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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사람 모두가 연인 덧글 0 | 조회 15,685 | 2009-04-17 00:00:00
정동철  


- 나에겐 사람 모두가 연인 -

말들이 많다.
미친 사람들과 평생을 지나더니 결국 정 박사도 그렇게 된 것 아니냐는 것이다. 답답하다는 말일 게다.
나의 일과는 대체로 규칙적이다.
강연(講演)이 있는 날을 제외하면 판에 박힌 듯 변화가 없다.
새벽 네 다섯 시에 일어나 그 날의 일정을 점검한다. PC통신에 올라온 질문에 응답을 끝낸 후 원고를 쓰다가―실제론 두드리지만―6시 5분쯤에 단지 내 수영장으로 간다. 7시경 돌아와 일간지와 경제 신문의 관심거리를 훑어보다 다시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린다. 아침을 먹고 병원으로 향하는 것이다. 9시 30분. 옛날과는 달리 간호 조무사들 보단 으레 앞선다.
저녁 6시면 기계처럼 예외 없이 퇴근하여 맥주 두어 컵을 마시면서 아내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간 또다시 컴퓨터와 마주 앉는다. 9시 뉴스를 보고는 다시 제자리로 왔다간 자는 것이 전부다.
너무나 똑같은 일과가 로봇처럼 돌고 돌더니 급기야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눈을 뜨는 순간 텅 빈 공허(空虛)가 가슴을 할퀴기 시작한 것이다. 순간적인 느낌이지만 없던 일이다.
없던 일은 그러고 보니 여러 개가 더 생겼다. 똑 같은 시간에 수영장으로 가면서 도대체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하는 야릇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다행한 것은 갈 때와는 달리 수영장에서 나올 때는 퍽 잘했다는 상쾌함이 있다는 점이다.
한데 정말 있어선 안 될 일이 생기고 있다. 열쇠 꾸러미와 수영복 따위를 놓고 나오는 것이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그뿐이 아니다. 그렇게 반복되는 행태(行態)에도 불구하고 내 둥 면도기를 들고 들어갔다가 면도는 하지 않고 기분 좋게 나온 후, 그것도 집에 와서 아침을 먹고 옷을 가라 입으면서 거울 속의 까칠한 수염을 보는 순간 비로소 아차 하는 것이다.
좀처럼 놓고 다니는 성격이 아니었다.
마치 금덩이나 돈을 놓칠세라 잡다한 것까지 챙기는 것이 습성이었다. 챙기는 것은 물건뿐인 아니었다. 생각은 물론 심지어는 느낌이라는 것까지도 행여나 해서 메모를 하기 일쑤였다. 결국 귓가의 잔설(殘雪)로 노화(老化)를 읊던 시절과는 달리 기억력의 쇠퇴(衰退)는 물론 치매라는 말이 보다 익숙할 정도로 세상이 바뀐 것에 걸 맞는 모습으로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치매와 노망은 엇비슷한 말인데 깜빡하는 와중에 예나 지금이나 노화의 증거로서 고집과 노여움은 변함이 없는데 그것만은 이상하게도 놓지 않고 있으니 입방아에 오르내린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선생님은 그대로 에요. 더 젊어 보이 시네요. 근데 어떻게 절 그렇게 기억하고 계시죠? 참 대단하시네요.”
의료법(醫療法)상 10년이 넘는 병상(病床)기록은 일단 정리를 해도 상관없다. 그 후에 찾아오는 환자의 기록을 못 찾을 때가 있다. 그러나 용케도 그의 과거력(過去歷)은 머리 속에 잘 저장되어 되새기는 형편이다. 그쪽에서 보면 놀랄 수도 있을 것이다.
솔직히 그 점만은 나 자신도 신통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교적(社交的) 사람의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워낙 많은 모임도 그렇지만 전국(全國)을 돌며 강연을 하지 않은 곳이 없고, 함께 방송(放送)을 하게 된 사람도 적지 않는 데다 글로서 알게 되는 사람 또한 많은 터라 기억해서 손해 볼 사람들이 아니 것만 하여튼 머리 속에 남겨두지를 못한다.
무슨 까닭인지 생각해 봤다.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 하던 치료자(治療者)로서 결국 잊어선 안 되는 것은 열쇠 꾸러미나 수영복 따위와 욕심이 아니라「나에겐 사람 모두가 연인(戀人)」이라는 점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사실 환자들은 나의 연인이다. 혹시 척하는 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서 그들에 관한 것은 좀처럼 잊지를 않는 모양이다.
늙을수록 과거는 깡그리 잘도 기억하지만 코앞의 사건을 잊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그래도 치매는 아니겠거니 자위(自慰)를 하는데 설마 그렇게 믿는 것이야 틀린 것이 아니겠지?

(주): 아시아 선수촌 아파트 단지 안에는 스포츠 센터가 있고 넉넉한 공간과 공원이 있어 수영을 하고 산책을 습관적으로 하고 있었다. 95년 10월까지 10년을 살던 곳을 떠날 때까지 처음과 끝에 변화가 없었던 생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