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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 사활 덧글 0 | 조회 16,590 | 2009-04-17 00:00:00
정동철  


- 한(恨)의 사활(死活) -

메마른 초원의 과실나무 한 그루.
사막처럼 타들어가는 벌판에 커다란 정자나무처럼 버티고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거기엔 아주 먹음직한 열매가 사시사철 달려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따먹을 수가 없었다. Y자형으로 갈라진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그 탐스런 과일은 똑같이 생겼지만 생사가 엇갈리는 독과 약이 들었다. 독이 든 과일을 먹으면 바로 죽게 되어있었다. 불행하게도 어느 가지의 과일이 독을 품고 있는지 그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때에 한 사람이 나섰다.
농작물은 이미 활활 타고, 쩍쩍 갈라진 황량한 가뭄은 사람들의 눈빛을 앗아가고 있었다. 대안이 없는 막다른 벼랑 끝의 사람들은 나무 앞에 모였다. 하지만 바라볼 뿐 따먹을 엄두가 없었다. 때에 죽어가는 아들을 보던 그 남자가 열매 하나를 용감하게 지끈 깨문 것이다.
놀랍게도 그는 죽지 않았다.
그와 아들이 죽음을 면하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아사(餓死)직전에 새로운 삶을 얻었다. 얼마나 기막힌 환생(還生)인가!
별안간 영웅이 된 그는 주장했다.
“앞으로 안전한 과일을 먹기 위해 나머지 가지를 잘라버리자!”
독이 있다는 그 과일을 구별하지 못해 애태웠던 사람들은 그간의 울분에 복수하듯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가지를 쳐버렸다. 모두는 기뻐했다. 이제 언제든 먹고 싶을 때 그저 따 먹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과일들은 말라 비틀어 떨어지고, 몇 잎 앙상하게 매달린 나무는 제 모습을 잃었다. 그 나무는 더 이상 살아있는 나무가 아니었다.
앙리 구고가 쓴 책 <사랑과 지혜의 나무>에 실린 얘기 중 하나의 줄거리다.
정초 어떤 신년하례식에 참석했다.
대통령 후보로 등록했었던 사람을 비롯해 쟁쟁한 분들이 모여 있었다. 조찬에 앞서 도착되는 순서대로 악수를 하고 줄지어 나란히 이어 섰다. 알든 모르든 결국 모두와 인사를 나누었다.
“좋은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새 해를 축하 합니다.” 좌우에서 나오는 환한 인사말 사이에 내가 던진 말에 문득 의문이 생겼다.
-<좋은 한 해>? 무슨 뜻이지?-
조찬과 함께 <세계정세와 한반도 안보>라는 주제가 발표되었다. 권위 있는 연자의 분석말미에 이런 뜻이 강조돼 있었다.
예컨대 보수와 진보가 싸우면 결국 나라가 망한다. 불행하게도 언론과 그 밖의 뭐랄까.., 단체들이 갈라치기 장단에 춤추고 있으니 무엇보다 그것이 한반도 안보의 가장 큰 걱정거리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민주국가에 산다. 적어도 헌법상 그렇다. 사회주의 중국보다 시장경제가 철저하게 무시되는 공산주의형 의료정책이 의사들의 목을 짓누른다 해도 하여간 그렇다. 다양한 주장이 가능한 것도 그래서다. 문제는 ‘시민’이라는 단어가 붙은 정치적 단체들이다. 대체 누가 그들에게 시민을 대표한 사람들이라 정해주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주장에 따라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고 진두지휘하고 있는 형편을 볼라치면 상대적으로 나 같은 국민은 <허수아비>가 된 자신을 확인해야 한다. 옥석을 가리지 못하는 <골빈 바보>들, 그게 아니고서야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길 리가 없지 않겠는가? 똑똑한 시민정신이 없는 천치들의 세상이라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시민단체’들이 초등학생을 타이르듯 이끌어주고 그것을 다행이라 여길 정도라면 바보 정도가 아니라 허수아비라 해서 틀린 말은 아니다.
보라 그들은 예의 나무처럼 한쪽 가지를 잘라내야 한다고 친절하게 일러주기까지 한다.
나는 늘 문제해결의 연속 상에서 허덕이는 숫한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며 산다. 그래서인지 <항상성(恒常性) 균형>을 전제로 초행길을 풀어가자는 버릇이 생겼다.
태풍 ‘매미’는 한반도에서 보면 불행이다. 지구 전체로 볼 때는 지구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순리다. 대기권을 뒤섞어 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태풍이 없었다면 오염된 온난화현상은 그것이 몰려있는 땅덩어리를 물이나 불바다로 덮어버릴 것이다. 지구는 결국 망가질 것이라는 얘기다.
톨스토이는 말했다. 한 가지 책만 신봉하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신실한 기독교도였던 그가 성경만 보고 세상을 가늠하는 잣대를 경고한 것이다. 정신과 책만 보고 정치적 시민단체(봉사단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나 영웅들의 깊고 심오한 생각을 헤아리지 못하니 어찌 <정신 나간 정신과 의사>가 아니겠는가! 한 쪽만 쳐 내면 불노소득 호의호식 영생하리라는 착각을 갖지 말라든가, 아니면 어울리지도 않게 척하면서 항상성(恒常性)의 법칙을 떠벌이며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으니 과연 삿대질을 피할 길이 있겠는가?

왜 사느냐고 면담실은 황당할 때가 많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할만한 일이 있어, 등 부쳐 눈비 피하며, 굶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뿐, 그래서 화려한 수식어를 구사하지 않아도 된다면 근심걱정 베어들 틈이 있겠냐고 거든다. 더 맛있고, 더 크고, 더 멋지고, 더 화려하고, 더 날씬해야 한다는 <수식어>만 빼면 걱정은 물론 싸울 일도 없을 거라며 제법 목청을 높인다.
현실을 외면하고 그걸 믿으라는 것이 정신과의사의 수준이다. 그 현란한 말씨와 일도양단의 칼잡이들을 보면서... 차, 포 떼고 대체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삿대질이 쏟아진다.
<정신 나간 바보, 정신과 의사!>
그래서다. 바램은 바보라도 좋다. 모르고 한 말이겠는가? 옥상(屋上) 옥(屋), 정치적 ‘시민’단체가 우리 머리위에 올라앉아 철부지 취급만 안 해 준다면 편하겠다는 마음이다. 낮과 밤이 공존하듯 낮만 강조하다 행여 나무가 죽으면 어쩌나 해서다. 이질성(異質性)이 공존하며 함께 살 수 있는 세상, 그것은 이상이 아니다.
“좋은 한 해.”
제발 우리들의 자유스런 선택권만은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여겼다. 왜, 나, 국민은 죽어가는 나무를 보지도, 또 말하지도 말아야 하는지 그것만은 국민의 특권에 맡겨주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집으로 오는 고속화 도로에 곡예를 하며 새치기로 약삭빠르게 끼어드는 차가 코앞을 막았다. 브레이크를 뭉클 밟자 끼어든 생각들이었다.

‘어지간히 바쁜 게로구나’ (20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