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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의 진화 덧글 0 | 조회 10,458 | 2018-01-13 12:54:38
관리자  

오늘부터 당분간 2-3편의 수필(논설이 아님)을 동시에 올립니다.

살며 생각하는 오늘에 쓰여진 글에 이어,

이미 인쇄 출간된 지난 날의 수상중에서 입니다.

어제가 오늘을 관총하면서 내일로 이어지게 될 먼 리래를 그려며..

보잘 것 없는 개인적 수상들, 그래서 후미진 구석에 실게되는 이유가 됩니다.

게다가 시간이 없기에..

 

상식의 진화

- 변한 상식의 변할 진실 -

2018.01.10.

정신과의사 정동철

 

한국인의 뇌를 무작위로 해킹해보자.

혁명 뒤에 방송장악, 그게 이상한가? 상식인데? 혁명, 그 속성은 배신과 타락이란 의미가 내포되고 있단다. 역시 상식이다. ‘캠코더인사 상식밖이라고? 뇌에 그렇게 입력 저장되어있는 암호들인데 이상하다 여기는 사람, 그가 이상할 뿐이다.

상식이 변하고 변해 진화된 지금 지난 날의 상식이란 적폐를 말한다면 그건 형편이 좀 달라질 순 있을 것이다. 해킹된 뇌에 그런 암호는 없을 것이며 다만 진화의 방향이 문제될 것이니 그렇다.

 

어제의 일,

그저 밖의 공기, 그리고 흘러가는 물소리 거기에 파란 하늘과 속삭이며 걷고 싶었다. ‘편안한 화장실, 밖과의 경계를 위한 육각형 레고같은 창틀넘어 지나가는 버스며 차들 그리고 풍경 요술창구처럼 멀리 가깝게 바른쪽 왼쪽으로 이상하게 움직이는 그 창틀을 찍었다. 찍고 찍다 토끼굴을 나서자 찬바람 확 달려든다. 추운 듯 그러나,

- 와 시원하네... 이렇게 상쾌할 수가.. -

상식? 그런 생각 자체는 없다. 오랜만에 걷던 길, 아내와 함께 걷던 길로 들어선다. 다리, 몇 달만이지? 다리앞에서 냇물따라 내려가 멀리 돌았기에 이 다리를 건너 본 것은 오랜만이다. 숨 거칠어 마스크안 딱벌어진 입가의 흐르는 침 역시 편하다.

 

,Holly Butcher,27, 호주 는 지난 몇 달간의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할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내 생각을 적어봅니다. 27살에 골육종으로 세상 뜨면서 남긴 충고 "내려놓으세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생길 때마다 사랑한다고 이야기하세요.”

불만을 많이 느낀다면 정말로 문제에 닥친 사람을 생각해보길 바랍니다. 사소한 문제에 감사하고 그 문제를 극복하세요. 자신에게 짜증나는 일이 일어난 것을 인지하되 그것을 질질 끌어 남들의 하루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세요.  일단 당신이 영 짜증나는 상황에 직면했다면 그저 밖에 나가서 폐 안에 신선한 호주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푸른 하늘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껴보세요. 숨을 쉰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생각하세요. [출처: 중앙일보. 2018.01.10.]

 

상식일까? 슴슴한 소리? 그러나 나는 안다. 그래서 그렇다. 찬 바람이, 파란 하늘이 정말 좋다. 늙은이 낙상 조심하라는 눈, 사이사이 깔려있다. 피하고 조심, 활짝 웃는 하늘이 주는 바람 들이키며 걷는다. 이렇게 좋은 날들 왜 몰랐을까? 아침 6시면 출근하던 병원, 시간이 없었다. 파도처럼 밀려왔다간 가고 또 왔다가는 통증 힘겹지만 수술후 갖는 여유다. 나오길 잘 했지? 자신에게 던지는 말, 때에 문득 스마트폰-난잡한 광고 무슨 앱들 초기화면으로 가려면 애를 먹기에, 대리점으로 올라갔다. 몇가지 묻더니 담박에 해결 마음 예쁜 아가씨다. 별도 기기 가지고 오면 해준다 종일 소식없어 저녁늦게 가니 갖고 온 여분의 기기 인식되지 않아 최근 기기면 된다는 동네점포, 화가 아니라 상식이라 여겨 혹시 얼마? 기술의 차는 물론 상식 때문이다. 자신이 판 게 아니면 안해주는 것이 상식이니까. 진작에 알려줬음..

차려진 식사후, 비 상식적(非 常識的) 3()이 되어, 아내 스포츠외출 편할새 대리점에 올라가 고치고 이어 TV-10년 전 아내 여행돌아와 설치된 깜짝 결혼기념 대형 티비, 바꾸려 알아본다. 이건 상식인지 아닌지 원래 깜쇼로 아내 놀래기, 일전 찾고 보니 좋은 보석 35개라고, 3개가 없어져 몇 주째 혼자 꿍꿍, 결국 찾자 아즘마 의심한 자신 탓하길래 보석함 위에 종이학 3개를 올려놓고 이제 의심이 아니라 자신이 열었었는지를 확인하라고, 늙어서 깜빡 깜빡, 비 상식인가? 양가(兩家) 반대로 영()에서 시작한 연유 때문일까?

 

문대통력은 2017년 취임식때 밝혔다. “저를 지지하지 않은 분도 저의 국민으로 모시겠다”. 상식중의 상식 변할수 없는 상식이다. 국민들이 체감하고 있을까? 믿으려한다. 방탄소년들(BTS)이 떠서일까? 국민같은 애미(ARMY)가 환호해서일까?

 

왜 이름석자도 보이지 않는 딱딱한 연구소 웹, 그것도 후미진 구석 막다른 골목에 꼼지락 꼼지락 똑딱거려진 글 그것으로 나는 소통하려할까? 과연 사소힌 행복 공감? 해도 너무 답답한 늙은이, 워라밸(Work Life Balance)세대도 아닌데 대체 뭘 바라는 것일까? 젊은 세대의 우아한 가짜, 사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처럼? 내가? 난 아닌데..

홈피에서 병원사이트로 넘어가면 공감이란 도장같은 글씨가 나오긴 한다. 알긴 아는 듯 정작 공감이 뭔지 욱박지르면 그러나 할말 없다. 옛날의 상식은 변했고 변한 상식은 또 변해가는데 구닥다리 머리로 도시 어쩌자는 거냐면 정말 목이 막힌다. BTS처럼 흙수저로 공감과 소통, 진솔함과 개성, 디지털 자체이며 기부도 하는 친구들, 대통령도 그래서일까? 환호하는 만큼 심드렁 그렁그렁한 사람들 주변에 널리네. 웨일까?

 

작정 했다.

꼬고싶지 않다. 돌리고 싶지 않다. 있는대로 모르면 모르는대로 할말 하기로, 그래서다. 우선 수시로 떠다니는 머릿속의 이런저런 생각들 메모만 할 일이 아니라 밝히고 과거의 글을 쌍으로 올리기로 말이다. 뭔 뚱딴지같은 얘기냐고? 과거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먼 미래를 향해 살아가야겠기에 과거와 현재를 뚫고 미래로 가는 길을 찾아보겠다는 생각이다. 여기엔 반듯이 서로 대비되는 정반합(正反合)같은 개념으로가 아니다. 있었던 대로와 있는 대로를 봐 가려는 의미다. 과거는 이미 인쇄발표된 글들이다. 솔직히 쓰레기처럼 너무 많다. 출처정보는 정학하게 밝히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된 것들 주석을 단 것은 2002년 경이다. 출판을 하겠다고..

영화 1987년이 꿈틀거린다.

당시 언론은 팩트자체에 사명감으로 모두 하나가 됐었다. 상식이다. 분단국가의 또 분단된 나라 지금의 상식은 언론마다 팩트해석이 다르다. 저마다의 특색을 살린다는 것, 오늘의 상식에 맞다. 세계도처 어디나 같을 것이다. 현장접근성이 없는 대부분 나같은 사람들은 대신 무엇이 참인지 헷갈린다. 변한 상식인가?

치료자로 촌지나 선물을 받을 때가 있다. 상식이었다. 받지 않아야하는 데 말이다. 몇 달전 환자가 다소 큰 돈을 주었다. 받았다. 사양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며칠 뒤 남편과 따로 상담 그 돈을 돌려주었다.

부인께서 망상이란 증상으로 준거라 받은 것이므로 부인에겐 돌려받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마세요. 의사가 자신을 의심하고 미워한다 여길 것이니까요..”

나의 상식대로 내가 수술을 받고 고마워 촌지를 내밀었다. 거부당했다. 김영란법이 이유다. 변한 상식, 한데 변한 상식의 심각성이 엉뚱한 곳에서 꿈틀거린다.

촛불나라와 태극기나라 이건 완전히 다른 나라다. 분단에서 또 분단된 나라 그것을 설명해주는 언론을 보면 확실하다. 가장 흙수저에 가깝고, 가장 그래서 진솔하고, 가장 청렴하며 가장 나라를 나라답게 소통하도록 만들겠다는 청와대 거기 있는 사람들, 집 한 채에 탈세없이 논문표절은 물론 진솔함만으로 꽉 차있다고 해설하는가 하면 아니라고도 한다. 언론의 특색이자 특권이며 자유다. 정확하게 말해서 그 정도의 수준에서 그런 정도의 흠이 있다는 것 그게 그렇게 잘못된 것인가? 적어도 상식은 그렇지 않다. 흙수저들에겐 그러려니 그런 상식을 상식으로 받아들이며 살고있다. 그 상식이 변해야된다고 한다. 결국 상식이란 적폐를 고치기 위해 꾸준히 이어갈 거란다. 정말 변한 상식이다. 이상할 것 없는 상식의 변화 그러나 그게 언론마다 같지 않다. 전파방송은 엇비슷 신문은 완연히 다르다. 어느장단에 맞추지? 그런게 진짜 상식이겠거니 그러나 웬 일인지 벌렁거리는 사람들은 변방에서 늘어가고 있다. 적폐의 혼란?

 

 

러시아가 이념갈등으로 쇠망의 수렁에 빠져갈 때 당대 대표적 작가 투르게네프(1818~1883) 그리고 도스토엡스키(1821~1881), 톨스토이(1828-1910), 그 중 톨스토이가 무시한 푸슈킨(1799-1837) 동상제막식, 잔보를 대변하는 투르게네프에 이어 보스파 도스토엡스키가 강단에 섰다. 그의 말은 진리요 절대적이었다. 그가 무관의 황제시인 푸슈킨동상 제막식에서 한 연설가운데 한마디 때문이였다. 너무 활홀해 정신을 잃을 정도. 3천명 군중은 쥐죽은 듯 고요, 일시에 터진 함성으로 장내가 뒤집어졌다. 명확하고 명료했던 한마디,

서구파(진보)도 옳고 슬라브파(보수)도 옳다. 양 진영이 반목하는 것은 오해 때문이다. 러시아는 양자 모두를 필요로 한다. 완전히 러시아인이 된다는 것은 곧 모든 사람이 동포가 된다는 것이다.”198068일이다. (중앙선데이, S MEGAZINE 565.)

촛불과 태극기 어딘 혁명이고 어딘 조사를 받는 죄인이 아니다. ‘눈사태는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라는 나의 글, 더 필요한 첨삭(添削)이 있어야할까?

 

취임식때(2017) 밝혔던 문대통력의 한마디 저를 지지하지 않은 분도 저의 국민으로 모시겠다바로 성자가 되어 예언자처럼 나의 말은 진리요 절대적이니 따르라고. 행여 종교적 절대자를 믿으라는 건지 두량하기 어려운 사람들, 촌지를 준 환자처럼 망상적 의심에 갇혀있는 걸까? 진화하는 상식의 안개속이다. 워낙 세상만사 돈으로부터 시작된 성공과 부정의 갈림길 오락가락 헷갈려 이젠 그놈의 상식이런 걸 원망하는 지경에 이른다. 주변이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예언적 성자로..

분단의 분단을 막아야할 사람들은 어디에 있을까? 옳고 그름으로 환호를 기대해야할 시대가 아니다. 바로 절대자와 그 주변이다. 상식의 진화에는 습관의 고착화로 이어짐을 감지할 일이다. 청와대주변 586세대가 서울 올림픽 필사 반대에도 당시 역대 최대참가국아래 굴렁쇠는 굴러갔다. 오늘의 평창 찬성을 관통하면서 어떤 미래가 닥아올지 두렵다. 우주의 절대자 그것은 점압자(點粒子)(최초의 3, 한국판, 2005.). 너와 나의 삶 역시 점(유전자)속에서 시작됐을 뿐이다. 다같이 살기 위해서다말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지구촌이 감화 감동 세계에 없는 유일한 나라 똘똘뭉친 대한민국을 보여줄 때 평창은 평화로 이어질 것이다. ‘이치(理致)의 백치(白痴)는 없다. 모두의 행동만으로 증명될 뿐이다. 그건 상식이 아니라 이상일뿐이라 웃을 것이다. 바로 행동이 뒤따르지 않고 뒤로 가는 상식 때문이다. 상식의 진화? 지도자들의 조사모사로 남남분열이 유도된다면 그것은 상식이 아니다. 새마을운동과 함께 국산품애호란 구호만금 -Made in USA",를 찾기에 바빴었다. 인정받으려니까. 쓰지도 않고 쓸 사람도 없는 국산품애호국산품이 더 비싸다. 국민의식의 변화 그것은 질적 차별성을 바탕에 둔 상식의 진화일 것이다. 가능성은 그래서 있다. 도스토엡스키의 주장이 러시아 모두의 마음으로 이어질 수 있을 때처럼..

구름 한점없는 하늘이 아주 좋다. 여기저기 구름 흘러가는 파란 하늘 더더욱 너무 좋다. 우린 파란 하늘아래서 언제나 살았고 살며 살 것이다. 구름은 비와 눈이다. 사이사이 아니좋은가? 구름 한점 없는 완벽 그것은 찰라일 뿐이니까. (2018.01.10.)

 

  

 

 

 

 

지난 날의 수필 두편을 올린다. 주석은 저작일과 관계없이 2002년이다.

출판을 위한 것, 저작년도는 묶여있다. 논설이 아니라 수상임을 거듭 밝힌다.

아래 글에 수정 및 교정은 없었다.출처를 밝히지 못하는 것은 저장되지 않았기 때문,

워낙 많은 매체를 통해 발표됐던 것들이기에 그렇다.

  

외로운 톨스토이 석상(石像)

1989

정신과의사 정동철

 

외롭게 앉아있는 톨스토이 석상(石像)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의 단편집에 생생하게 숨쉬던 사랑이란 의미가 동면(冬眠)상태로 얼어붙은 채 고드름이 되어 모스크바 소련 육군사관학교로 꺾어지는 조그만 로터리 가운데에 그냥 그렇게 있었다. 동서고금, 체제(體制)를 넘어 너나할 것 없이 입이 열리기만 하면 모두가 한결같이 강조하는 사랑이 그의 석상(石像)처럼 사어(死語)가 되어 거기에 있는 것이다. 마치 그게 바로 현실이라고 일러주기라도 하듯 차갑게 그를 바라보는 나 또한 거기에 조용히 얼어붙어 있었다. 19866월의 어느 날이다.

전쟁은 정말 잔인하다.

총칼로 싸우는 전쟁은 말할 여지가 없다. 지금 경제적 전쟁을 통해 고사(枯死) 작전이 세계 곳곳에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사랑처럼 쓸모 없는 단어가 세상에 또 있는가 싶다. 단순히 쓸모 없는 소극적 의미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음흉하기 그지없는 위선자들이 평화(平和)를 표방하는 권모술수로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오히려 그 단어에 전율과 증오를 느낀다.

우리의 사회만 해도 그렇다. ‘사랑은 정쟁(政爭), 지연(地緣)이나 학연(學緣)과 심화되는 노사(勞使)갈등, 심지어 성폭력, 인신매매, 환락 등에 응용되고 있을 뿐 다양한 사치풍조에 편승한 각종 중독증(마약, , 도박, 종교, 비디오 등)은 물론 과잉보호에까지 위장(僞裝)되어 활용되고 있다. 얼마나 역설적이며, 그러기에 얼마나 기막힌 현실인가?

그래서인지 급증하는 작금의 우울증은 불가피한 현상인가 싶다. 병적 수준엔 이르지 않는다 해도 우울 내지는 허무와 무원(無援) 고립감은 두려움과 함께 현대인의 정신건강을 공격하는 심리적 주적(主敵)이 되고 있다.

사랑으로 위장하거나 포장되어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가는 발작적 집단 이기주의에 의한 히스테리는 그 여파의 결과일 게다. 사람이 인간적 자기완성의 길을 잃어버린데다 안락한 삶을 위한 편리한 기구(器具)를 추구함에 모든 열정을 쏟는 사이에, 당연히 느껴야 할 인간적 감정들을 잃어버리고 방황과 소외감을 감당할 수 없게 된 연유일 것이다.

나는 아주 특별한 이유로 불안과 우울한 여독(旅毒)을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공산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의 중심부 모스크바를 향해 유고슬라비아와 헝가리를 거치며 보고들은 낮선 경험을 정리하는 가운데 아직 그 후유증을 겪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백야(白夜)의 헬싱키나 레닌그라드(-1)를 통해 기존의 생체리듬이 깨져 버린 단순한 시차(時差)가 원인일 수 있다. 모스크바 공항을 빠져 나올 때 007의 대탈출과 같은 심리적 긴장감을 잊을 수 없었던 탓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궤적(軌跡)의 결과라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일까. 양대(兩大) 세력 사이에서 사회주의 공산권의 위태로운 진동(震動)이 동물적(動物的)으로 다가오는데 대한민국은 그 기수(旗手)를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아리송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1986년 모스크바를 향해 긴장과 흥분을 배 속 깊이 혁대로 묶고 공산권 여행을 시작했었다.

빈에서 유고슬라비아 국적 50인승 쌍 발 비행기를 탈 때, 반사적으로 다소 고르지 못한 숨통이 전신을 휘감고 있음을 느꼈다. 나의 신분(身分)을 보장해주는 유일한 장치는 여권(旅券)이 아니라 입국 허가증이라는 종이 쪽지뿐이었다. 솔직히 그래서 더욱 불안했다.

한국인이 처음이라는 드보르브니크 공항(空港)의 씨름꾼 같은 거인(군인이었다.)의 입국 수속을 끝낼 때까지 내내 팽팽한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환희(歡喜)도 슬픔도 처음 느꼈던 것이 변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는 법칙은 없다. 그 진리는 완벽한 중세 항구(港口)도시를 거닐면서 입증되었다. 사정(事情)이 바뀐 것이다. 긴장감은 사라지고 낯선 이국(異國)의 풍물에 쉽게 빠져들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아드리아 해안(海岸)의 진주(眞珠)라 불리는 드보르브니크 항도(港都), 성내(城內)를 서양인들과 함께 타임 머신을 탄듯 중세(中世)로 거슬러 올라가 떠들면서 시간을 잃어버린 나머지 미처 몰랐던 자유를 숨쉬고 있다는 사실이 감지되면서 바보처럼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던 탓이다.

대체 이렇게 아름다운 중세도시가 원형 그대로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것도 공산국가 안에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기왕의 입력된 나의 뇌를 의심해야 했다. 망원(望遠) 카메라는 어디를 향해도 무관했으며 가이드에 대한 질문은 제한이 없었다. 약속된 시간 이외(以外)엔 한 치의 여분도 없는 그 철저한 근무 교대가 생소해 보였을 뿐, 달라야 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언젠가 이 곳을 아내와 함께 꼭 오리라 다짐할 정도로 아름다운 중세도시, 훗날 스페인의 또레도를 함께 봤던 아내와의 여행은 전연 그 맛이 비교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알바니아 남단과 국경을 대하고 있는 성곽(城郭)에서 지평선을 향한 500m 쯤 지척의 우거진 섬 뒤편 바다 쪽은 나체촌(裸體村)이라 했다. 규모는 작았지만 또레도의 완벽한 중세도시보다 더욱 아름답게 세공(細工)된 듯 잊을 수 없는 항도(港都)의 주인공들을 상상하며 부지런히 메모를 잊지 않았다. 마침 성곽(城郭) 내 시계탑 앞의 광장에선 서방(西方)인의 영화 촬영이 한참이었다.

단아(端雅)알가지 호텔에 여장을 풀었을 때 내가 공산 국가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실감하기는커녕 세련된 침실 커튼에 감탄하며 자동 셔터를 눌렀다. 어느 쪽인가 분명 거짓이라는 혼돈이 밀려왔음이 틀림없다.

공산권의 여행은 그곳으로부터 본격적으로 북상(北上)하기 시작했다. 이미 밝힌 대로 여권(旅券) 대신 백지에 적힌 입국(入國)허가증을 믿고 모스크바를 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련 위성(衛星)국가(-2)중에 헝가리와는 달리 티토의 중립적 유고를 종단하는 버스 여행은 예측 불허라는 미지의 세계를 감탄과 감동, 그리고 놀라움의 연속 다큐멘터리로 이어졌다. 실제로 유고 역시 사회주의 국가였으며 우리와 국교가 없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결국 헬싱키 공항을 경유(經由)하여 레닌그라드에 도착했다. 레닌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공항은 초라했다. 그러나 언어학을 전공한 안내양(대학원 출신의 30대 주부)에 따라 알게된 레닌그라드는 공산 사회주의 종주국 수도(首都), 모스크바와는 전연 다른 엄청난 문화의 유산을 간직하고 있었다. 네바강()과 어우러진 놀라운 유적은 파리와 또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닥터 지바고를 연상하며 레닌그라드를 출발한 열차는 7시간만에 광야를 가로질러 이윽고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 감회는 너무 컸다.

 

하지만 잠시 사라예보로 다시 돌아가야겠다.

잊을 수 없는 명쾌한 가이드(-3)의 설명이 너무 진지했을 뿐 아니라 남겨야할 얘기가 워낙 많은 탓이다.

행여 눈에 보이지 않는 불길한 조준(照準) 렌즈가 나를 향한다 해도 감히 말할 것이다. 체제는 결국 민족의 뿌리에 박혀있는 종교와 문화와 삶의 숨소리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은 동서고금의 진리라는 점 말이다. 그런 뜻에서 스탈린과 레닌은 역사(歷史)앞에 결국은 마르크스의 무덤을 장식하는 퇴적물(堆積物)의 하나로 족할 것이라는 미묘한 생각이 스쳤다. 그것은 철의 장막(帳幕)속에 국한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진 콩코드 광장에 흘린 피의 대가(代價), 서울의 4.19 교훈이 주는 의미로 이미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마르크스와 궤를 같이하는 프로이트의 의식화(意識化) 논리는 사실 엄청난 것이었다. 그렇더라도 연연히 흘러 내려온 민초(民草)의 혼()이 완벽하게 감상용 꽃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선 생각이 같을 수가 없었다.

마르크스는 어쩌면 죽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프로이트의 의식화(意識化) 논리도 퇴조되고 있는 낌새다. 의식화의 사회주의적 이상주의는 어두운 그늘에 둘러 쌓이고 있었다. 민족의 혼()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다.(-4)

사라예보는 그런 점에서 뜻깊은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서로 다른 5개의 정교(正敎)들이 같은 구역(區域) 안에 공존하고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과는 달리 그러나 팽팽한 긴장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마치 시한 폭탄이 똑딱거리고 있는 고요가 불안하기만 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어떤 교회는 완전한 어둠과 고요뿐이었다. 실같이 가는 촛불의 행렬(行列) 만이 묵언(黙言)의 교감(交感)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들 예배(禮拜) 장소들은 결코 카메라를 허락하지 않았다. 왜였을까?

세계 2차 대전의 발단이 되었던 세르비아인의 총탄이 스친 벽돌과 저격수의 발자국을 각인(刻印)한 사라예보, 그들은 유고슬라비아라는 이름 아래 평화를 누리고 있는 듯 그러나 폭풍 전야의 음산한 기운이 감싸고 있었다. 그것은 외국인의 동물적 느낌과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들도 모르는 특별난 기운(氣運)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5)

티토 대통령의 대형 사진이 내려다보이는 홀리데이 인 사라예보의 저녁 식탁은 그러나 형편이 달랐다. 평생 잊을 수 없는 풍요로운 음식과 음악,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 인심(人心)은 모두가 푸짐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로 사는 것은 정치가(政治家)중의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국민은 빵으로 산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넉넉한 배려와 친절이 컸기에 그 때 그곳의 안락한 추억은 영원할 것이다.

유고의 수도 베오그라드는 어두웠다. 공산주의 사회의 특유한 냄새가 있었다. 그것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우리의 시멘트 도시가 뿜어내는 반응(反應)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도 서울의 시멘트는 낯이 익었기에 설지가 않았을 뿐이다. 총탄의 상흔(傷痕)들이 곳곳에서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우리는 전쟁중(戰爭中)!--

 

부다페스트로 가는 시골길 어디쯤인가 국경선(國境線)이 우리를 막고 있었다. 안내를 맡았던 가이드(-6)가 부지런히 오르내리며 긴장된 시간이 흘렀다. 우리들의 입국이 가능한지 상부와 의논을 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야한 포르노같은 잡지가 들키면 끝장이라 해서 이미 치워버렸지만 깊은 침묵 속에 비로소 여기가 사회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이윽고 조사가 시작되었다. 국경 경비 대원은 소름이 일 정도로 표정 없는 눈빛을 지녔다.

드디어 국경선을 통과했다. 유럽 제1의 호수 발라톤에 이르기까지 바다를 볼 수 없는 헝가리는 대신 파도처럼 오르내리는 들판이 있었다. 거기 곡식뿐 그러나 사람을 보기가 어려웠다. 그들의 땅은 놀랍게도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호수(湖水)가의 호텔은 여름철 만리포 해수욕장의 여관과 차이가 없었다. 욕조가 생략된 샤워장은 달랑 꼭지뿐이었다.

호수는 아득했다. 바다같이 컸다. 자살율 세계 제1을 자랑하는 나라, 바다 없는 나라이기에 지형(地形)마저 표정을 잃어 지루함이 생활을 9시에서 5시까지로 묶어놓았기에 집단 농장은 오로지 술로 억지 변화를 만들었는가보다. TV가 없다. 보헤미아의 기질은 좀이 쑤신다. 무료함을 달랜다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호수로 몰려든 관광객은 많았지만 그것은 헝가리 사람들이 아니었다. 자살이 많다는 것은 술과 더불어 인간 특유의 자유가 제한된 지형(地形)에 갇혀 폭발한 것이다. 나의 판단이다. 부다페스트에 이르러 사실은 분명해졌다.

파리의 그것과는 다르지만 구라파 성당 주변에 맴도는 혼령(魂靈)엔 차이가 없었다. 다뉴브강의 진주로 알려진 아름다운 도시엔 성당마다 높다 싶으면 크렘린 궁전의 별들이 똑같이 거기에 있었다. 신흥도시 베오그라드와는 차원을 달리했던 전통이 이미 변질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가이드가 말했다.

노동자의 봉급은 미국 돈으로 대략 250불 정도죠. 의사는 200, 그러나 의사를 만나기는 쉽지 않아요. 물론 웃돈을 주면 빠르고 편리하긴 합니다. 국영사업이라 모든 것이 덤이 없죠. 그래서 술로 달래는 것인지도 모르죠. 그러나 자랑스런 역사가 있어요. 그것이 그나마 이 나라를 지켜주는 버팀목일지 모르죠...........”

마차시성당 길(-7) 오르면서 마늘과 고추가 우리의 농촌처럼 똑같이 매달려있음을 봤다. 의아했다. 의문은 집시의 피가 흐르고 있는 저녁 식당을 가득 메운 낭만으로 멈추었다. 사람의 마음은 어딜 가나 결국 같음에서였다. 레닌그라드와는 달리 파리를 연상케 하는 구 도시, 부다(언덕)와 페스트(평야)를 가로지르는 다뉴브강은 양편의 아름다운 건축물을 가지런히 남겨두고 있었다.(-8) 스탈린의 별들은 상업지인 페스트에 주로 있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그렇다.

그 별들은 멀지않아 원래의 모습대로 없어질 것이라는 예감이 스쳤다.(-9) 가이드의 말 곳곳에 그런 의미가 섞여 나왔다. 명동 같은 번화가는 1800년대의 식당이 그때 그대로 즐비했다. 거기엔 사회주의가 없는 듯 했다.(-10)

--사람 사는 곳은 모든 것이 같다--

호놀룰루에서 배운 미국 정신과 의사 예슬러의 말이 그대로 살아있음을 보았다. 사람들은 이념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음을 보게 된 것이다. 척하는 것뿐 결국 천상(天上)의 울타리가 없다는 폴 틸리히의 말처럼 인간 심성(心性)엔 모든 것이 같은 피를 나누고 있음을 보게 된다.

어떤 형태로든 결국 사회주의 국가는 곧 악의 집단이라는 등식(等式)만은 일단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다페스트의 일급 호텔에서 여장을 꾸리고 헬싱키로 떠나는 날 사실 나는 그 같은 현실을 수정하고 다짐했어야 했다.

네바강을 끼고있는 레닌그라드의 엄청난 유산은 부다페스트와는 의미가 달랐다. 거대한 할리우드의 세트장 같았다. 그러나 이삭성당(-11), 에르미타쥬,(-12) 푸시킨 예술광장 등은 모스크바(-13)역의 푹푹 찌는 3등 대합실과 대조를 이루긴 했으나 역시 그들 문화의 유산을 유감없이 남기고 있었다. 어쩌면 과도기적 혼돈을 보여주고 있을 뿐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모스크바 크렘린 궁전의 짜리 대포, 붉은 광장의 성()바실리 사원, 그리고 지하철과 레닌 언덕의 모스크바 종합대학에서 스모그를 머금고 신비하게 펼쳐져 있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나는 기존의 생각을 수정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더욱 굳혔다. 결국 김포공항 입국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가방을 열어 보인적이 없었으니 더욱 그러했다.

그럼에도 우울한 여독을 쉽게 지울 수 없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나에겐 원래 고질적 병(?)이 하나 있다. 외국에 나가면 그 나라의 양면성을 짓궂게 캐어보는 습성이 그것이다. 특히 세상 사람들이 입이 닳도록 찬사를 아끼지 않는 나라일수록 흠을 잡아야 직성이 풀리고 그래서 카메라에 그 모습을 잡고 만다.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무거운 망원 렌즈를 메고 다니며 얻어낸 결과는 조금은 무서웠다.

--공산 사회주의의 임종(臨終)--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감지한 것이다.(-4) 갑자기 불안해졌고 그래서 우울해지고 말았다.

우리들 학생들의 격렬한 데모처럼 순진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설마 했었다. 사회주의 체제 아래에선 계급 없이 온 국민이 두루 공평하게 살게 된다는 그 제도적 요식(要式)은 분명히 잘 갖추어져 있었다.

우리는 행복합니다. 우린 문제가 없어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걱정할게 없습니다. 한마디로 행복한 거죠

옳은 말이다.

그러나 3개국 중 어느 안내원은 대답한다.

의사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 의사라고 했죠? 의사를 만나는 것은 힘들죠. 의료보장은 되어있지만 웃돈을 주어야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걸요. 그것도 높은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의사는 따로 있고 그들은 서민(庶民)이 만날 수 없습니다. 딴 얘기지만 모두가 그래요. 저도 그렇지만 근무시간만 때우면 하여간 되는데 야단스러울 것이 없죠. 게으른 것은 사실입니다. 의욕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요. 정성들여 일한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시간만 때우면 되는데.......”

레닌그라드 사도바야 거리, 내란과 혁명으로 죽어간 무수한 생명 위에 영원한 불꽃을 가운데 두고 네 귀퉁이 붉은 깃발의 색깔이 언젠가 조만간 바뀔 것 같은 예감이 섬광처럼 스친 것은 그리고도 많다.

나는 소련을 물론 모른다.

다만 계급이 엄존(儼存)하다는 사실을(-14) 통해 지극히 모래알 같은 체험에 의한 직관이 작동했을 뿐이다. 뉴욕의 할램가()는 그렇다치고 알지도 못하는 백인이 나의 뒷주머니 지갑을 간수하라고 타이르던 기억 속에 인권과 자유, 평등이 일그러진 것을 느꼈듯, 적어도 모스크바가 흔들리고 있다는 직감(直感)은 지을 수가 없었다.

스탈린이 레닌의 묘에서 뒤로 밀려난 것이 보이죠? 조만간 붉은 광장에서 아예 제거해야 된다는 그런 운동이 일고 있습니다.”

안내양은 따로 시내 관광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발레나 서커스를 구경하려면 이렇게 가면 되지만--지도에다 그림을 그려주며--그러나 돈지갑은 조심하세요

귀국한 지 며칠 안 되어 신문에 묘한 기사가 실렸다. 소련인이 말했다는 단서를 달고 2년 내에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울한 여독(旅毒)은 바로 여기에 있다. 새로운 피의 혁명이 일어난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미, 소 양 대국의 내부적 불안은 어느 쪽이든 세계 정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것은 결코 우리에게 안정된 역할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서방 7개국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갖가지 압력을 우리에게 가하고 있다. 하물며 소련 내부의 불안이 가중된다면 그것은 미국 내부의 불안에서와 다름없이 결코 방관할 일이 못된다. 게다가 사회주의 이념이 자본주의 체제로 돌아서려는 듯 제품을 완성하는데 급급하고 있다. 함께 못사는 사회주의보다 어쨌거나 잘 살 수 있는 길을 택해 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우린 어떤가?

프랑스 혁명 200주년에 피의 대가를 재()조명하는 이 현실에서 역사의 찌꺼기들을 뒤쫓고 있는 굿거리들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처지와 분수를 너무 모르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비난보단 조언, 고집보단 타협, 파괴보단 건설, 술수보단 당당한 서로가 필요하다는 실체를 터득해야 생존권이 보장될 둥 말 듯 한 현실이다. 하물며 물고 물리며 늘어지는 이 현실을 보노라니 무거운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기가 차다.(-15)

모스크바 공항을 빠져 나올 때 북한의 공작원으로부터 조금은 비아냥거리는 눈짓에 부딪쳐야 했었다.

--감히 여기까지 왔단 말이지, 성할 것인지 두고 볼 일이야--

마치 다문 입에서 그런 말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왜였을까?

남과 북의 현실이다.

북쪽을 사모(思慕?)하는 이념적 태도엔 그들만이 알고 있는 인간적(?) 동족간의 미묘한 감정을 외면할 수는 없었겠지.(-16) 하여간 모스크바 공항을 떠날 때 그 안도의 감정은 지울 수가 없는 것을 어찌하랴.......

그러나 프쉬킨 동상이 서있는 예술광장 오른편 철책에 수없이 걸려있는 이름 모를 작가의 그림 한 폭이 20불에 팔려와 나의 거실에서 인간의 내재적 영혼이 피의 사원으로 얼룩진 모습을 담고, 그것은 비단 사회주의 소비에트 연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일러주고 있는 듯 나의 얼굴을 빠끔히 지켜보고 있다.

참으로 묘한 기분이다. 톨스토의 사랑은 정말 살아있는 것일까? (1989)

 

참고: 주석은 2002년에 출판을 목적으로 달았다. 출판은 무산됐다.

(-1): 모스크바에 이은 러시아 제2의 도시다. 인구 약 4273(1994). 帝政 러시아 때는 페테르스부르크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1914년 페트로그라드(Petrograd)로 개칭되었다가, 1924년 레닌이 죽자 그를 기념하여 레닌그라드로 개명되었다. 그 후 1980년대의 개방화가 진전되면서 91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러시아의 옛 이름인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되찾았으며, 페테르부르크로 약칭하기도 한다.

(-2): 바르샤바 條約機構 Warsaw Treaty Organization(WTO); 서유럽 연합 결성(1954)과 서독의 NATO가입(1955)에 자극 받아 1955514일 소련 및 동유럽 7개국이 체결한 조약이다. 정식 명칭은 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이며 締約國은 소련알바니아불가리아헝가리동독폴란드루마니아체코슬로바키아였다.

참고로 ‘5566일 발효하였는데 알바니아는 68년에 탈퇴하였다. 소련을 중심으로 유럽권의 안전 보장 방식은 그때까지 옛 敵國에 대한 과도기적 안전보장조항(국제연합 헌장 107)에 바탕을 둔 것이 있으나, 이 조약은 법적인 기초를 국제연합헌장 제51조에서 규정하는 <집단적 자위권>에 두고, 공동 방위 체제를 형성했다. 체약국은 공통의 이익에 관한 모든 중요한 국제문제에 대해 상호간에 협의하고, 체약국 중 어느 나라에 대한 <무력 공격의 위험>이 발생한다고 인정되었을 때에는 상호 협의한다. 이 기구의 최고기관은 정치협의위원회이고 그 권위 아래에 통일 사령부가 설치된다. 이 기구의 행동 원칙으로서 독립 및 주권의 상호존중 및 내정불간섭이 명시되어 있다(前文8). 이 행동원칙의 적용은 헝가리 의거(1956)와 체코 의거(1968)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이른바 브레즈네프 독트린 내지 制限 主權論과의 관련에서 문제가 된다. ’85, 조약의 20년간 연장이 결정되었다. ‘897월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WTO 정상회담에서 각 동맹국은 <평등과 독립, 그리고 각국 스스로의 정치노선을 외부의 개입 없이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라는 합의문을 채택하였다. 같은 해 10월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사실상 폐기시켰다. ’9010월 독일이 통일되면서 동독이 탈퇴하였으며, 소련 및 동유럽 각국의 자유화에 따라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91년 해체되었다.

(-3): 드보르니크, 사라예보, 부다페스트, 레닌그라드, 그리고 모스크바의 사회주의 가이드는 모두 여성이었다. 그들은 대학을 졸업한 지식인이었으며 유창한 영어로 매우 진지한 설명과 열정을 보였다. 우리의 가이드와는 비교될 수가 없었다.

사라예보의 그녀는 지금 살아있다는 보장이 없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열정을 보여주던 야리야리한 그녀가 잊혀지지 않는 것은 2차 대전을 유발한 저격수의 자리에서 그때의 모습을 재현하며 웃겼던 이유도 있지만 이름은 잊었으나 그후 宗敎내전에 휩싸여 인간청소라는 끔찍한 사건으로 명복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4): 1989년 바츨라프 광장에 나타난 쏘련 탱크에 의해 프라하의 봄은 공중분해 됐지만 결국 예상대로 베르린 장벽이 1989년 붕괴되었다. 이어 1991쏘련이 해체되면서 프라하는 다시 살아있는 숨소리를 낼 수 있었다. 20007, 내가 찾은 바츨라프 광장 어귀엔 대장장이가 집안의 장신구를 열심히 뚜드리며 힘찬 사람의 소리를 내고 있었다. 광장 언덕 위는 스탈린의 별 대신 피아노 박자기가 깔딱거리는 좌우 대칭의 움직임으로 삶의 맥박을 알리고 있었다.

한 민족의 心魂은 체제로 좌우되지 않는다는 증거다. 프라하의 모든 것은 이미 유네스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래서만은 아니다. 그 점에선 부다페스트도 마찬가지다. 한데 현재 우리의 집권당에 의한 국민의 정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왜 저들이 몰아낸 이데올로기를 기필코 移植(?)하려 하고 있는지가 의문이다. 중도 좌파의 제3의 길(中央日報 주최 앤서니 기든스의 강연, 호암아트홀, 2001.7.9.)을 위해서일까?

(-5): 결국 종족 말살이라는 혹독한 종교 전쟁이 터지고 2001년 드브체크의 종말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가려 옛 사라예보의 음산한 기운은 조용히 수면 밑으로 가라앉고 있다.

(-6): 쾌활하고 성의를 아끼지 않는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가진 청년, 드보르느니크에서 부다페스트까지 同居同樂 했다.

(-7): 해발 220m의 옛 王城의 유적지 위에는 웅장한 마차시聖堂삼위일체 동상을 앞에 두고 서 있다.

(-8): 프라하처럼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의 문화유산을 간직한 다뉴브 강변의 보석 같은 도시다. 다뉴브의 진주 또는 장미로 불리는 부다페스트는 19세기 중반까지 다뉴브을 경계로 부다(언덕)와 페스트(평야)로 나뉘어 있었다. 1872년 함스부르크 왕가가 번성할 무렵 위대한 헝가리으로 추앙 받고 있던 세체니伯爵이 다뉴브강에 체인교를 완공하자 부다페스트가 탄생했다.

(-9): 구 소련 멸망 후 실제 그 별들은 없어졌다.

(-10): 그 시대엔 실제 없었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들의 피 속에 흐르는 낭만은 이데올로기가 변질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1): 쌍트 페테르브르크에서 인공적으로 제일 높은 곳으로 이삭聖堂을 뽑을 수 있다. 이 성당은 1818년부터 1858530일까지 50만 명의 노동자를 동원하여 세계 최대 성당 중의 하나를 만들어 놓았다. 네 번째로 큰 성당이다. 베드로 성당과는 달리 의자가 없는 러시아 정교로 총 수용 인원수는 14000여명 정도가 한꺼번에 예배 볼 수 있다. 내부에는 모자이크화 62, 300개 이상의 부조로 성당을 장식하고 있다.

(-12): 에르미타쥬는 페테르부르크의 가장 문화적 가치를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런던의 대영 박물관, 파리의 루블 박물관과 함께 세계의 3대 박물관으로 손꼽힌다. 전체의 전시실 수는 1050여 개에 걸쳐서 전시되어 있으며 총 전시실을 걸어서 본다면 27Km를 걷는 것과 같다.

(-13): 모스크바 역이나 호텔은 당시 모두 페테르브르크에 있었다. 역시 모스크바 역은 건물의 예술성과는 달리 그 내부는 10년 전 가난을 상징한 우리의 3등 대합실을 연상케 했다.

(-14): 나는 철저한 階級사회라는 점을 보았다. 크렘린宮殿 입구에 이리저리 쫓기며 10~15배의 달라가 거의 공공연히 거래되고, 창녀가 줄기차게 따라붙는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호텔 입구엔 내국인은 들어오지 못했다. 외국인과 동행이 가능했지만 통과세를 내야했다. 창녀가 경비원에 주고 남는 화대는 겨우 20불도 안 됐을 것이다. 사회주의에선 있어선 안 되는 현상이었다. 프시킨 동상 옆의 당시 레닌그라드의 몽마르뜨로 통하는 곳에서 그림 한 점을 샀다. 20불에 불과했다. 그것은 지금도 나의 거실에 있다.

(-15): 2002129일 연두교서에서 미국의 죠지 W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악의 축에 포함시켰다. 국민의 정부와 한나라당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인지 모두가 공격성에만 매달리고 있는 느낌이다. 김 대통령은 북한의 입장에서, 이회창씨는 보수정당(?)의 총재답게 최근의 訪美中 부시 대통령과 를 같이 하는 느낌이다. 함석헌옹은 생전에 정부와 처절한 싸움을 하면서도 결코 외국에 나가선 정부를 헐뜯는 일에 인색했었다고 한다. 누워 침 뱉기라는 뜻일 것이다. 國益이 우선하는 세계 속에 생존권을 강구할 일일 것이다.

(-16): 북한의 主體사상을 어떤 형태로든 대변하는 學生단체를 앞세워 굿거리가 난무하는 ‘80~90년대 초의 우리 사회는 일종의 혼돈과 같은 것이었다.

 

 

겨울 공포

1986-1990

정신과의사 정 동철

 

인천항이 얼어붙었던 63년 겨울, 그 해 13일 하와이를 향해 아내와 헤어져야 했던 김포 가도의 눈보라는 춥지 않았다.(-1)

둘째 아이를 낳던 6517일 하느님을 외쳐대며 응급 처치를 위해 달리던 춘천 약사리 고개의 눈보라 역시 춥지 않았다.(-2)

잊혀지지 않는 겨울은 정작 계절을 초월한 채 나의 앞에 지금 오만하게 뇌리를 마비시키며 몰아 닥치고 있다.

중공군이 들이닥친 1951년의 겨울, 정처 없이 떠나야 했던 14후퇴의 피난길에서 어린 마음은 그때도 춥지는 않았다.(-3)

그해 39일 서울로 다시 복귀한 국군의 뒤를 따라 새술막(지금의 성남시 고등동)에 이르자 염병(장질부사)을 치르기가 무섭게 부산행 화물열차에 실렸을 때, 그때 나는 비로소 겨울을 느꼈다.

4월이었다. 분명 겨울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에겐 잊혀지지 않는 영원한 겨울로 남아 있다.

나는 본시 미지의 세계를 무척 좋아했었다. 용산역에서 인천으로 달리는 기차를 탈라치면 으레 승강구에 매달렸다. 나이 12, 영등포를 지나 오류동으로 향하는 철로 어디선가에서 시흥 쪽으로 곱게 뻗은 왕복 2차선 긴 철길을 바라보면서 꿈을 키웠었다. 굴도 다리도 없는 경인선 철길, 그나마 외길로 답답하게 달리는 것에 진력을 느껴왔기에 언제나 그곳은 아쉽기만 했다.(-4)

그런데.

바로 그 선망의 철길에 올랐으면서 정작 나는 와들와들 떨어야했다. 4월의 밤은 추웠다. 4월은 보슬비가 촉촉했다. 뚜껑 없는 화물차. 그나마 덩그러니 홀로 갇혀있는 그 화물열차, 그렇게도 보고 싶어했던 철길 가의 산천을 잃은 채 쥐덫에 갇힌 생쥐처럼 나는 이 구석, 저 구석 웅크리며 떨어야 했던 것이다. 그뿐인가. 더욱 떨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공포였다.

그 화물칸은 누구도 타서는 안 되는 군용 열차였다. 감히 민간인(民間人) 어린 생쥐가 탈 수 있었던 것은 미군을 속이는 특별 기회였다. 역마다 미군들은 플래시를 이리 흔들고 저리 비췄다. 무서운 공포, 군용 화물 열차는 밤을 이용하느라 유난히도 역마다 오래오래 머물곤 했다.(-5)

잊을 수 없었던 겨울.

계절을 초월한 채 유별나게 떨었던 그 뚜껑 없는 화물 열차. 그 때의 추위는 어린 나에겐 너무 가혹했다. 감시의 공포와, 눈과 입이, 그리고 손과 발이 화물칸에 갇혀 있었기에 더욱 무섭게 떨리기만 했었다.

35년이 지난 지금, 나이 쉰 살이 넘었건만 계절을 초월한 추위로 마음을 움켜잡던 버릇(?)은 없어지지 않고 별안간 재발되고 말았다.

그것은 눈앞에 펼쳐지는 나의 조국, 나의 산하(山河)가 계절과 관계없이 누군가 우악스런 수중에 얼어붙어 가고 있었기 때문인가 보다.(-6)

언제쯤, ! 언제쯤에나 <서울의 봄>(-7)이 어린 시절에 얼음같이 박힌 차디찬 대못으로 그 잊을 수 없었던 겨울의 공포를 녹여줄 수 있게 되는 것일까?(1986~1990)

 

참고: 주석은 2002년에 출판을 목적으로 달았다. 출판은 무산됐다.

(-1): 인천항이 얼었다는 무지막지한 개항 이래의 추위였다. 하와이에 있는 트리플러 육군 종합병원 정신과에 OJT(On the Job Training)로 떠난 것은 바로 그 무섭게 추운 겨울이었다. $180을 받고 한국에선 육군 중위의 봉급을 고스란히 그대로 아내가 수령하는 경사 때문이었나(?) 눈보라의 칼날 추위를 실감하지 못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내와 해어진다는 사실이 감각 기관을 마비시켰을 것이다.

(-2): 아내가 출산과 더불어 대 출혈이 일어나자 생사의 갈림길을 헤집고 눈보라 속을 달리던 공포의 시간. 매서운 춘천의 추위를 느꼈다면 그것은 허구였을 것이다.

(-3): 충남 마곡사 유구 입구에서 무자비하게 나무를 잘라 지게에 짊어지고 오던 춥고 배고픈 피난 시절이었다. 하지만 저항보다는 운명에 순응하는 순박한 마음이었다. 추위는 자연 그것이었다.

(-4): 누님이 인천에 있어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툭하면 가곤 했다. 누님의 경제적 도움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5): 1952년 누님의 친구의 남편이 헌병 사령부 총 지휘관이었다. 화물열차의 기관사는 6촌 누나의 남편이었다. 덕택에 나는 고1에 해당하는 나이에 수원에서 차가운 북극성을 바라보며 어머니와 헤어져 화물칸에 탔다. 친구 賢雨1974년 개원을 하자 이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펑펑 흘렸었다.

(-6):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되자 전두환씨에 의해 또다시 이 산하는 군부의 수중에 들어갔다. 잠실 미주 아파트에서 보이는 남쪽 산하를 보며 입이 봉해진 자신을 한탄하고 있었다. 느끼며 했어야 할 말을 알고 있음에도 하지 못한 기막힌 자탄의 시기는 아무리 버둥거려 보았자 누구 하나 눈여겨보는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

(-7):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 자유화 운동에서 유래된 프라하의 봄에 비유된 표현이었다. 이 운동을 막기 위하여 불법 진주한 소련군의 탱크로 프라하의 봄은 산산조각이 났다. 서울은 아예 원천 봉쇄된 원초적 낙원(?)이었다.

 

 

이제는 진실을 이야기 할 때

1986

정신과의사 정동첧

 

선생님 꼭 한가지만 말하세요. 뭐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있지 않아요, 한가지만 해 드릴게요. 정말이에요.”

……

어려워 마세요. 선생님은 정신과 의사이니까 내가 누구인지를 벌써 알았을 겁니다. 기회는 지금 뿐이에요.”

……

너무 조심하시는 것 같군요, 말씀하세요. 정신병원을 하나 만드시면 어떨까요. 아니, 종합병원을 만들지요? 정신병원은 돈벌이가 안 될테니까...... 그리고 병원 이름은 국풍으로 하십시다. 국풍(國風)병원, 그것 아주 멋지지 않습니까?”

……

그러시죠, 선생께서 국풍 병원 원장이 되는 겁니다. 좀 말재주가 없는 것 같지만 대머리가 되어 그만하면 원장 자격은 있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는 것으로 아주 해 버립시다.”

 

나이 이제 스물 여섯. 대학을 세 번인가 연거푸 실패한 165cm정도의 자그마한 젊은이, 그와 함께 앉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민망스러워 사뭇 나의 눈치를 보면서도, 한편 이렇듯 황당한 자식을 이제 어쩌면 좋겠느냐는 투로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젊은이의 병명은 관심의 초점이 아니다.

과대망상(誇大妄想)(-1)이라는 증상을 갖게 된 이 청년의 의식 상태가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그것이 중요하다.

사람은 따지고 보면 저마다 제 잘난 맛에 산다. 그것이 없다면 죽은 목숨과 다를 것이 없다.

조상을 들먹이며 하다못해 양반의 뿌리를 내세워서라도 뭔가 뻐길 거리를 만들어야 할 말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아무리 근거를 잡으려해도 걸칠만한 것이 없는 사람이 있다. 그 흔한 사돈의 팔촌도 힘쓸 사람이 없는 것은 물론 그런 사람을 알고 있는 원근 친척마저 없는 것이다. 내세울 것이 없으니 어깨를 펼 수가 없다. 얼굴은 언제나 땅을 향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기 그지없다.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도리밖에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흔한 대학도 못 가고, 키가 큰 것도 아니며, 돈마저 궁하니 노상 그늘에 숨어 눈치를 보기에 급급할 뿐이다.

속이 상한다. 울화가 치민다. 분통이 터진다. 한바탕 세상에 무슨 변이라도 생겼으면 싶다. 인지상정일지 모른다.

 

머리는 우수한데 돈이 없었으며, 빽이 없어 무시를 당하다보니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원통하다. 비록 키는 작아도 몸과 마음 모두가 다부지다. 작은 고추가 맵다고 했다. 나폴레옹도 작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크지는 않았다. 밀어주기만 했던들 서울대학은 문제가 안됐을 것이다. 뛰어난 머리를 갖고도 못내 꽃을 피지 못하고 오히려 수모만 당하고 살았다. 대체 숨통이 막혀 견딜 수가 없다. 젊은이는 말하자면 이렇게 스스로 써내려 간 음지의 소설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신문에 그 무슨 국풍(國風)이라는 회사가 생겼다고 법석을 떨더니 얘가 저렇게 변했습니다. 비행기 회사를 만든다나요? 수도 없이 많은 회사를 거느린다는 젊은 사람들이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나서입니다. 며칠 동안 잠도 안자고 골똘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병이 되고 말았죠. 그러고 보니 그 언젠가 여의도에서 국풍(國風)이라는 잔치에 다녀와서 좀 들떠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2) 어쩌면 좋겠습니까. 병은 분명하죠? 나을 수 있을까요? 제발 고쳐주셔야 되겠습니다. 그래도 아이는 영리하고 머리가 있습니다. 불쌍합니다. 남들처럼 뒤를 힘껏 대주지 못한 부모 죄지요......”

--언청이 아니면 미인이겠지--

과대망상의 원인은 기본적으로 젊은이 당사자의 정신 병리(病理)에 서 비롯된다. 열등감을 극복하여 그 아픈 마음을 희석하려고 지나치게 허세로 둔갑하게 되는 심리가 문제였다. 거기에 불을 붙인 것은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병폐가 그 배경을 설정하고 있다. 과대망상이라는 열매가 있기까지엔 당사자의 씨앗이 문제였지만 사회라는 밭과 그 씨앗을 가꾼 부모가 모두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다.

 

망상은 시대에 따라서 바뀐다고 한다.

그 사회의 가치관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 해방과 더불어 너도나도 한 자리하겠다고 들떠 있을 때 정치적 과대망상이 생겼다. 전쟁이 일어나 모두 허기진 배를 움켜쥐느라 빈곤망상(貧困妄想)이 뒤따랐다. 전쟁이 끝나자 사상이 화두가 되자 사상(思想) 망상이 횡횡 하더니, 막강한 중앙정보부의 위력에 이리 몰리고 저리 쫓기는 가운데 피해(被害) 또는 추적(追跡) 망상이 주종을 이루었다. 이제 성()의 자유화 물결을 타고 부정(不貞)망상이 판을 치고 있다. 아울러 너도나도 이데올로기적 혁명 사상이 젊은이들에게 유행(?)처럼 번지면서 예의 한바탕 과대망상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3) 그것은 사회적 병폐가 어디에선가 유혹을 하고 있는 증거다.

해답은 우리 모두가 이젠 진실(眞實)을 얘기하고 들어야 할 때라는 점에서 찾아야 하지 싶다. 서로 믿을 수 있는 세상에 살아야 할 때라고 각성(覺醒)하는데서 찾아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특히 언론의 책임은 크다고 생각된다. 얼마 전 조선일보의 어떤 논설위원이 언론과 비어(蜚語)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다.(-4)

기상대(氣象臺)내일은 맑은 날씨라고 발표했다면 신문(新聞-언론)은 이를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하면서, 만일 기상대가 실제와 달리 발표를 거짓으로 맑다 하였다 해서 내일은 흐린 날씨라고 보도하지는 못할 것이라 했다. 그러나 기상대에 이상이 있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 단순히 내일은 맑다고 하는 것은 신문의 도리는 아니라고 했다. 맑은 날씨를 보도한다면 거기엔 사실성의 문제가 있다는 단서(但書)를 밝혀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뒤미처 구속되기에 이른 국풍(國風)이란 허황(虛荒)된 회사의 발표를 어쩌면 그렇게도 대서특필할 수 있었는지 그 언론에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는 논리는 그래서 가능한 것이다. 밝혀야할 진실은 어떻게 하고, 그저 아리송하다 싶은 낌새만을 통해 거짓된 기상대(회사)의 발표를 아무런 단서도 없이 보도할 수가 있었느냐 하는 얘기다. 젊은이의 마음을 공중에 들떠버리게 한 기사(記事)가 되고 말았다는 뜻이다.(-5) 정신과 의사로서는 그 이상 머리를 굴릴 능력이 없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느낌을 갖는다.

거듭 반복한다. 우리는 이제 어찌됐든 진실을 말해야 될 때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 진실(眞實)이라는 의미다. 철학적 진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무시하겠다는 뜻도 아니다. 하지만 대중적(大衆的) 서민이 살아가는데 사실을 사실대로 알 수 있는 그런 소박한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6) 따라서 그 청년의 망상을 사회가 모두 책임지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청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만이라도 솔직하고 진실 되어야 한다. 덩달아 허풍을 떨어 장단을 맞출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춥고 가난해도 자신의 현실은 현실일 뿐이다.

젊은이가 그것을 인정할 때 자신의 진정한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현실에서 피와 땀으로 소망을 하나하나 성취하는 자신과의 진실한 싸움만이 절대적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럴진데 거기에 감히 과대망상이라는 허구가 발붙일 곳이 있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7) (1986)

 

참고: 주석은 2002년에 출판을 목적으로 달았다. 출판은 무산됐다.

(-1): 허풍을 떠는 애교가 아니라 자신의 현실과는 다르게 대단하다고 믿는 생각, 결코 그 믿음은 종교 이상의 것이라 오해와는 다르다. 당연히 설득으로 교정되지 않는다. 증거를 대도 그 자체를 의심할 뿐이다.

(-2): 군사 독재 정부가 대학생들을 회유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