기 출범으로 朴正熙 대통령이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 취임(1978. 12. 27.)되었다. 아울러 정부는 대통령 취임 일에 金大中씨를 석방하고 金芝河씨를 無期에서 20년으로 감형했다. 서민은 멍청하게 입만 벌리고 있어야 했다.
(주-2): 빚 4백 만원(아내는 몰랐다.)으로 1974년 개원한 6년 후, 그나마 아내의 소박한 인내와 용기로 제기동 미주 아파트 34평이 마련되었다. 지지리도 못나고 가진 것 없는 나를 아내는 남편이라 여기며 따라준 것이 고마울 뿐이었다.
(주-3): 2003년 1월 정권인수가 진행되는 현재의 여성단체가 발칵 뒤집힐 얘기다. 한때 페미니스트라고 불려진 나의 의식이 이 정도라면 작금 결혼전 계약제를 주장하는 판국에 가당치 않다는 공격을 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
(주-4): 장인은 목사였다. 후에 큰 처남과 막내 동서가 모두 목사가 되었다. 아내는 결코 盲信者와는 구분이 완연했다. 그것은 2003년 현재도 마찬가지다. 권사가 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불신자인 나는 아내를 위해 설교를 듣고 있을 만큼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 아내는 <권사님>으로 통할 때가 많지만 사실은 집사에 조용히 안주하고 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