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수필
게시판 > 수상수필
여름 휴가 덧글 0 | 조회 16,115 | 2009-04-17 00:00:00
정동철  


- 여름 휴가 -

정신과 의사의 휴가가 일대 혼란을 야기한다는 글이 타임지에 소개된 적이 있었다. 장장 1개월 이상의 여름휴가로 지주상실(支柱喪失)을 갖게 된 환자를 두고 한 말이다. 어머니 치마폭에서 겨우 불안을 달래고 하루를 지내게 되는 그 숱한 어린양들을 놓고 일시에 너도나도 휴가를 가버리니 여길 가나 저길 가나 의지할 데 없이 방황하며 쩔쩔매는 노이로제 환자를 두고 한 말이다.
물론 미국 얘기다. 타임지가 밝힌 이면엔 그만큼 불안의 시대가 심각하다는 암시가 묻어난다. 자기들의 문명을 스스로 바륨 문화라고 자인할 만큼 신경안정제에 의존되어 있는 나라이니 짐작이 간다.(주-1)
그러나 우리의 사정은 어떤가?
오히려 인사를 받기에 멋쩍은 실정이다.
“선생님, 휴가가 없습니까?”
“피서를 떠나셔야죠?”
“선생님은 어떻게 바캉스를 안 가시나요?”
동정인지 위로인지 어쨌든 휴가는 그만큼 보편화된 모양인데 입장이 좀 바뀌어 버렸다. 아니 입장이 전도(顚倒)된 것이 아니라 마땅히 의사는 휴가 없이 환자를 돌봐 주어야 할 사명감에 철저해야 한다고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또 다른 의도가 숨어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뒤미처 그들은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선생님이 안 계시면 전 큰일나는 것 아시죠? 차라리 휴가는 몰래 갔다 오세요.”
분수없이 서구의 실정을 무작정 부러워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말 자기가 하고 싶었던 것을 계획대로 할 수 있는 그들의 휴가는 나와는 너무 먼 거리에 있다. 느긋한 휴양 속에 사색과 세상을 음미하는 가운데 남기고 싶은 말을 풍물지(風物誌)에 엮어낼 수 있는 휴가가 된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사치다.(주-2)
날이면 날마다 도시(都市)는 선(線)이라며 장단을 맞추려니 긴장을 늘어뜨릴 기회조차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겨우 4-5일 휴가를 얻어봤자 그 또한 선(線)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근로자의 연휴를 엄격히 따지는 노동청이 별스레 국립대학 의과대학 교수들의 휴가는 1년 통틀어 5일을 넘겨선 안 된다고 고집한다. 인턴은 아예 24시간을 근무하면서 노동자의 봉급에도 미치지 못하나 역시 모른 체 한다. 의사에게 8시간 근무제란 어불성설로 되어있는 셈이다. 한마디로 의사는 일해야 된다는 것이다. 달리 뾰족한 도리가 없다.(주-3)
하지만 그것이야 분수로 치자. 정말 문제는 다른 곳에 움트고 있다. 이른 바 <잎마름병>이다. 의사의 병이 아니라 체면치레를 하겠다는 사람들의 얘기다.
부랴부랴 누렇게 뜬 잎새 같은 모습만은 면하려 억지 바캉스로 시뻘건 몸뚱이를 과시하려 한다. 하지만 시들시들 메말라 떨어져 나가는 늙고 나약한 정신을 위장할 수는 없다. 말이야 기회 있을 때마다 학생과 환자들에게 강조한다. 적어도 휴가만은 자신의 관심과 흥미를 마음껏 연소시킬 수 있는 곳이자 것이어야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당사자들은 막상 그런 기회를 빼앗기거나 스스로 잃고 있다. 흥미를 잃어버린 자는 죽은 자와 같다고 한다. 이렇게 잘리고 저렇게 찢기고 다시 요렇게 덜어진 휴가를 손바닥에 쥐고 과연 어떻게 할 것인지 착잡할 뿐이다.(주-4)
“선생님 바캉스 다녀 오셨겠죠?”
뭐라 대답할까. 그냥 웃어버릴까. 아니면 몰래라도 다녀오는 것이 상책인가.

(주-1): 현대 문화를 약물 문화라고 한다. 약 없이는 하루도 버틸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뜻이다. 미국은 신경안정제, 바륨이 매상고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은 바카스, 독일은 심장약이 매상고 1위다. 속된 말로 미국은 미친 나라이며, 한국은 반짝 기분으로 사는 나라다. 독일은 현실주의를 강조하며 심장의 건강을 찾는다.
(주-2): 1970년대엔 해외 관광 자체가 불가능했다. 2002년 현재 관광 적자에 시달릴 정도로 해외 관광이 누구에게나 가능하여 달라진 풍속이 됐지만 그것은 의사만의 혜택은 물론 아니다. 사색을 담아올 그런 여유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고작 증명사진을 찍기가 바쁜 것이 관광이었으니까.
(주-3): 1978년과 2001년은 적어도 의사에겐 더욱 사회적 조건이 나빠지고 있다. 국가 보험 제도와 더불어 2000년에 시작된 의약 분업으로 의사에 대한 처우와 대우는 그렇다 치고 부도덕한 집단으로 치부되고 있는 형편이다. 의사만은 시장경제가 통하지 않는 유일한 대상이라 뻥긋거리는 자체가 용납되지 않는다. 2002년 2월의 현실이다.
(주-4): 휴가를 즐긴다는 것은 의사의 입장에선 사실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나마 세상에 의사만큼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대접을 받아야 하느냐며 면박이 심하다. 특히 시민 단체를 통해 쏟아지고 있는 적대감은 민망할 정도다. 2001년도는 유독 그 정도가 심해 대접은 아무래도 좋다. 이제 불신감만 조장되지 않아도 좋은 세상이라고 의사들은 말하고 있는 것이 2002년의 현주소다. 의사 자신을 위한 얘기만이 아니다. 치료가 올바로 되기 어렵다는 것은 환자의 몫이라 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