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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방송야사 덧글 0 | 조회 15,930 | 2009-04-17 00:00:00
정동철  



- 나의 방송야사 -
2007.3.1.

“아시죠? 저 ‘SBS 긴급출동’ 작가에요. 이번엔 꼭 들어주시겠죠? 이번 주 주제는요...”
“잠간....... 솔직히 말해야 되겠는데. ‘다음에’, ‘다음에’ 했던 것 미안해요. 이해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출연할 수 없는 이유를 솔직히 말해야겠어요. ”
지난해(2006) 하반기 같은 프로에서 3차례나 연달아 출연을 부탁해왔다. 도와주고 싶은데 마침 선약이 있으니 아무개를 소개해 주면 안 되겠느냐면서 ‘다음’이란 단어를 쓰곤 했었다. 이젠 그럴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사이사이에 다른 방송사에서도 출연요청에 대해 같은 식으로 상대방 입장을 고려해 완곡한 표현을 골라 거절한 터지만 정말 얼버무리고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 단정을 내린 것이다.

원래 오락프로엔 나가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 전문분야나 교양, 내지는 사회적 병리현상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프로 이외엔 나가지 않는다는 나름의 규칙을 다지며 지켜왔었다. 그렇다고 들어 내놓고 PD의 마음을 상하게 할 마음은 없어 선약을 내세우며 피했었다. 사실 거절하는 것은 매사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PD의 입장을 생각하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출연 가능한 대타자(代打者)를 많이 확보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PD 나름의 고충이라 그들도 나를 소홀히 생각하지 않는다.-물론 안하무인격의 그런 PD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갑자기 결정된 주제에 적절한 출연자를 선택하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있어도 반드시 지정된 시간에 바라는 출연자가 보장될 수는 없다. 대타자가 늘 있어야한다. 동급의 예비출연자를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PD의 애로다. PD에 대해 대체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 하다. 생사를 걸고 기생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까지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 가수, 탤런트, 그리고 이해관계가 있는 다양한 사람들에겐 神적존재와 같을지 모르지만 좌우가 그렇다. 심지어는 유명 탤런트 등과 어울려 도박이나 술타령에다, 스캔들이 회자되고 가수가 방송을 타려면 적어도 2000년 전후의 기준으로 억대의 자금이 필요할 정도로 미묘한 세계의 주인공이라고 풍문이 돌고 있지만 그들에게도 애로는 있다. 특히 교양프로를 담당하고 있는 쪽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시사성이 있는 PD는 일종의 전쟁을 치루지 않으면 안 되는 엄청난 스트레스로 늘 시달리고 있다. 많은 인맥이 그들의 생존법칙일 수 있다는 뜻이다. 깍듯이 예우를 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예우를 깍듯이 지키는 이유일 것이다. 나 역시 같은 예의를 지켜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그래서 인간사의 상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기왕에 얼굴이 팔린 마당엔 도리가 없다. 그러나 이젠 계속 거짓말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첫째는 나이가 들어 TV엔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심정을 밝히고, 두 번째 이유로 나의 원칙을 설명해 주었다. 둘 다 그녀는 수궁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두 번째 문제는 「프로」를 격하시키는 뉴앙스가 있어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할 여지가 많다. 일요진단, 교양에 관한 강연, 건강정보를 위한 토론, 시사토론 등 비 오락성만을 강조하는 듯한 나의 의도 때문에 자신의 프로가 격하되는 인상을 받을 소지가 있었다.

정신의학은 사회전반에 걸쳐 이슈가 되는 이런저런 병리현상에 대해 나름의 분석을 하고 그것이 수요조건에 해당되어 이현령비현령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걸리지 않는 프로가 거의 없다. 자칫 작가와 PD의 감정을 건드리기 딱이다. 하지만 나의 완고한 규정으로 보면 요즘 갑자기 뜨고 있는 각종 개그나 먹꺼리와 노래자랑 같은 온통 웃고 먹는 것이나 삼각관계의 남녀불륜을 다루는 드라마가 TV의 모두가 돼버린 그런 얘기들처럼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포맷은 하여간 자의적 흥미본위라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곁들여 지금도 라디오 건강프로는 나간다고 부언하면서-실제 KBS 3-R ‘건강365’에 출연 중에 있다, 2006~2007에 걸쳐 생방송으로 상삼을 곁들인 건강프로, PD의 교체 후 예정된 시일보다 빨리 출연을 고집하기에 시간이 없다하니 그것으로 끝이 났다.
나의 주장에 정당성을 이해 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요컨대 담을 쌓겠다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사실 TV라도 나이에 걸 맞는 토론이나 삶의 철학이 담긴 탐방 인터뷰라면 응할 것이다. 결국 오락성향의 프로엔 어찌되었든 나가지 않겠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뜻이며, 나이 때문이라는 것은 가능한 한 후배 정신과의사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것이 변의 핵심이라 부언을 빼지 않았다. 다행히 일단 넘어갔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중의 하나다.
나 자신의 방송사(放送史)를 돌이켜 보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런 사태가 발생한 것은 자업자득, 일종의 모순이 엉켜있었음을 확인하게 됐다. 원칙을 몇 번인가 어겼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출연을 할 때, 1980년대 남산에 있던 KBS 라디오에 출연을 했을 때는 오락프로도 많은 시절이 아니라 당연히 건강프로에만 참여할 수 있어 원칙을 생각할 여지 자체가 없었다.
고인이 된 양주동 박사와 서울 YMCA 강당에서 진행되는 동아방송 ‘수무고개’라든가, 고정출연을 하게 됐었던 MBC의 속사포 임국희씨 주부를 위한프로, 또는 심야 ‘별이 빛나는 밤에’-어느 날 술과 정신건강에 관한 얘기를 하게 되어있었는데 마침 친구의 무슨 잔치 날이라 전화대담으로 생방송을 친구 집에서 하게 되었는데 막상 내 자신이 다소 취해 내 방송야사 최대의 실수가 되어 그것으로 인연이 끊어졌던, 경계가 아리송한 경우들은 제법 있었다. 이계진씨(현 국회의원)와 신은경씨가 진행하는 KBS 라디오를 포함해, 황인용-강부자씨 프로, 김세원씨의 FM음악프로..... SBS의 임창기 프로 등 등, 고정출연만을 골라 따져보면 건강이라는 약방의 감초 같은 명분으로 등장하곤 했지만 엄격한 규칙으로 치면 원칙은 아니었을 것이다. 만일 1회성 내지는 단기 프로를 따지자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고 스스로 진행한 프로, 특히 MBC의 ⌜사랑의 교실⌟, 그리고 큰 딸 전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가족치료가 전공이다. 참고로 둘째딸은 한때 KBS 주부를 위한 TV프로에 공동 출연한 적도 있다. 두 딸과는 한 프로에, 막내 외아들 정신과의사는 나와는 별도로 TV에 출연했다. 그는 계속 출연교섭을 받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내를 포함해 3남매와 우리 부부 모두는 흔히 말하는 방송을 탄 셈이다.
과 공동 진행한 PBC의 ⌜사랑의 샘터⌟ 같은 것은 의학과 교양에 충실했던 것으로 자부할만한 것이었기에 전연 없었던 것은 아니다.

TV시대가 되면서, 스스로 만든 원칙에 결정적으로 3번인가 정면으로 걸려들었다.
MBC TV에 아내와 함께 불려나가 결혼생활에서 서로 말 못할 비밀에 관한 실없는 얘기, 그리고 KBS TV의 호텔음식 품평회 같은 프로라든가, 뭔가 알아 맞추면 동물인형을 상으로 받는 프로가 그것이었다.-이들은 당연히 고정출연이 아니라 1회성이었으나, 변명 같지만 아주 흔쾌히 나간 것들은 결코 아니다. 출연요청을 하는 PD의 입장을 고려해서였다. 하지만 대선주자들에 대한 검증잣대를 들이밀면 여지없는 거짓말이 된다. 미국 민주당 대선주자 오바마가-하버드시절 주차위반 딱지로 언론의 후보검증에 걸려(중앙일보; 2007.3.12), 놀랐다는 것에 비길만한 일은 아니지만 어떻거나 돌아갈 길은 없다. 1990년 이전의 일이긴 하지만 하여간 그랬다.
그 후, 종로시대를 마감하고 의원을 현재의 잠실로 옮기면서 종로2가 네거리에 1974.3. 개원한 후 방송활동은 강연과 더불어 전성기에 이르렀다. 1986년 아시아선수촌으로 입주하면서 출퇴근이 복잡해지는 대다 월세를 털고 자신의 명의로 된 사무실에 바로 집 앞에 의원을 개설한 것은 1991년, 그러나 방송사들은 놔주지 않았고, 출연교섭은 계속 이어져 나름의 원칙을 더욱 강화했다.
더욱 엄격하게 내 전문분야를 벗어나지 않으려 했다. 일요진단, 심야토론, PD수첩, 특별강연, 드라마게임(분석), 어떻게 할까요?, 생로병사, 스트레스를 이기자, 등 거론조차 할 수 없는 수많은 프로들과 뉴스시간의 짤막한 전문가진단에 응하곤 했었지만 KBS-TV 아침마당’이 처음 시작될 때 출연교섭을 받고 그 포로의 성격과 오락성에 관해 꼬치꼬치 따지는 바람에 PD의 심기를 건드린 정도였었다. 1990년대 초판 새로 시작되는 ‘아침마당“에 교섭을 받을 때 까탚을 부리는 이유로 송수식 정신과의사에게 그 역할이 넘어갔다.
김동근씨의 ‘흘러간 노래’의 출연교섭도 거절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미안하다는 마음이 없지는 않다.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 동기에 해당한-KBS 방송80주년 경성방송국(JODK); 1927.2.16. 방송이 시작된 후, 1935년 경성중앙방송국으로 개명되었다. 우리 방송사의 시발은 일본치하에 의해 진행되었다.
특집 이미자 특별출연을 보면서, 김동근씨와 나누던 다른 프로를 전후한 정담이 공연히 퇴색되는 듯 멋쩍어졌기 때문이다.

하기야 출연여부에 관한 원칙이 정해진 이유는 조금 단순하지는 않았다.
거만을 떨거나 잘났다는 착각에서는 아니다.-내 생각으로는 그렇다.
어느 날 고정프로 녹화를 마치고 방송국을 나서는데 뉴스시간에 방영될 전문가 진단이 필요하다며 한 컷을 찍자고 아는 PD가 잡았다. 응해주었다. 즉석에서 현관 밖에 세팅을 하고 시작된 녹화, 길어봤자 15초가 방영될 것을 알고 있는 나는 PD에게 물었다. 1분짜리? 아니면 10~20초짜리? 그리고 「칼」이라는 별명을-듣는 순간 비수같이 들렸지만, 재 확인받았다. 것도 몇 번이 아니라 한번에 해치웠다. 시도 때도 없이 병원으로 카메라를 들이밀곤 하여 이력이 생긴 나에겐 이유가 있었다. 장황하게 말을 하면 PD의 식성이나 방송사의 입장에 따라 편집을 한다는 점을 알아서다. 내 의도와는 다른 내용으로 바뀌기 십상이다. 편집을 할 수 없도록 필요한 시간만큼만 요약해 버리는 것이다. 3대 일간지 전화인터뷰역시 속성은 같아 대개는 거절하지만 응한다 해도 묻는 질문에 앞뒤를 바꾸어도 나의 의도와 크게 빗나가지 못하게 짧게 하곤 했다. 결코 자만심 때문이 아니라는 뜻이다.

나의 이미지를 바꾸자는 대목에서 나의 입장은 심각하게 굳어졌다.
하얀 가운을 입고 몇 회에 걸친 의료(醫療)단막 다큐? 아니면 드라마인지 배우 김지희씨와 레일을 타고 쫓는 카메라를 염두 하면서 말하자면 연기를 할 때의 일이다. 3회분이 끝나자 가발을 쓰자는 것이다. 나는 대머리였다. PD의 말로는 대번에 모발이 무성한 가발을 쓰는 게 아니라 듬성듬성한 가발에서 차츰 촘촘한 것으로 바꾸어가면서 이미지를 바꾸면 어떻겠느냐는 조심스런 의견이었지만 나는 단호했다. 거절한 것이다.(훨씬 전에 월간 중앙, 시를 곁들인 광고에 나의 이름을 빌려달라는 것을 거절한 적이 있었는데 돌이켜보면 순진한건지 착각이었는지 하여간 그런 정도였다.)
잇몸이 나빠 괴물처럼 이가 뻐드러져 나오거나, 안면신경마비로 쏠린 입을 마스크로 가리며 솔직하게 양해를 구하고 강연을 소화해 낸 고집(?)때문인지 넉넉한 마음으로 응할 수가 없었다. 대머리를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하지만 가발로 위장한다는 것은 꼭 시청자를 속인다는 기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싫었다.
그뿐 만은 아니었다. 출연료나 원고료에 까다로웠던 것도 한몫했다.
일간스포츠에 매일 연재되던 글을 마감하면서 원고료를 받아내자 문화부장인가하는 분이 갸웃했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1983~1984에 걸쳐 일간스포츠에 연재된 「성교육 외국은 어떻게」를 마치면서 고료를 청구했다. 당시의 관행은 필자는 선전비로 오히려 인사를 해야 하는 형국이었다. 막상 나는 그것을 정확하게 몰랐고, 결국은 고료를 수령했다. 그 후에도 1995년도 「섹스 & 비유티」를 포함해 다양한 연재가 진행되었다.
방송국에서 바우쳐를 모아 한꺼번에 출연료를 탔던 것은 탤런트들이 수백만 원씩 받아가는 것을 보자 출연 때마다 나오는 돈이라 해봤자 너무 초라해 한꺼번에 목돈을 타자는 심사가 작동했지 싶다. 내 전성시대는 출연료나 원고료는 원래 PD나 기자들의 몫으로 치부하는 것이 상례(?)였기에 그것이 나를 더욱 완고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내 분야이외엔 나서지 말자는 쪽으로 기울도록 한 두터운 이유다. 출연료를 당당하게 받자는 뜻이다.
“얼마나 내고 출연하는 거야? 제법 돈을 써야 한다던데?”
때가 되어 인간관계라는 차원에서 한잔 쏠 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나에겐 취약점이 컸다. 그런 면에선 수가 잘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기가 딱 막힐 수밖에 없지만 열이면 열 똑 같은 질문에 까 보일 수도 없는 일, 시대적 상황이라며 내가 소화하는 도리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럴수록 나의 정체성은 더욱 까다롭게 발전했던가 보다.

이유는 또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진짜 결정적인 것일 수도 있다.
나에게는 사람을 웃기는 재주가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신명나게 그야말로 배꼽을 잡고 복통요절 하리만큼 웃기는 재주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평생 다섯 손가락 안에 있던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것도 의도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뭔가 코드가 맞으면 그런 경우가 있었다. 오락프로에 나간다는 것은 이래저래 그런 끼를 살릴 마음도 시간도 열정도 없던 나로선 엄두를 낼 형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동현상이랄까 혐오감이 자극되어-스트레스대책에 一笑一少를 강조하는 마당에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쓸모가 있다 없다가 아니지만, 지금도 오락성 TV를 보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부전자전인가-아들은 몇 년 전 이사를 하면서 거실에 아예 TV를 없앴는데, 참 잘했다고 여겼다. 며느리와 손녀들이 동의한 점이 대견하다 여긴다.

차제에 한 가지 더, 방송국마다의 다른 사정을 부언해 두는 것도 야사일 수 있을 거라 여겨 적어둔다.
유신시대엔 타임지가 굵은 먹줄로 지워지거나 아예 거북한 페이지는 찢겨 나오던 시절 방송국마다 분위기는 완연히 달랐다. 종로 5가에 있었던 기독교방송국은 출연자를 손님대하 듯 왔소, 갔소, 하는 식이었다. 광화문 네거리의 동아방송은 매우 가족적이라 전화로 예정된 내용이 결정되면 방송에 관한 사전조율은 아예 없었다. 기독교방송국도 그런 점에선 비슷했다. 문화방송은 정동시대는 더 그랬지만 여의도로 가면서 PD가 방송될 내용에 대해 미주 왈 고주 왈 의견을 부탁하며 결국 단서를 달곤 했다. KBS는 어떤 식으로 준비해왔는지 꼬치꼬치 묻고 따지며 교정보듯-실제 될 것만 골라내는 검열이었을 정도로, 관료적이었다. 동양방송은 그런 점에서 동아방송과 문화방송 사이쯤에 해당되었다. 한두 PD의 성향을 두고-고정프로가 대부분이었지만 여기저기 다양한 일회성 프로에 줄 것 호출되다보니, 자연스럽게 관찰된 분위기에 대한 평은 단편적이 아니다. 때에 변이 생겼다.
전두환씨에 의한 12.12군부가 정권을 잡으면서 1980년 방송국의 통폐합으로 동아방송은 없어졌다. 몇 년째 고정출연하던 이선미 아나운서와 함께 꾸렸던 ‘행복의 구름다리’ 마지막 회(1980.11.30.)를-동판으로 남아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구할 수도 본 적도 없다, 석관동 동명성결교회 밖-아내가 다녔던 교회로 바래다주고 나는 신자가 아니라 예배시간동안 밖에서 기다리며, 주변 골목 차 안에서 떨리는 나 자신의 녹음된 방송을 들으며 울분의 일단을 감추지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후엔 KBS로 통합되어 방송국에 가면 방송될 원고가 인쇄되어 일일이 검토한 후 수투디오에 들어가곤 했다. 한 가지 더 달라진 것은 경비가 삼엄해졌다는 점이었다.

나에게 「칼」은 시간만이 아니라 칼 같은 고집과 칼 끝 같은 뾰족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던 셈인데 지금은 한결 무뎌졌다.-규칙은 아니지만, 이유는 간단하다.
우선 불러도 내키면 가고 아니면 그만이다. 전자메일이 있어 내용을 받아 검토하여 생방송으로-녹음은 1주일분을 한꺼번에 하면 벌이도 괜찮아, 하니 좋다. 녹화는 질색이다, 누군가 이 사람 아니면 저 사람의 NG가 다반사라 시간이 아까워 지겨우니 그게 없는 생방송이 한결 간편해서 그런 모양이다. 경비가 철저한 특별 주차장에 세우게 해 주는 예우도 이유이지만 거듭 강조하는 것은 하여간 나의 입맛대로 선택할 수 있는 마음이 좋다는 것이다.

KBS 본관 건물 정문으로 들어설라치면 이산가족 찾기 때 애절했던 사연들이 빽빽하게 나부끼던 모습과 방송국 내의 알 수 없는 오늘 날의 이념과 향방이 멋대로 부딪치는 것에 대해선 그 의미를 다분히 의도적으로 외면해서 편할 수도 있다. 잘 하는 짓인지 그것은 분명치 않지만 일단 마음은 가볍다는 뜻이다.
그나저나 늘 느끼는 것이지만 방송을 끝내고 집으로 향하는 차 속의 음악은 유난히 언제나 경쾌하기만 하다. 그것을 즐기며-진정한 행복은 좋아하는 일을 마무리한 다음 휴식을 취하고 그로 인해 새로워질 때 얻어진다는 점, 그렇다고 그것으로 영원히 행복이 지속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 다니는 것은 아닌지 자신도 알 수 없을 때가 대부분의 경우다.
다만 분명한 한 가지, 나는 비평가가 아니다. 평론가도 아니다. 역사학자도 아니며 소설가도 아니다. 연예인은 더욱 아니다. 그저 정신과의사일 뿐이다. 아니 남자,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왜 이런 글을 썼을까? KBS 80주년으로 연상이 됐기로서니 참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다. 여의도로 왕복하는 길을 얼마나 더 고민하며 즐길 수 있을지 다만 그것을 모르는 것만이 현재로선 확실한 현실일 뿐이라는 것, 그것만 알고 있을 따름이다.

자유로울 수 있는 방송, 그 내연의 뜻은 나와, 내 밖의 사정에 의한 것들인데 그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있었으면 한다. 그것은 아예 방송에 출연하지 않으면 모두가 깨끗하게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이다.
아내가 소파에 앉아 책을 펼치며 말한다. 창밖의 따스한 햇볕, 베란다의 꽃들, 그리고 고통이 없는 집,
“아이 참, 좋다!”
종종 듣는 표현이다. 나는 이런 감정을 느껴본지 오래다. 왜일까?
“내 영역 밖의 것, 거기까지 관심을 놓지 않는다는 것, 당신은 당신의 영역 안에서 족할 수 있기에 ‘좋다’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 같은데, 왜 나는 내 영역 밖까지 힘도 없이 끌어안고 있는 거지? 좀 가르쳐 줄 수 없어!”
아내가 부럽다.
영상매체에 유달리 응하지 않겠다는 것은 변명이 다소 궁한 듯하지만 사실 일종의 자유를 위함이다. 거리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이러니저러니 불만을 품고 다녔던 청소년기와는 정 반대로 날 알아볼 수 없는 거리를 넉넉하게 거닐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영역 밖은 놓겠다는 것이다.
모두에게 맞는 얘기인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산다는 게 뭐 그렇고 그런 건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