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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정말 떠나야 할 때 덧글 0 | 조회 16,814 | 2009-04-17 00:00:00
정동철  


- 이젠 정말 떠나야 할 때 -

할 수 없다는 사실, 아니 해선 안 될 일을 하고 있다는 현실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의사는 더 이상 치료자(治療者)가 아니다. 오로지 돈올 벌기 위한 장사꾼이라는 것이다. 성직자(聖職者)처럼 역시 의사도 직업이라고 분류한다면 장사꾼이라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파렴치한 이익 집단으로서, 게다가 과잉, 과다 청구는 물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기꾼에 해당하는 사이비 의사라는 것이 문제다. 그뿐인가, 적어도 현정부와 시민 단체가 공식적으로 밝힌 자료에 의하면 자그마치 의약 분업으로 발생된 재정 적자 4조원을 날치기한 주범이 의사 집단이라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과연 양심의 탈을 쓰고 더 버틴다면 그보다 추한 일은 없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내가 바로 그 집단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앞의 판단이 시민 전체의 의식으로 정착되었다면 의사는 더 이상 의사일 수가 없는 까닭이다. 신뢰성을 상실한 의사의 치료 행위는 효과도 없을 것이며 그 후유증은 감당할 형편이 아닌 애물로 남게 될 것이 뻔하지 않겠는가. 차라리 깡그리 감옥에 가야할 것이라면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이기에 눌러앉아 있다면 차라리 자살을 할 일이다. 죄질이 아주 고약한 지능범들이니 말이다. 당연히 가운을 벗고 떠나는 것이 도리이자 법에 맞는 이치다. 나는 솔직히 떠나야겠다고 결심한다.
한데 세무 조사가 10일간의 일정으로 들이닥쳤다. 국회에선 의사가 폐업을 하면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폐업을 하면 잡아간다는 것이다. 10년 동안 의사 자격증을 박탈한다고 하기도 했다.

타락이 아니라 범죄자가 천연스럽게 버티고 있다는 것이 마치 인면수심(人面獸心)과 다름없어 양심에 따라 그만두겠다는 데 엉뚱한 화살이 날아오고 있다. 그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 자격증을 박탈한다는 것은 그렇다 치고 잡아간다는 말이 대체 무슨 의미인가?
어쩌란 말인가? 어찌 해야 할 것인가? 정확하게 말해서 나는 현행법상(現行法上) <죄인(罪人)>이 분명하지 않은가?
한때는 순박하게 믿고 있었다.
의사(醫師)라는 직업으로 해서 자신이 담당한 환자가 혹 잘못되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죄책감의 고뇌(苦惱)를 피할 길이 없었다. 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무능(無能)함을 소금에 찍어 소주로 자탄(自歎)하며 괴로운 머리를 쥐어뜯어야 했다. 죽은 것은 어찌되었든 나의 무능이라는 자책감으로부터 도망갈 하다못해 쥐구멍도 없다는 이유였다. 당장 가운을 벗어 던지고 산 속으로 은둔(隱遁)의 길만 연상하기 마련이다. 아픈 환자를 치료할 수 없는 내가 어찌 의사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느냐는 마음의 소리를 비켜 설 수 없었던 탓이다. 그것은 어김없이 법정(法庭)으로 고스란히 여과(濾過)되지 않은 체 그대로 이어졌다.
“내, 저의 무능 탓이었죠.....”
학생시절 교수님의 지적에 고개를 떨구듯 검사의 교묘한 질문에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나의 양심에 닻을 내리고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판사는 법정에서 풀죽은 의사의 시인을 지며보며 유죄를 선언한다. 원인은 들을 필요가 없다. 결과를 승복한 이상 그것으로 족하다. 정확하게 법조문에 따를 뿐이다. 죄의 구성 요건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반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멍청한 의사, 것도 모르고 세상을 살아가니 한심하다는 일말의 여운이 가벼운 한숨으로 들릴 듯 말 판사의 입이 씰룩거린다.
판사의 오판이나 검사의 판단 착오에 의한 구속이 준 인권에 대해 아무도 오진이라는 죄목으로 감옥은 고사하고 기소조차 하는 일은 없다. 법적으로 아예 그런 죄목은 없는 모양이다. 똑 같이 한 생명의 생리적 사회적 죽음에 영향을 주는 심각한 결과에 책임이 있지만 잣대가 다르다.
기본적 차이가 출발점에서부터 있음을 알았다.
법은 디지털 문자와 같다. 글쎄요 라는 말은 용납되지 않는다. 예 또는 아니오 만이 법정의 본질이다. <글세요>라는 단어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선 십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원인과 과정을 나열하는 것을 무척 싫어하는 곳이다. 결과와 책임능력만 충족되면 된다. 같은 사람의 행동과학을 다루는 정신과 의사와의 심각한 견해차다. 원초적 불평등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얘기다. 그만두기로 하자.

당연히 스스로 인정한 무능과 잘못이므로 감방에 들어 가야한다. 객관적 불가항력이라는 객관적 이유가 있다해도 스스로 인정한 이상 그것은 피할 길이 없다. 아니 실제 피할 의향도 없는지 모른다.
때에 의사를 위해 한마디라도 거들어 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반대로 살리려고 병원에 갔지 죽이려고 간 것이 아니니 나쁜 놈으로 팔매질을 당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의약 분업이 시행되면서 환자들은 한결같이 약을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죽일 놈은 정치가였었다. 하지만 그들이 바로 정부의 첩자와 같았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날아온 치료비가 엉뚱하다고 고발이 빗발치는 것이다. 여전히 의사 앞에선 약을 달라고 난리다. 여행을 갈 것이니 대신 보낼 때 약을 지어보내라고 한다. 부당 청구에 걸린다고 하면 그렇게 말하는 놈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한다. 하지만 환자나 환자 보호자의 시민 단체는 없다. 아무도 정책자(政策者)에게 말하는 사람이 없다. 당연히 환자가 오지 않아 처방을 내지 않으면 죽일놈이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의사가 말이다.
하물며 의사의 깊고 아픈 마음을 이해하려는 사람이 있겠다는 현실을 감히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양심(良心)과 법(法)은 공존(共存)할 수 없다. 의사는 법엔 거의 관심이 없다. 오로지 의사로서의 양심이 소중할 따름이다. 자신을 반추(反芻)하기만 한다. 주의(注意) 의무(義務)를 다했다해도 생명의 주변 사람과 달리 깊은 고민을 해야 한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법은 곰처럼 연어의 배란기를 기다렸다는 듯 가차없이 유죄로 얽어맨다. 환자나 그 가족도 소리를 높인다.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하며 마구 짓밟는다. 아무도 의사 편에 서서 조그만 적선도 거부한다. 의사는 아예 적으로 몰린다.
의사를 더는 할 수 없다는 깊은 수렁에 빠진다. 출가 그 앞에 죽는 선사의 얘기들을 이용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하지난 이젠 그런 고전적 문제가 아니다. 그때도 의사는 자신의 가운을 집어던지고 싶은 욕망을 통제하기 어려웠었다. 지금은 전연 입장이 다르다는 데 문제가 있다.

“선생님이 떠나면 우린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떠나면 안 됩니다. 그건 우리보고 죽으라는 얘기와 같은 것이죠. 하여간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