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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 할 때와 살아야 할 때 덧글 0 | 조회 15,565 | 2009-04-17 00:00:00
정동철  


- 죽어야 할 때와 살아야 할 때 -

죽으면 산다고 한다.
정치가들이 즐겨 쓰는 말이다. 익숙한 듯 그러나 그런 사람을 실제로 보거나 들은 적은 없다. 뙤약볕에 우는 매미처럼 그저 시끄러울 뿐 공염불에 의한 수작(酬酌)으로 그쳐지는 게 전부다. 오히려 뒷짐지고 하늘을 향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딴청이 예사다.
“허허 무슨 소리, 죽으면 산다니 말이나 되나?”
매미는 하지만 철 따라 방충망에까지 달라붙어 요란하지만 결국은 죽는다.
질 새라 그래서인지 기발한 아이디어를 창출해 낸 젊은이가 있었다.
“절대로 안 주는 거 있죠. 참 답답하단 말씀이에요. 어차피 저에게 주실 유산(遺産)을 왜 그렇게 움켜주고 계신지 알 수가 없어요. 그것도 지금 몽땅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5년이나 10년 후 어차피 저에게 주게 되어 있는 유산 말입니다. 해당된 이자만 일부 줄 수 없겠느냐고 했죠. 통하지가 않더군요. 아버지는 아주 지독한 분이죠. 적어도 30억 이상은 저의 몫으로 상속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안 된다는 이유를 정말 알 수가 없습니다. 해결할 길이 없을 까요? 선생님.......”
아버지가 죽게 된다면 문제는 다 잘 될 것이다. 법적 상속인을 위해 아버지가 죽어야 할 때인지가 문제다.
마침 촬스 왕세자가 왕(王)이 되고 싶다고 했다. 40년에 걸쳐 왕 수업을 받아왔다. 지천명의 50세가 되면서(‘98.11.14) 언론에 흘린 얘기다. 72세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촬스는 아직 왕좌(王座)에 오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들을 위해 죽어야 할 때가 아니라는 뜻이다. 아들 촬스는 당당하게 살아야 할 때라고 믿고 있는데 어찌해야 될까?
걸핏하면 어머니를 때리고 아버지의 주정(酒酊)에 그만 화를 참지 못하고 밀친 것이 살인이 되고 말았다는 사건이 있었다. 어머니가 자신의 짓이라고 자청하여 아들을 대신했다. 남편이 죽어야 할 때라면 아들은 살아야 할 때라고 여겼을 것이다. 아울러 자신 역시 죽어야 할 때라고 판단한 것이리라. 사람들은 어떻게 판결을 내릴까?
적어도 20년은 됐지 싶다. 정신감정을 줄기차게 하던 시절이었다.(주-1)
어느 날 촌부의 비속(卑屬) 살해(殺害) 사건에 증인으로 선 적이 있었다. 홀 아버지가 심장병으로 숨이 넘어가는 순간 엉겁결에 잠든 둘째 아들의 간(肝)을 떼어 입에 넣은 끔찍한 일이었다. 아들의 나이는 6세, 아버지는 하나밖에 없지만 아들은 또 낳으면 된다는 생각과 더불어 사람의 생간(生肝)이 불치(不治)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목매한 속설(俗說)과 어우러져 벌어진 사건이었다. 실제 그는 그런 일이 있기 2년 전 효자상(孝子賞)을 탔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숨이 넘어가자 자신의 허벅지에 피를 내어 주었는데 용케도 살게 되었다. 지극한 효심(孝心)이 타(他)의 본(本)이 된다해서 도(道)에서 상을 준 것이다.
아들은 자신의 분신(分身)이라 믿고 있던 그는 이미 관(官)에서 인정한 효자로서 아버지의 생명을 위해 못할 짓을 한 것이 아니라고 여긴 것은 당연했다. 삼국유사 손순(遜順)의 부활과 같은 얘기였다.
노모(老母)의 끼니를 축낸다고 자신의 아기를 생매장(生埋葬)한 것이 왕(王)에 전해져 포상(褒賞)을 받은 신라(新羅) 때의 효행(孝行)이 천년의 단층(斷層)을 찰나(刹那)에 뛰어넘은 사건이다. 남편을 죽인 아들을 대신해서 살인 누명을 자청한 어머니의 마음과는 어떻게 이어지는 것일까?
죽어야 할 때와 살아야 할 때를 무엇으로 가늠해야 하는지 심히 헷갈리는 일들이 뒤섞여 있다. 마음을 정리하기가 매우 어렵다. 나는 죽어야 할 때라고 은근히 믿고 있던 터이기 때문이다. 하필 왜 죽어야 할 때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있었을까?

새벽 하늘의 별들은 유난히 반짝거렸다. 늦밤과는 달리 요술 할머니의 지휘봉에서 뿌려진 별들은 하늘 가득히 헤아릴 수 없이 총총히 박혀 있었다.
연 전(年 前)의 21개가 아니었다. 동트기 전의 바람은 움츠려진 겨드랑이 사이로 상쾌하게 기어들었다. 순간 별똥별처럼 서울의 손녀(孫女)를 향해 다시 내달렸다. 새벽 4~5시면 시계처럼 반복되는 일이지만 아침에 해가 뜨듯 그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거만스럽게 분명히 머리를 휘젓는 손녀, 한 번 아니면 끝까지 아니다. 싫다는 의사 표현이 또렷하다는 것은 주장이 확실하다는 뜻이다. 오만가지 몸놀림으로 우리들을 웃기는 기억력은 나보다 훨씬 영리하다. 태어난 지 16개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손녀는 사람의 특징을 여지없이 꼬집어 낸다.
“할아버지 어떻게 하시지?”
어깨를 한 것 재껴 뒷짐지고 왔다갔다하다간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윈 쪽 손가락으로 입 몸을 비빈다. 요지를 사용하는 나의 행동거지가 그에겐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예쁜 짓?”
전화를 귀에다 대고 옹알대며 소리의 높낮이가 그야말로 어른들의 바로 그것과 차이가 없는 터에 검지로 뺨을 찍어누르며 눈을 똥그랗게 뜬다.
그러고 보니 평소 그의 엄마를 보는 듯 하다. 분명 그런 식으로 전화를 받곤 했을 것이다. 예쁜 짓이라고 하니 언젠가 아내가 전해준 말이 떠오른다.
“당신 몰랐죠? 어쩌나 봤어요. 당신이 먹다 남은 밥을 그대로 먹습디다. 당연히 버릴 줄 알았는데 놀랐어요. 나도 때론 당신 먹던 밥에 젓가락이 안 갈 때가 있잖아요. 근데 신세대 며느리가 당연하듯 물에 마는 것을 보고는 나보다 낫다고 여겼어요. 먹성이나 좋다면 또 몰라요. 얼마나 예쁘던지 정말 놀랐어요. 당신 나쁜 습관을 고쳐요. 꼭 한 두 수갈 남겨놓는 버릇 말이에요. 깨끗이 나 잡수면 그래도 낫겠죠. 며느리 밥상에선 조심하세요.”
손녀의 두상(頭狀)은 나만이 아는 짱구로 되어있다.
10여 년 전 시신경염(視神經炎)으로 치료를 받을 때 눈을 감으면 파란 동전이 반짝하다가 눈을 뜨면 같은 크기의 검은 동전이 앞을 가리곤 했었다. 근래 유사한 현상이 책과 더불어 사는 나를 괴롭히고 있다. 한데 그 동전이 바뀐 것이다. 손녀의 두상으로 자리바꿈이 일어난 것이다. 집에서나 병원에서 생각나면 이젠 그 불편스럽던 현상을 이용해 손녀를 보려고 눈을 감았다 뜨곤 한다.
두상(頭狀)은 여전히 우아(優雅)하다. 표정 없이 내려다보는 모습 역시 무뚝뚝하지만 우아한 쪽으로 기운다. 그것은 그러나 잠시다. 활짝 웃으며 품에서 바닥으로 비틀고 내려오면 사정(事情)이 달라진다. 물밖에 죽은 듯 조용히 있던 고기가 물 속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파닥거리며 힘차게 휘 집고 사라지듯 발과 손은 물론 입까지 피노키오가 되고 만다. 연 전에 상상하며 그려봤던 우아함이 아니라 장난꾸러기 꽤 바리가 된 것이다.
과연 내가 죽어야 할 때는 언제일까?
손녀의 머리는 점점 빛날 것이다. 나의 머리는 그만큼 점점 희미해질 것이다.
최근 성인 뇌(腦)에서 신경세포(神經細胞)가 자란다는 사실을 밝힌 연구가 있었다.(자연 의학, 1998.11.) 노망이든 치매든 노년 인구의 증가로 땀을 두 배쯤 더 흘려야 하는 젊은이들의 걱정이 태산같은 현실에 무언가 커다란 선물 같은 기분이 몰려온다. 죽어야 할 때가 되었는데 죽지 않는 것이 사회적 문제다. 고려장(高麗葬)을 제도화할 수도 없고 뾰족한 대책 또한 없으니 암담한 터에 한줄기 불빛 같기 때문이다.(주-2)
10년 전 예일대학에서 밝힌 바 있는 학설이 뒤집히고 있는 것이다. 태아 때의 성장한 신경세포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지금까지의 학설에 비하면 획기적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치매를 해결할 수 있다는 성급한 가능성을 점치게 되니 어찌 아니 사람이 죽어야 할 때가 달라지지 않겠는가.
나의 머리에서 새로운 신경세포가 손녀의 풍부한 신경세포처럼 재생되거나 보충(補充)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이라면 손녀의 머리 속에 각인(刻印) 된 이 쑤시는 할아버지가 멋지고 든든한 빽으로 변신(變身)하여 자리잡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은 적어도 나에겐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나는 헤밍웨이나 카와바다처럼 결코 자살할 생각은 없다.(주-3) 하지만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느냐는 의문에 확실한 해답을 찾지 못해 안개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담 무작정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나에겐 손녀가 네 명 있다. 외손녀 셋, 그리고 친손녀 나희(娜熙)가 있다.(주-4)
그들이 태어난 후 해마다 세뱃돈으로 2백만 원씩 준다. 철저하게 그들의 이름으로 통장(通帳)을 만들어 관리(管理)하라고 그들의 부모에게 일러주었다. 기간은 5년간이다. 그들이 대학을 졸업할 대 졸업장과 더불어 불어난 돈을 그들의 의사(意思)에 따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누구도 아직은 나의 결정을 깨뜨리지는 않고 있다. 나의 머리가 점점 희미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을지언정 적어도 표면적으론 그렇다. 마음놓고 죽어야 할 때가 되었겠지?
하지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보단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는지 확답이 필요해졌다.
신경세포가 새로 생긴다는 희망 때문이 아니다. 사실 이번에 밝혀지고 있는 신경세포는 신경망(神經網) 즉 네트 워킹까지 확인된 것은 아니다. 신경세포에 이런 기능이 빠지면 있으나 마나한 쭉정이에 불과하다. 창문이 없는 방은 곧 무덤과 다를 바가 없으니 살았으되 죽은 것이나 진배없다. 놀랍게도 나에겐 사회적 창문에 해당하는 네트 워킹이 아직도 제법 생생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점에 눈을 떴다.
나라마다 대표적 하이테크 도시를 만들어 살아남아야겠다고 난리다. 빌 게이츠가 사는 시애틀, IBM이 있는 보스턴, 노키아의 헬싱키, 도시 전체가 신경 망으로 뒤덮인 싱가포르 등은 샌프란시스코의 실리콘 밸리를 넘보려고 야단법석이다. 연결할 수 있는 창문을 위한 전쟁들이다.(주-5) 나는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스스로 구축한 통신 사이트이기에 죽어야 할 때가 아니라는 신호가 계속 깜빡거리고 있음을 본다.
“선상님! 이거 좀 드시라우요. 몸에 좋은 거야요. 저기, 속에 넣어 두시고 하루에 4개씩만 매일 거르지 말고 드시요. 선상님이 건강해야 밖의 많은 환자도 살고, 이 늙은이도 살지 아이하지 않겠소.... 꼭 그리 하기요. 잊으시면 안 되요. 오래 오래 사시라요...”
팔순이 훨씬 넘은 할머니가 잣 한 되를 비닐 봉지에 싸고 또 싸서 내밀며 신신당부한 말씀이다. 아들이 의사(醫師)라는 그 할머니와의 창문(窓門)을 느낀다. 인터넷 온라인으로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나의 생활은 창(窓)이 있으나 적막(寂寞) 강산(江山)이다. 역설적이지만 바로 그 할머니의 말씀으로 창문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이다.(주-6)
“「한 냥 대신 세 푼」이라는 얘기 들어보신 적 있으시죠? 경찰(警察)이 고양이라면 군(軍)은 충성스런 개죠. 고양이는 주인에게 생채기를 낼 수 있습니다. 개는 결코 주인을 무는 법이 없거든요. 주인을 무는 개는 미친개죠. 쓰레기통에 장미를 피게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군인(軍人) 박정희 전 대통령을 뭐라 불러야 할까요. 정치가(政治家)는 황소예요. 뿔이 있지 않습니까. 힘이 너무 세서 코뚜레를 꿰어둔 것인데 김영삼 전 대통령은 또 어떻게 되는 셈이죠? 재(財)테크가 뛰어난 현 김대중 대통령은…”
나이답지 않게 말을 잃고 흐느꼈다. 화랑무공훈장(花郞武功勳章)의 육군사관학교 출신 예비역 장교, 그의 얘기는 의미심장했다. 그가 보인 창문(窓門)을 통해 나는 무엇을 읽어야 하나? 그의 설명은 단순한 화풀이가 아니었다.(주-7)(주-7):
옛날 어느 선비가 징검다리를 건너다 은 닢 세 푼을 빠뜨렸단다. 아무리 찾으려해도 역부족이었다. 일꾼을 불러 찾으려 하니 금 한 냥이 들어야 한다고 했다. 선비는 한 냥 들여 세 푼을 찾아냈다. 매우 기뻐했다. 얼간이 같은 미소(微笑), 그러나 그의 마음속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금 한량이 없어진 것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뿐이다. 잃을 뻔했던 은 세 푼을 찾았으니 은과 금은 고스란히 나라에 남아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죽어야 할 때란 신경망(神經網)이 망가져 교감(交感)할 창문을 잃은 경우라 해야 옳은가 보다. 나이나 돈, 또는 성가시다는 마음으로 죽을 때를 결정하는 것은 낭비다. 더 중요한 것은 세 푼 은을 찾기 위해 한 냥 금을 투자하는 지혜, 거기엔 어차피 죽어야 할 존재지만 은 세 푼의 의미를 귀히 여기고 있음을 봐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이기도 하다. 나는 역사적 인물이 되기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하진 않는다. 역사라는 강줄기가 흘러 갈 수 있도록 하는 미물(微物)에 불과한 모래알이지만 그것이 살아있어야 강물은 흐른다. 뿐인가 물에 무수한 생명들이 숨쉴 수 있다.
내막은 어찌되었는지 알 수가 없지만 정주영씨가 매우 부자연스런 거동으로 김정일씨를 만나고 다시 김대중씨를 찾은 것을 보면 그의 손들이 죽어야 할 때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주-7)
상속(相續)의 의미를 몰랐을 때는 선친(先親)이 살아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상속의 매력을 알았을 때는 후손을 위해 죽어야 할 때라고 강조된다. 세상 인심이다. 어리석게도 주객전도(主客顚倒)를 미쳐 가늠하지 못한 결과 그 덫에 스스로 걸려들어 얼마나 많은 후손들이 마음의 옥고(獄苦)를 치르고 있을까?
나는 죽어야 할 때를 가늠하고 있다.
창문이 있는 사회적 신경망(神經網)이 와해(瓦解)되고, 손녀 나희(娜熙)가 나의 무덤 앞에 그녀의 부모와 더불어 검은 투피스와 깜찍한 검정 모자를 쓰고 우아하게 서 있을 때가 바로 그때라고 보는 것이다. 그때 필시(必是) 나희(娜熙)는 말하리라.
“할아버지! 나 아빠처럼 의사(醫師) 될래요. 할아버지! 있잖아요, 창문(窓門)이 있는 무덤을 만들께요. 할아버지랑 함께 노는 방법을 알려줄 테니까 그때까지 잠들면 안 되요. 할아버지 알았죠? 할아버지 안녕!”
아직은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다.
두텁게 파란 코트와 모자를 쓰고 삐죽 내밀어 손짓하는 사진(寫眞) 한 장, 컴퓨터 왼편 책상 위에 나를 응시하고 있는 사진틀 속의 깊은 눈망울에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말하기까지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더 소중한 것은 그가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때 동시에 함께 있기를 바라는 말을 위해서다.
“할아버지! 알아요. 할아버지가 의사(醫師)들 대신 그 무지막지한 사람들(權力)에 곤욕을 당하게 되신 것 말이에요. 그것이 할아버지를 더 볼 수 없게 했던 것까지 알아요. 할아버지 뜻을 잊지 않을 거예요. 할아버지! 나희(娜熙)는 이제 울지 않는 손녀가 되어 이렇게 여기에 있어요. 저의 말을 들으시죠?..........”
묵묵히 조금은 아직은 한참 기다려야할 이유이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이어줄 소중한 아내와의 작품, 조그만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주-1): ‘67년부터 ’74년까지 청량리 뇌병원에 전문의로 있는 동안 50건 이상의 정신감정을 했다. 재판정의 증인으로 선 경험은 세상살이에 큰 도움이 되었고 ‘살인 58例에 대한 정신의학적 고찰’이라는 논문이 탄생하기도 했다.
(주-2): 2001년 12월 노령화 현상의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나라가 되었다. 그만큼 靑壯年 층의 어깨가 무거워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3): 두 사람은 모두 소설가로 노벨상을 탄 작가다. 각각 자살을 하였다. 우울증에 의한 것으로 단정할만한 증거는 없다. 사는 자의 체험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들이다.
(주-4): 1999년 10월 나는 건강한 친손녀 址熙를 다시 봤다. 이제 다섯 명의 손녀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아내와 나는 3대 독자의 대를 이어야한다는 그런 생각에 억 매여있지 않다. 조용하기 그지없던 址熙는 돌이 지난 2001년 12월 언니에 조금도 지려하지 않는 뚝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주-5): 2001년 12월의 한국은 IT산업에서 상당한 기술력을 가지게 되었다. 인터넷을 이용하는 인구가 세계적이다. 일본을 앞지를 정도다. 놀라운 현상이다.
(주-6): 아들이 만든 나의 홈페이지는 오래되었지만 다른 유료 인터넷 사이트가 있어 파리를 날리고 있는 깡통 홈피다. 창문이 닫힌 것은 아니라 외지다. 할머니는 산 증인으로 나의 곁에서 숨쉬고 있다. 할머니는 금년 2001년 어느 달 인가부터 오시지 않는다. 불길한 생각이 든다. 천주교를 믿고 있던 할머니는 늘 나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셨고 또 믿어야 천장에 간다고 말씀하셨다.
(주-7): 1915. 11. 25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출생, 2001. 3. 21. 峨山 鄭周永 씨는 이른바 현대그룹 王 회장으로 북녘을 오가며 별세했다. 2001년의 10대 뉴스에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