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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묻는다 덧글 0 | 조회 15,840 | 2009-04-17 00:00:00
정동철  


- 나에게 묻는다. -

인간 실제의 특수한 존재 방식을 강조한 사람은 하이데거라 한다.
물론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틈틈이 비집고 들어오는 그「존재 방식」에 대한 생각이 삭제될 수가 없다. 어쩌면 정신과 의사라는 자신의 역할이 그런 것을 더 강요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네댓 평 남짓한 나의 면담실에서 한 손에 턱을 고이고 울안의 곰처럼 맴돌 때가 많다. 퍽 오래된 버릇 중의 하나이지만 누군가의 방문이 거슬려질 만큼 그런 기분이 되곤 한다.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관계는 무엇일까?」
「그는 어째서 그토록 불안해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 의문은 어느새 환자로부터 나 자신의 문제로 뒤바뀌고 푸석한 발자국 자욱 속에 해답 없이 이어져 간다.
「나에게서 가장 소중한 관계는 무엇일까?」
아내인가? 아들인가? 딸, 형제, 친구, 돈, 명예, 권력, 학문, 섹스, 빵…… 무엇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으련만 그 어느 것에 가장 귀중한 의미를 부여해야 옳을지 그것을 몰라 왕왕 잠실행 지하철 속의 얼굴과 얼굴들 사이사이로까지 보따리를 안고 간다.
전철 속의 20여분은 그러므로 아주 긴요할 때가 적지 않다. 솔직히 그 때문에 지하철을 탈 때가 없지도 않은 것이 실정이다.(주-1)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맴돌다 돌고 돌아봐야 결국 철로 위의 쇠 바퀴인 것만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럼에도 문득 또 하나의 의문에 매달려 역시나 같은 짓을 되풀이 해보곤 한다.
「내가 믿을 것은 무엇일까?」
돈인가? 명예인가? 아들, 딸, 아내, 형제, 친구, 권세, 학식, 건강… 얼핏 믿음직한 듯 그러면서도 그것으로 꽉 차지 않는 마음 또한 어쩔 수가 없다.
「내가 죽을 때, 그렇다면 나와 함께 가는 것은 무엇일까?」
「……….」
「도대체 그나마 이것도, 저것도 나열조차 할 그런 것이 없단 말인가?」

예배당 안, 건너편 저 쪽에 한 노파가 한참 목사님의 열띤 설교를 듣고 있는지 아닌지 떨리는 손으로 지폐(紙幣) 한 장을 이리저리 다듬으며 찬찬히 펴가고 있었다. 왼 손과 바른 손의 주인이 마치 각각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그 손놀림이 어설펐지만 그 조화롭지 못한 움직임에 열성을 다해 그렇게 지전(紙錢)을 소중히 다루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연보를 준비하는 마음에서였다.
「무엇을 위해서일까?」
「무엇을 믿고 의지하는 것일까?」
「저 지전 한 장의 의미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마음의 굵고 깊은 주름살을 펴듯 그 한 장의 지폐를 통해 할머니는 만왕(萬王)의 왕인 구주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감사하며 그리고「내일의 영생」을 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예수를 믿고 있지 않다.
그 많은 의문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구주(救主)로 믿고 있지 않는 것이다. 한 달에 한두 번 아내를 따라 가난에 찌들려 무엇인지 절규하는 그 연약한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지 이미 한 해가 넘었지만 전적으로 나는 그를 믿어서가 아니다.
우선 나는 교리를 모른다.
솔직히 예수가 누구인지 그것을 모르고 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 으뜸이 사랑이라는 말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 의미를 정확히 모르고 있는 데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山是山 水是水)>(주-2)이라는 법어(法語)나, 물도 하나님이요, 산도 하나님이라는 뜻을 알 수 없는 마당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도시 가능성이 없을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좋다. 모여서 얘기하고, 노래 부르며 고락을 함께 하리라는 그 마음들이 좋은 것이다. 목사님의 인간적 정이 흐뭇하고, 반기며 웃음을 잃지 않는 그 모든 사람들이 그저 좋다. 성령과 악령의 구별을 깜박 잊고 체험되는 나름대로의 모든 것의 간증이 성령에 힘입어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는 그 기묘한 분위기마저 어떤 때는 그만큼 인간적 미숙한(?) 맛이 보여 그래서 좋게 느껴지기도 한다.
정말 그래서일까, 문득 해괴한 상상을 해보며 쓴웃음으로 이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예수가 어째서 한국 사람이 아니었을까?」
믿음(신앙)의 세계에서 울타리는 없다고 폴 틸리히가 강조했던 글귀를 보아 알고 있음에도 그와 같이 엉뚱한 생각이 스며들고 있는 자신에게 물어 본다.
「나는 무엇과 관계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주-1): 특히 종로에서 잠실로 가는 퇴근길의 지하철은 나에겐 매우 중요한 사색의 현장이다. 지하철 속의 사람들은 기억에 잘 담아두지 못할 것이다. 처음 개통되던 지하철이 출발하던 때를.
상서로운 여름비가 내리던 1974년 8월15일 오전 10시30분 경, 서울 청량리 지하철 역사. 오전 11시 정각에 열릴 역사적인 서울 지하철 개통식에 참석한 정부 요인들과 외교 사절들은 갑자기 날아든 비보에 아연 실색했다.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거행되고 있던 제29회 광복절 경축식에서 문세광이 쏜 총탄에 육영수 여사가 머리를 맞고 병원으로 긴급 후송돼 생사가 불투명하다는 전갈이 날아든 것이다. 당초 개통식을 주관하려던 박정희 前대통령은 긴급 수술을 받는 육 여사에게로 달려가는 바람에 불참했고, 호기심과 들뜬 마음으로 전철 시대 개막을 고대했던 시민들은 불안감으로 지하철의 첫 출범을 지켜봐야 했다.
그 후 나는 청량리 大旺코너에서 종로로, 그리고 잠실에서 종로로 오가는 지하철이 주는 삶의 현장에서 숱한 글과 강연, 그리고 치료에 필요한 인간 이해에 커다란 도움을 받았다.
(주-2): 이것은 1981년 1월 20일 조계종 이성철(1944-1993)스님이 취임할 때 취재진들에게 준 최초의 법어다.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아마도 부처님한테 물어본다면 정확할 것이다. 우리는 삶을 같이 했던 부처 한 분을 알고 있다. 이성철 스님이 그 분이지 싶다. 그가 끼친 영향력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유효할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담 성철 스님에게 불교란 어떤 것인가.
"내가 장 생각하는 쇠말뚝이 있지. 영원한 진리를 위해 일체를 희생한다. 이것이 내 생활의 根本자세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더러 책도 읽어보고 했는데, 그래도 불교가 가장 殊勝합니다. <불교보다 나은 진리가 있다면 나는 언제든지 불교를 버릴 용의가 있습니다. 나는 진리를 위해서 불교를 택한 것이지 불교를 위해 진리를 택하지 않았습니다.>"
이성철 종정은 82년 초파일 법어에서 말하기를 "극락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사람이 잠을 잘 때 꿈속에서 잠꼬대하는 소리와 같습니다. 불교를 노인들이 죽어서 극락이나 가려고 염불하는 종교로 잘못 알고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러한 생각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중이 목탁 치고 염불하며 명주고 福준다고 하는 것은 모두가 장사 속이며 거짓입니다. 이렇게 중이 부처를 팔아서 살기 위한 수단으로 방편을 삼는다면 이러한 중은 가짜중이고 도둑입니다. 이러한 중들이 사는 절은 도둑의 소굴입니다."
2001년 11월 현재 그에 관한 얘기는 中央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고 나는 불교 신자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집 없는 거지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