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수필
게시판 > 수상수필
거목은 자연에서 덧글 0 | 조회 15,923 | 2009-04-17 00:00:00
정동철  


-거목은 자연에서 -
제 59회 어린이날에

학교가 무서운 아이가 있다.
철수는 당장 누군가 한 대 쥐어박아 올 것 같아 두렵고, 영희는 피식피식 놀려 데는 것 같아 겁이 난다. 선생님은 언제나 우락부락 호통을 칠 듯 조마조마하고, 오가는 학교 길은 험상궂은 아저씨들로 들끓어 가슴이 뛰기 때문이다.(주-1)
그렇다고 집이 천국(天國) 같은 것도 아니다. 아버지는 말이 없다. 어머니의 잔소리는 손발과 같다. 이를 데 없이 편하지만 숨이 막힌다. 답답하여 발광 날 정도로 거추장스럽기 그지없다.
「일어났지? 세수했니? 말 안 하면 이 닦는 것 잊어버리겠지. 책가방 챙겼겠고? 학교 가서 또 전화하지 말고. 밥 먹으렴. 뭘 먹을까, 살찌는데, 그래 조금만 먹어라, 무거워 턱걸이도 못하면서. 숙제는 다했겠지? 준비물은? 그럼 조심해라.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고. 제발 깔끔하게 하거라! 선생님 말씀 씩씩하게 듣고. 남자는 울면 안되니까 싸우면 이겨라. 점심 먹을 때 손 닦는 것 잊지 말고…….」
「아이고 잘 다녀왔네. 옷 갈아입어야지, 시원하게 씻어라, 이 닦고. 뭘 먹을까? 살찌면 안돼. 숙제하고 놀아야지! 만화는 또, 제발 빠릿빠릿하게 덤벙거리지 말고. 근데 그렇게 느려서야 원 숙제가 아직도? TV는 나중에 봐라. 만수는 두 개 틀렸대. 창피하지 않니? 먹는 것처럼 그렇게 잊지 않고 빨리만 하면 될텐데. 조금만 놀아라. 찐득찐득한데 목욕하고. 이는 정말 닦아야지. 일찍 자야 내일 학교 간다. 가방을 모두 챙기고 자거라.....」
아이는 눈을 뜨고 잘 때까지 자기가 하고싶은 것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안다. 다만 잠 속에 꿈을 꿀 때만이 마음 대로다. 그러나 꿈에서까지 귀신이 쫓는데 발이 떨어지질 않아 애를 먹는다. 날 듯 날지 못해 낭떠러지에 굴러 떨어지기 일쑤, 밤이 무서워 몰래 언니 방으로 기어든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언행이 어머니의 말씀 따라 인형같이 다듬어지고 분장(扮裝)되어 결국 엄마의 말이 없으면 풀려버린 태엽같이 판단을 잃고 정지되고 만다. 어리벙벙 주눅들어 이리도 저리도 못하는, 그래서 기가 없이 안절부절 울보가 된다. 아빠와 엄마는 실망하고, 실망한 그 눈치 때문에 아이는 더욱 무서움에 질려 생명 없는 미니어쳐가 된다. 겉모양만 어른을 닮았을 뿐이다.
『대한민국의 씩씩한 어린이』
그때 비로소 정신과 의사를 황급히 찾게 되지만 벌써 시간은 엄청나게 흘러간 뒤다.(주-2)

원예사의 손으로 거목(巨木)이 됐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 아담하고, 예쁘고, 신기하고, 기기묘묘한 분재(盆栽)로 호된 값을 얻게 뒬 수 있긴 할지 모르지만 산야(山野)의 거목이 되지 못하는 것은 불문 가지, 나무의 주인이 나무 자신에 있는 게 아니라 원예사(사람)에 속했으니 그 나무가 본래의 나무가 될 까닭이 없다. 거목은 따라서 자연 속에서만 자랄 수 있을 뿐이다. 산삼처럼.(주-3)
아버지와 어머니와 그리고 선생님은 그 모두가 교육자들이다. 교육자는 그런데 원예사일까? 아이가 호기심의 가지를 뻗을 때마다 이리 자르고 저리 다듬어, 억지로 철사에 묶어 난쟁이로 만든다. 기괴한 모양에서 신기함을 만끽하는 원예사가 되어야 할까?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저격을 당한 후 최초의 의회(議會)연설에서 어린 소년의 편지를 낭독했다는 것은 우리에겐 생소하다.(주-4)
「……대통령 할아버지 빨리 나으세요, 그렇지 않으면 잠옷 바람에 연설하지 않겠어요……」
우주선 콜롬비아 호가 떠나려다 실패한 다음 날 아침 나의 막내 녀석은 아쉬운 듯 이렇게 말했다.(주-5)
“아빠! 콜롬비아 호가 떠났대. 아빤 봤어? 좀 기다렸다 잘걸―”
함께 배달되는 어린이 신문엔 분명히 어제 밤에 떠났다고 보도되었다. 비참하게 공중 폭발되고 말았는데... 허기야 배구가, 농구가, 또는 탁구가 어떻게 됐다는 기사는 예외 없이 어른의 신문보다 하루 늦게 보도되는 우리의 어린이 신문이고 보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중요한 사실은 아이와 시사(時事)에 관해 같은 시간대에 얘기할 수 없다는 점이다. 신문은 부모와 자녀 사이에 정보를 따로 보게 하여 이간질을 하는 셈이다.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화려한 하루의 행사보다 꾸준한 실행의 나날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바로 언론인에 의한 작품이 그렇다면 어린이를 위해 진지한 관심을 갖고 형식에 그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 빈말이 아닌가?
서5능(陵)으로 17개 학교의 소풍이 한꺼번에 몰렸다. 장터 놀이를 방불케 한 결과는 이른바 교육정책에 의한 부산물이다.
심신장애자의 해에 불행하게도 자살을 해야하는 현실은 비단 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수 없는 원예사들 때문에 빚어지는 매우 중대한 부산물임이 틀림없다. 엘리트라는 괴목(槐木)을 만들어야 뻐기는 원예사들이 우리 주변엔 너무 많다.
물과 햇볕과 그리고 나무가 필요로 하는 거름을 원하는 만큼 줌으로써 그 나무의 가능성을 한껏 꽃피게 하는 그런 엄마, 그런 아빠, 그런 선생, 바로 그런 원예사가 정말 우리 사회엔 없을까? 느낀 데로 생각하는 가운데 행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 신나게 뻗어 나갈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주는 어른이 정말 우리 주변엔 없어지고만 것일까?
부모와 사회는 그럼에도 한결같이 아이를 바라보며 거목(巨木)이 되길 간절히 바라고 원한다. 될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고 하였다.
온실에서 거목을 바라니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주-1): 2002년 현재 나는 面談室에서 어린 시절의 성폭행, 일진회의 공포, 유괴 등의 경험을 통해 꿈을 잃고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수없이 만나야 한다.
(주-2): 말 못할 자신만의 힘겨운 마음으로 와들와들 떨거나, 턱없이 난폭한 어린이를 만나야 하는 현실이지만 小兒정신과 의사는 힘겹기만 하다.
(주-3): 2002년 3월 서울의 강남 特區는 學院밀집지구로 집 값이 엄청 뛰어 稅務조사가 한참이다. 하향 평준화 교육정책으로 불거지는 사태를 稅務조사로 다스리려하니 모두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다. 그나마 근본대책도 아니니 안타깝다.
(주-4):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1981년 4월 저격을 당하여 입원했을 때 어린 소년이 쓴 편지다. 유머가 돋보이는 미국 어린이. 저격 사건 때문에 아카데미상 수상식이 세 번 연기된 그 세 번째 이유가 되었었다. 참고; 아카데미상은 1938년 대홍수로 7일간 연기됐고, 1968년에는 마틴 루터킹 목사의 피살 사건으로, 1981년에는 레이건 대통령 저격 사건으로 그 다음날에 거행되었다.
(주-5):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겠지만 80년대만 해도 주요 일간지가 발행하는 어린이 신문은 예외 없이 기사 내용이 하루라는 시차를 두고 있었다. 부자간의 대화가 원천적으로 엇나가게 만든 결과가 되었다. 그것이 언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