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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딱딱이」 덧글 0 | 조회 10,229 | 2018-01-21 16:24:56
관리자  

지난 번에 이어 1편의 수필(논설이 아님)을 동시에 올립니다.

살며 생각하는 오늘에 쓰여진 글에 이어,

이미 인쇄 공개된 지난 날의 수상중에서 입니다.

어제가 오늘을 관통하면서 내일로 이어지게 될 먼 리래를 그려며..

보잘 것 없는 개인적 수상들, 그래서 후미진 구석에 실게되는 이유가 됩니다.

게다가 시간이 없기에.

 

 

 

달빛 딱딱이

2018.01.21.

정신과의사 정동철

 

 

전쟁이라도 났나? 세상이 뒤집혔나? 어렵사리 끊었던 작년(2016) 12월 신문, 다신 보지 않았어야할 세상, 신문, ‘달빛 기사단(記事團)-중앙 2018.01.21.)과 평창-결정될 때 아내와 둘이는 말했었다. 우린 무관한 행사, 죽었을 테니까.’으로 솔직히 어지럽다. 뺑뺑이 돌려진 탓.


1950년 겨울 12, 열 다섯살이였다.

하얀 달빛아래 논두렁 미끌미끌 ~~’ 넘어지며 겁에 질려 걷기만 했다. 추위? 눈덮인 하얀 달빛아래 자빠지고 비틀거리며 ~아버지 대신 도는 야경, 뛰놀고 자란 고장 아닌 피난살이 새술막(현 성남시 수정구 고등동, 양자로 간 아버지의 고향)이라 누구로부터 뭘 지키려 마을을 도는 딱딱이인지 그건 알수가 없었다. 밤이지만 달빛 눈만 하얗다는 것, 행랑만이 어른거렸다. 차례를 기다리는 쉼터 아랫목에 쭉 뻗었던 다리 따끈한 아랫목에 참았던 숨 거칠게 뿜을 때 편스레 웃어주는 아줌마의 손국수 뜨끈한 야참이 너무 좋았다. 퀘퀘하지만 아늑하게 감싸는 방, 하지만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그 딱딱이 정신’. ‘, 북중 접경지역 경계 강화대형 난민수용시설 가동 준비-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21/2018012100354.html 1950년으로 되돌아가는 건 아닐까? 한데 달빛 딱딱이왜 나섰지?

 

2018121달빛 기사단에 멍 떼린 딱딱이 정신’, 마치 숨었던 인민군을 상상했던 그때 그시절의 느낌이 솟구쳤다.(내가 처음 만난 인민군은 탱크에서 나왔고 그는 이내 알던 형처럼 또래에 둘려쌓여 장졸임인가 그 시절에 그 귀한 고기를 나누어 준 듯.) 차리고 보니 폐암과는 상관없이 조이는 명치, 뒤미쳐 스마트폰엔 텡글텡글 제철 모듬 조개찜에다 석화 굴에 소주 겯들인 야식, ! 예날의 그 악몽은 아니었구나. 다만 세월의 무상함이라! 주일 새벽 540분이다.(아내 때문에 붙인 주일’)

 

살며 참 쓰기도 많이 썼다. 돈 말이다. 못지않게 쓴 돈 잣대가 시원치 않아 가늠하기 가없을뿐 그저 엄청날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도 쉬지않고 쓰고 있는 중이다. 돈은 시간, 시간이 곧 돈이라 하니 그 시간이 그렇다는 것이다.

허루가 아니라 11초가 돈이란 말이다. 돈 쓰기가 아니라 시간 쓰길 돌아보니 그야말로 무서운줄 몰랐다. 아예 어눌했을 기경 돈 아까운줄은 심심치 않게 알았지만 시간엔 아예 천치였다. 이제라도 뭔가를 알았다는 걸까? 그럼 그나마 다행, 아직이다. 놀랍게도 예와 모난 다름이 없다. 머릿속 전자기력(電磁氣力)사이로 돌아가는 톱니바퀴가 보일 듯 그런 시간의 기미기 시작되고 있다는 그런 뜻일 뿐이다.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문재인 대통령과 이명박 전대통령의 손은 악수, 눈빛은 시간을 꽤뚫듯 전류가 번개처럼 교차하는 듯 뭔가 확 소름이 몰려왔기 때문이다.(2018.1.20. 중앙일보 1, 화보, 2015.11.22. 고김영삼 전대통령 빈소.) 시간, 바로 이런것이라 느꼈다. 시간이란 것!

우주가 준 시간엔 인간의 언어가 없다. 인간은 그러나 마음대로 제단한다. 방금 나처럼. 시간은 같은 속도로 한 방향으로만 가는 물리현상 그뿐 종말을 향해서 말이다.

시간과 인간의 뇌기능에 과한 연구가 있었다.

미국의 얘기, 대학생들은 아폴로 공중 폭발현장에서 쓴 내용을 1년 후 거의 다르게 잊었거나 해석하고 있을 정도 그것이 인간인데 이 두사람에겐 거의 살벌한 가중치까지 느껴자나 웬 일인가?

1986128일 첼린지호는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발사됐다. 발사 후 불과 73초만에 폭발했다. 끔찍한 일이었다. 코널대학에선 당시 그 장면을 목격한 대학생 106명에 대해 조사를 시도했다. 누구랑 봤으며 그때 뭘 했었고, 소감은 어떠했는지 묻고 응답하고 자필 기록으로 남겼다. 정확하게 2년 반 후에 그들 모두를 다시 면접, 그때의 정황을 앞의 기록대로 물었다. 놀랍게도 25%가 딴 얘길 하고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때의 기억을 소상하게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그것은 사실과 전연 달랐다. 자신의 기록을 보여주자 자신의 글씨는 맞는데 지금 말한 것이 사실이고 글 내용이 잘못된 것이라 했다. 나머지 75%, 그들은 2년 반전의 기술한 것과 비슷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한마디로 10%정도만이 기억하고 있었으나 완벽하진 않았다는 연구 결과다.(우리는 어떻게 선택하는가? 정재승/1.4킬로그램의 우주-,사이언스 북스, 2014. 중에서)

만일 첼린지호의 폭발에 대해 법적 증인으로 채택했다면 그 내용의 90%는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월호보다 짧은 기간에 왜 잊고 왜곡했을까? 통계를 믿지 않는게 아니라 아예 거짓말이라 여긴 파인만(1965,노벨 물리학상 수상. 첼린지호 폭팔원인도 규명함)을 나 또한 뭔가 닮아가고 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연구결과는 난해하다.

 

나는 열다섯살때의 기억을 왜 잊지 못할까? 백번듣는 것보다 한번 봤던 것, 눈으로 보았기 때문일까?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색임질 각인할 꺼리도 없었다. 인간은 눈을 믿는다. 박쥐가 자신이 쏜 초음파를 듣는 귀를 믿듯 사람은 눈을 믿는다. 거기에 애증(愛憎) 어느쪽으로 편향된 것이 각색 재입력 장기기억으로 각인되면 어떻게 될까? 두 대통령의 애증, 역시 같은 이치에 따라 각인된 장기기억의 결과가 아닐까?

그것은 불행하게도 삭제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치(代置) 경감될 수는 있다. 유전적으로 동시에 생존을 위한 애증이 작동하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인간의 뇌는 그러나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기에 나는 정신치료를 지금도 특히 인지적(認知的) 측면을 강조하며 하고 있는 중이다.

 

문득 떠 오른 생각, ‘생각을 주무르다

자신의 시간은 자신만이 쓸 권리와 자유가 있다. 폐암에다 들이닥칠 노화의 임계치가 다가오기에 열중해서인듯 그래서 하는 말이다. 이제 시간 즉 생각 쓰기의 한계를 맞는다. 종교 자체가 없는 입장에서 인용할 말은 아니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근거가 있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객관자는 바랄뿐 간섭할 수가 없다. 해서도 안 된다. 선택은 그들만의 권리이자 자유란 말을 되풀이 한다.

만일, 만일 죽음을 앞둔 시간 쓰기의 하나로 생각을 주무르다대치된 장기기억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럼으로서 얻는 평화, 핵을 가지고 있는 북한과 평창에서 축배를 드는 마당에 두 대통령이 같이 할 수 없는 일일까? 가능성이 있다면 더 달리 바랄 것이 있을까 싶다.

창넘어 원래 남한산성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선명했던 금암산 그 등성과 마루 먹구름뒤로 자취를 감춘다. 눈비가 아니라 미세먼지(초미세먼지 뇌의 만리장성을 뚫다, 본 연구소 전문자료의 뇌의학 자료실 10번 참고) 먹구름, 이리 센지 미쳐 몰랐다.

역시 평화를 사랑하는 대한민국, 놀라운데..!” 칭찬 듣기 위한 어린이가 아니다.

승자는 현직 대통령일 것.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그 미세먼지 먹구름은 확 날아갈 것이다. 잘못된 희망과 열망일까?  달빛 딱딱이」, 철 모르던 10대가 또 다신 경험할 일은 아니지 싶어서다.

 

 


 

 

 

나의 뇌는 어떤 것으로 입력 저장되어 있었을까

생애 최초 인쇄 공개된 수필.

역시 첨삭 수정은 없다.

 

 

진찰실의 벌 두 마리

1971

정신과의사 정동철

 

정신적 포르말린에 찌들어 주름진 일상의 진찰실이다.

숨이 잘린 목재(木材)와 차디찬 쇠붙이들이 복합적 산술로 단순히 장식된 네모난 공간, 나의 머리 또한 그 속에 수학적 공식으로 끼어 진 기계, 그저 로봇처럼 이어지는 생산 공장의 벨트라인 위로 지속되는 연속적 흐름만을 확실하게 지키려 애썼다. 감히 흰 가운 속에 삶이 있다고 자랑하는 면담실(面談室)에서 말이다.

사실 말이 면담실이지 달구어진 구리판에 국화빵이 찍혀 나오듯 아픔이 들락거리는 과정을 치료라 부르고 있음에 불과한 것이 그 실체다. 자본주의의 노예가 된 나는 이미 대형(大兄)(-1)으로부터 벗어날 날개를 잃었음이라 정도(正道)이겠거니 믿으며 <자유로부터의 도피>(-2)가 숨막히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 익숙해져 있을 뿐이다. 때에 엉뚱하게도 벌 두 마리가 나의 균형을 깨트리고 있었다. 어이없게도 천진난만한 동화의 세계로 이끌어 간 것이다. 가당치도 않은 구속으로부터의 탈피가 꿈이었던 이유였을까?

어제의 일이다.

날것이 불규칙적으로 유리창에 부딪는 소리가 들렸다. 필경 없는 듯 막히는 유리벽을 타고 위 아래로 힘겹게 오르내리다간 쇠 받침에 떨어 저 다시 부딪는 소리, 때마다 그 특유의 날개 소리가 거슬렸다.

지친 퇴근 무렵이다. 신경질적 왕파리라고 여겼다. 무심코 눈길이 머문 곳에 그러나 파리가 아니라 거기에 벌이었음을 발견하자 갑자기 예외적 생각이 다가섰다. 서야할 이유가 없는 간이역에 급행열차가 서듯 잠시 멎은 것이다. 호기심이 발동했던 탓이다.

--어쩌다 이 삭막한 공간에 갇히게 되었을까?--

짜증스런 파리와는 달리 벌이라는 점에 의문이 솟았다. 숨 한 번 시원하게 들이키기도 답답한 공해의 속세(俗世)에서 이제 병든 진찰실로까지 기어들어 자기 힘으론 도시 나갈 수 없는 꼴 세가 안쓰럽다고 여겨진 까닭이었지 싶다.

어차피 파리야 나와 같은 족속으로 싫거나 좋거나 더불어 사는 처지다. 하지만 벌의 사연을 알게 되기까지 정력적 관심(?)이 쏟아진 연유는 확실히 이유가 달랐다. 나는 본시 파리가 아니라 벌이라고 여겼던 착각에 젖어 거기 비슷한 운명이 꿈틀거리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원인은 꽃이었다.

한 다발의 노란 국화꽃이 내 책상 위에 그저 생긴 데로 듬뿍 투박하게 꽂힐 때. 때를 같이 한 것이 두 벌의 운명이었다.

간호 과장(여자가 아니었다)이 창밖에 아무 관심 없이 피어난 말 그대로 들국화를 꺾어 가공 없이 즉흥적으로 나의 책상 위에 꽂아 놓았다. 그때 그만 세상 형편을 모르고 함께 끌려들어오고 만 것이 그들의 기구한 신세였다. 한 치의 곁눈질도 용서되지 않는 우직한 벌, 맡겨진 일에 열중하는 미련함 때문이었지 싶다. 혹여 꽃 속에 희희낙락 세월 가는 줄 몰랐음이 죄였을까? 분명한 것은, ! 꿀단지를 품고있는 꽃에 빠진 것이었다. 어찌 벌들뿐이었겠나! 나 역시 돈이라는 꿀단지에 갇힌 몸이거늘......

그 이상, 그러나 한가롭지는 못했다. 더구나 인공적 체 바퀴에 워낙 굳어 있을 뿐 맵시 좋게 돌아가는 머리도 아닌 터라 더 이상의 연상은 없었다.

한데 이 아침 새삼 나를 어느 어린 시절의 시골로 이끌어 간 것이 그들이었다. 보란 듯 어제의 벌 한 마리가 훨씬 생생하게 날고 있었다. 쌩쌩하게 꽃 무덤 주변을 맴돌며 생의 곡예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벌과 꽃, 꽃과 벌, 공생(共生)의 조화가 인생이겠거니 하나의 새로운 길로 인도해 주듯 병든 진찰실의 메마름과는 대조를 이룬 채 자연 그대로 펄펄 날고 있었다. 그 꽃이 들에 있든 꽃병에 있든, 그의 환경이 자연적이든 인공적이든, 자유스럽든 부자유스럽든, 정당하든 불법적이든 그것은 상관이 없었다. 그저 거기 꽃송이에 열중할 뿐 꽃 또한 그저 웃고만 있었다.

그렇다. 세상사는 더러 알 듯 몰라야 하는 것이련만 나는 어느 새 나머지 한 마리 벌의 행방을 쫓고 있었다. 야릇한 흥분으로 발을 이리저리 옮겼다. 눈을 크게 떴다. 결과 벌 한 마리는 불행하게도 생을 다하고 창문 귀퉁이에 정말 비정하게 발랑 나자빠져 있음을 발견했다. 죽은 것이다.

필시 유리란 마술에 홀렸음이 틀림없다.

창공을 향해 힘차게 날다간 뇌의 진동으로 떨어지고, 그러다간 또 힘차게 전진해 봤으련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다. 초조함에 날개 버둥질은 커갔을 것이며 그러길 헤아릴 수 없이 반복하는 가운데 그만 지치고 말았을 게다. 끝내 같은 방의 꽃 무리와 어울리는 동료를 볼 눈마저 잃어, 부딪고 부딪치다 애처로이 더할 수 없는 힘겨움에 죽고 만 것이리라. 훤히 보이면서 날 수 있는 듯 막혀 버린 마술의 유리를 알려 해보지도 못했으니 알 리 없이 그냥 가버린 것이 못내 아쉽고 답답해 보였다.

아랑 곳 없이 유유히 꽃과 시한 공생(時限 共生)의 즐거움을 나누는 벌과, 좁디좁은 망원 렌즈의 고집스런 의지에 꺾여 덧없이 죽어간 또 한 마리의 벌은 그 어떤 연유의 오차일까?

선지 선각(先知 先覺)은 처음부터 이들 갇혀진 벌들엔 있지 않았을 테다. 그러기에 다만 후지 후각(後知後覺)과 부지 부각(不知不覺)의 갈림이었을 것이다.(-3)

참으로 알 길이 그 끝에 미치지 못함에 나는 그저 벌과 꽃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문득 꽃 한 송이에 열중한 벌을 살며시 종이 봉지에 씌워 꽃과 함께 창 너머로 넘겨 놓았다. 그리고는 다급히 창문을 닫았다.

--다시는 들지 마라!--

들릴 리 없는 벌, 알아들을 이치가 없는 벌을 향해 중얼거린 나 자신에 짐짓 멋 적게 웃었다. 영원히 갇혀있어야 할 나의 진찰실 때문이었을까?

 

참고: 주석은 2002년 달린 것이다.

(-1): 오웰(Orwell, George 1903~1950, 영국의 소설가. 본명; 블레어-Eric Arthur Blair. 출생지; 인도)의 작품,1984Nineteen Eighty Four(1949)에 등장하는 주인공 대형(大兄)은 사회주의 감시 체제를 대변한다. 미국의 헨리 밀러((Henry Miller, 뉴욕 출신 1981-1980)의 섹서스(Sexus, 1949)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냉전 시대의 두 세계를 말해주는 작품들이다.

(-2):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의 저서 중 하나로 1941년에 발간되었다. 프롬은 미국으로 귀화 정신분석학자사회학자로 지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출생이다. 자유를 싫어한다는 인간, 그래서 자유로부터 도피하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주는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3): 196710월말, 나는 除隊와 더불어 청량리 뇌병원-현재의 청량리 정신병원-에 정신과 전문의로 1974. 3.까지 일했다. 거기엔 나를 포함해 소 3마리가 있다는 말들이 있었다. 대학 1년 선배 이규동, 그리고 내가 추천하여 오게 된 후배 김상태는 모두가 소같이 일에 열중했다는 풍문 때문이다. 한편 뒤이어 대학 입학 동기 이호급이 나의 추천에 따라 전공의로 들어왔다. 그는 중도에 정신과를 포기했다. 서울醫大 동문인 세 사람의 아들은 2002년 현재 모두가 정신과 전문의가 되었으며, 이호급의 두 아들은 전공과는 다르지만 역시 모두 전문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