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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混沌) 덧글 0 | 조회 7,448 | 2018-05-30 17:30:46
관리자  

혼돈(混沌)

2014.04.13.

정신과의사 정동철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 으래 우린 왁짝지껄 반듯하게 걸어가는 법이 없었다.

- 저 나무, 거기까지 눈감고 갈 수 있어? 내기하는거야!

효제국민학교에서 혜화동으로 가는 길, 이화동 네거리를 지나면 길가 플래터너스 가로수가 언제나 듬직한 길잡이었다. 놀이감으로 더 정확했겠지만...

- 그래, 까짓것 누가 못해 뭘 줄건데?

짤랑짤랑 두 손 조막만한 속엔 구술소리, 딱지도 돼... 나부터한다.. 해방 전일거다. 1945년도의 얘기다.

 

구술은 이미 딴 것처럼 만만하게 눈을 감고 걷는다. 한발 두발 이내.. 캄캄하다. 플래터너스나무 커다란 기둥이 와락 달려들어 이마빡에 탁.. 주춤 손 이리저리 짓고 다시 한발.. 아니 개울에 꼭 빠질것만 같다. 개울까지의 거리는 넓은 포도라 한참인데.. 와당탕 나무기둥에 부딛는 듯 번쩍, 화들짝 눈을 뜬다. 고작 세발에서 한 발을 내밀고..

- 졌지? 내가 보여줄게..

세명인가 네명 아무도 그 뻔한 나무를 눈감지 못한다. 구술은 그 손에 그대로..

인적 드물다. 개울건너 대학인지 뭔지-10년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거기 다닐줄 누가 알았나, 거기 대학인줄도 몰랐다. 한길이 넘는 개천. 무슨 짓을 해도 거기 빠질 일은 없었다. 눈을 감으면 사정이 달라진다. 빠지는 것도 그렇지만 그놈의 가로수 나무가 와락 덤벼들어 코피가 터질 것 같은 순간의 그 캄캄절벽 도저히 눈을 뜨지 않고선 배길 수가 없다.

 

아침의 탄천 잔디밭, 운동장 밝혀주는 높다란 쇠기둥 조명탑 그 하나의 주변은 사방 100m가 넘는 편편 시멘트다. 아무도 없다. 부디칠 것이라곤 눈씻고 찾아도 없다. 기둥은 150m쯤 앞이다. 걷기로 한다. 목측을 하고 좌우를 미리 살펴두고 50보만에 눈을 뜨리라, 눈을 감고 한발 두발 그리고 세발... 숫자가 늘수록 중심은 흔딜리고 앞은 캄캄해진다. 이미 감은 눈 캄캄하기로 처음부터인데.. 부디칠 듯 더는 아니다. 눈을 뜰까? 아니면 서서 손으로 사방을 휘저어? 위치를 어림하고 다시 시작해?

열 발을 넘기지 못하고 뜨고 말았다. 세상에 80년 넘게 다리를 믿고 걷고 뛰던 길바닥, 대체 초등학교때부터 얼마나 더 걷고 걸어야 바른 길을 당당하게 가려나?

 

다시 시작했다. 하고 또 했다. 결국 어이없게도 30보가 나의 한계다. 이목구비와 위치감각이 고장난 것도 아닌데 이건 어이없다는 표현보단 일종의 혼돈(混沌)이다. 이렇게 모르다니.. 하물려 넓고 넓은 이 세상속에 으시대고 나의 존재를 뻐기며 지껄이고 있는 나, 이거 맞는 건가? 혼돈, 계속 혼돈이란 단어에 포위되어 읽어 줄 사람도 없을 글이다. 이제 쓸 이유, 아니 엉뚱한 판단, 제발 그만 써야 할 때다. 한데 개버릇 남주랴 버리지 못한다? 혼돈속에서 혼돈을 잉태할 뿐인데..

 

혼돈이란 왕이 있었단다. 장자(莊子)에 나온다. ()과 숙()이란 두 왕을 초대, 후하게 대접, 작별인사를 하고 나온 두 왕,

- 혼돈 말일세, 얼굴에 이목구비(7개의 구멍) 없으니 얼마나 답답하겠나, 가서 우리가 뚫어주면 어떨까?

돌아와 연유를 말했다. 좋겠다고, 얼굴에 7개의 구멍 하루 하나씩 뚫었다. 드디어 마지막날 박장대소 모두 기뻘할 때 이게 웬 일, 혼돈이란 왕 글세 죽었다는 얘기다.(송지영 역해,1975; 莊子. 동서문화사. 서울. p199)

 

뭔 뜻일까? 한마디로 세상의 얘기, 세상 돌아가는 품새를 보고 듣고 말하고 느껴 알긴 하겠는데, 그만 혼돈 자신의 본래정체는 그 속 어딘가에 묻혀 없어졌다는 뜻인가보다. 이즘의 세상사를 보면 조금은 알 듯 하다. 뭐가 앞뒤고 어떤 것이 좌우인지 말의 자유가 너무 많아 진짜인지 기찌얘기로 세상사가 돌아가는 건지, 넘쳐나는 정보에 그만 갈피를 잡기도 그렇지만 결국 그걸 판단할 자신의 본성(本性)이나 정체가 오염되어 진짜가 뭔지 도무지 알길이 없어진다. 내가 그렇다. 나 자신의 생각이 바른 건지 다른 사람의 말이 맞는지 알수가 없다. 혼돈에 빠진다. 그래서 그랬던가보다. 모를 일이다. 나만 그렇겠지만, 해서 읽을 사람없는 글을 쓴다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너무 허전해진다. 당장 그만두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머뭇거린다. 올리지도 못하고.. 아는게 글쓰는 것이라 써봤지만 글세다.

 

솔직히 누가 뭐라든 나만 혼돈스럽지 않기만 하면 되겠다 싶긴 하다. 옳고 그름은 본시 나의 영역밖이라 자신 어디선가 떠 오른 것을 그냥 적어본 것이다.

허하기로 허전함은 텅빈 하늘 같기만 하다. 그래서 밥 딜런은 노래로 불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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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이 올려다 봐야 진짜 하늘을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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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어야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음을 깨달을 수 있을까...(밥 딜런,-양응모 옮김. 2016; 바람만이 아는 대답. 문학세계사, 서울. p.316)

 

내가 혼돈의 죽음과 같으니 나의 본성은 이미 없다.

동일가치의 노동. 동일수준의 임금이란 조항(복거일, 중앙 4.15.)이 헌법에 명기되어야 한다는 이 현실에 주절거리는 내가 웃우워보인다.

뉴스는 초대손님의 고견을 들어가며 시간마다 보고 듣고 또 보고 듣는, 똑같은 어린시절 메뉴 말고는 건질 것 없으니 조용히 끈다. 그놈의 폐병으로 숨 고르며 소식(消息)이라도 알까 싶어 틀지만.. 지금은 대학로, 해방될 무렵 1945년쯤의 그 망막했던 부디침같은 것 여전하니 말이다. 하기사 나도 대학시절 서울역주변에 친구랑 얼찐거린다고 거칠게 항의하다 파출소까지 끌려가서도 뻣댄 적 없진 않았지만 요즘의 2030대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그냥 평화와 자유이란다. 자신들의 행복 그것이 전부다. 블록체인세대 꼭 가상화폐만은 아니다. 그래서 인터넷세대를 보고 꼰대라 하는 형편, 30대의 김정은도 꼰대? 하물며 나같은 노인 달라질리 없고.. 그냥 아무말도 하지 않는 것이 그들을 돕는 것, 알면서 주책, 한심할 뿐이다..

지난 옛날 동아일보 탄압에 나의 상호로 버젓이 광고를 냈던 용기, 그게 용기였는지도 혼돈스럽다. (2018.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