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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찌는 천재 덧글 0 | 조회 15,604 | 2009-04-17 00:00:00
정동철  


- 꼴찌는 천재 -

시간을 거꾸로 올라가 할아버지가 할머니와 결혼하기 전에 내가 할아버지를 살해하면 나는 당연히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양자론(量子論)에 의하면 설명이 가능해진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모순’이라고 알려진 물리 학자들의 이 아리송한 얘기는, 이 세상엔 사실상 평행(平行)한 여러 개의 우주가 가능한데다, 인과(因果)법칙과 필연성에 묶여 있는 뉴턴의 시각과는 달리 양자론 입장의 우주관에선 어떤 사물이던 확률적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꼴지 교실’이라는 이상스런 캠프가 있다.
중학생을 중심으로 학교 성적이 꼴찌가 되어야 가입될 자격(?)이 있는 교실이다. ‘야학’에 간다는 마음으로 주말을 이용해서 그 어린아이들 앞에 서곤 했었다. 그들 어버이들을 상대로 일단 강의(?)를 하고, 이어서 꼴찌들에게 나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주-1)
꼴찌가 천재라는 생각을 나는 가끔 갖는다.
양자론(量子論)의 확률을 바탕에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서열이 매겨져야 하는 우리의 현실에선 어차피 누군가 꼴찌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것은 실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가령 전교 일등만 모인다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학생 중에서도 꼴찌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그가 ‘꼴지 바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엔 1등을 했을 것이 뻔하다.
많은 청소년들이 걸핏하면 인용하는 말이 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옳은 말이다. 그렇다고 공식은 아니다.
표현 방식이 문제의 핵심이다.
존재(存在)한다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뭔가 표현되어질 때 그 존재는 비로소 존재 가치를 지니게 된다.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우주 생성과 별의 생멸(生滅) 등 자연의 실체가 그것을 말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표현을 한다.
이른바 네 가지 힘이라는 것부터가 그렇다.
중력(重力), 전자기력(電磁氣力), 핵력(核力), 그리고 양력(揚力)들이 표현의 일종이며, 제5의 힘이라는 척력(斥力)도 그렇고, 부단히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중성(中性) 미립자(微粒子)의 유령 같은 소립자(素粒子)도 역시 뭔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주-2)
꼴찌의 존재는 무엇일까?
그때, 그 상황에서 그렇게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연유에 의한다고 본다. 지진아(遲進兒)로 태어나 지능이 따라오지 못해서이거나, 두부(頭部) 손상에 의해 이차적으로 지능이 떨어져 꼴찌가 되는 것도 실은 바보가 아니다. 다만 그 개체로서의 표현 중 하나일 따름이다. 그것을 우리의 양비론(兩非論)이나 서열(序列)의 틀로 보면서 바보라던가 천재라고 대접을 달리한다.
대부분의 꼴찌는 뇌의 기능상의 문제가 아니다. 하기 싫든, 집중이 안되든, 어수선하든, 놀이에 빠졌건 하여간 그가 처해있는 현실에서 그렇게 밖에는 표현할 다른 방법이 없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영원한 챔피언이 없다고 한다. 영원한 일등도 꼴찌도 있을 수 없다. 더더군다나 민주 사회의 다양성(多樣性)에선 이것은 진리다. 사람마다 지니고 있는 재능의 표현이 수시로 변하거나 뒤늦게 때를 만나 강렬하게 나타날 수 있는 까닭이다.
어린 눈망울들을 보면서 나는 무척 힘든 강의를 했다. 꼴찌가 바보로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무능하게 생각되지도 않기 때문에 할 말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이유다. 당사자들은 자존심이 구겨지고 어버이들은 성적을 올릴 수 있는 기적(奇蹟)과 같은 절호의 기회가 되지 않을까 흥분할지 모른다. ‘교실’은 제법 만원이다. 운영자는 어떻게 해서라도 성적을 올려놓겠다는 것이 신념이다. 역설적이지만 누군가를 대신 꼴찌로 채워놓겠다는 뜻이다.
‘꼴지 교실’이 잘못 됐다는 생각은 전연 아니다. 성적(成績) 서열에 연연하기 보단 사람마다 지니고 있는 표현 능력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특성과 개성을 갖고 있는 것이므로 바로 그것을 있는 그대로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표현력을 사장(死藏)시켜 놓는다는 것은 일종의 낭비에 해당한다. 그늘에 앉아 무력하게 자신감을 잃고 ‘나는 안 된다’며 넋 나간 사람처럼 있게 한다는 것은 비극이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나는 ‘will과 ’well을 구분하지 못했었다. 그러고도 7.4:1이라는 대학 관문을 곧바로 통과했다.(주-3) 6․25전쟁 이전 나의 표현 능력은 책가방을 집어던지고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친구들과 신나게 노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었다. 성적은 당연히 형편없었다. 공부로 표현 방식이 돌아선 것은 갑자기 친구가 없어졌다는 데서 비롯됐다.
부산으로 피난을 가고 보니 모두 부둣가에서 돈을 벌어야 했었는데 나는 집에서 빈들거리고 있었다. 책이 비로소 눈에 들어 왔다. 칠흑 같은 굴속을 헤매다가 스스로 문제를 풀어 가는 묘미를 느끼게 되면서 대학을 향한 구체적 계획이 머리 속에 떠오르기가 무섭게 가속이 붙어 버렸다. 갑자기 머리가 좋아진 것이 아니라 표현의 방향이 바뀐 것이다.(주-4)
사람들은 자신의 값을 잘 모른다. 사실 알기 힘든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세상에 분수 것 살기가 힘든다는 것은 대체로 이 때문이다.
<조선 민담>에 ‘두개의 돌’이라는 얘기가 있다.
개울가에 돌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좀 높은 곳에, 그리고 하나는 낮은 곳에 있었다. 낮은 곳의 돌은 늘 졸졸 흐르는 물 속에 있어 물고기들을 보며 시원하게 있었지만 높은 곳의 돌을 부러워했다. 밝고 따뜻한 햇볕에 있는 모습이 좋아 보였던 것이다. 한편 높은 곳의 돌은 물 속의 돌을 부러워했다.
어느 날 극심한 가뭄으로 물 속의 돌은 그리던 세상으로 나왔다. 정말 좋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이네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고기가 헤엄치며 노니는 물 속이 그리웠다. 그러던 어느 날 홍수가 났다. 높은 곳의 돌은 소원을 풀었다. 드디어 물 속에 잠긴 것이다. 그러나 흙탕 물 속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어지럽기만 했다. 물이 줄자 다시 하늘을 보게 되니 가없이 좋았다.
마침 나는 호주 블루 마운틴에서 비취(翡翠) 광석(鑛石) 하나를 기념품 가게에서 사온 것이 있었다. 누군가 손으로 탁 잘라 논 고구마 같이 볼품없는 작은 돌이다. 한데 그 잘려진 부분에 못생긴 고구마의 하얀 살처럼 비취색이 반짝이고 있었다.
똘망 거리는 눈들 앞에 그 돌의 서로 다른 부분을 보여주며 예의 예기와 더불어 나의 체험담을 말해주곤 했다.(주-5)
서열(序列)이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 자신의 값과 존재(存在)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아는 가운데, 자기 소리로 표현(表現)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 곧 모든 ‘교실’의 의미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진면목(眞面目)을 아는데서 가능한 일이라고 보는 것이다.


(주-1): 세종대학교 앞 어린이 공원은 육영수 여사의 숨소리가 있는 곳이다. 그 역내 외진 곳에 한옥이 있다. 거기에 최정씨가 ‘큰 나무 꼴찌학교’라는 것을 개설하여 나는 정기적으로 출강을 했다. 지금은 이미 대학생이나 사회인이 되었을 그들 중의 누군가가 내 주변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2001. 12)
(주-2): 지구상의 모든 물체는 생명의 유무를 떠나 힘에 의해 그 자리에 있으며, 또 존재하고 있다. 그 힘이 만유인력과 같은 중력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힘이 밝혀지고 있음을 말한다.
(주-3): 1954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의예과의 경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막강한 실력의 대결장이었다.
(주-4): 1952년 당시 나는 영도 남항동에 살고있었다. 또래의 친구들은 먹고살기 위해 모두가 부두로 갔다. 미군 군수품을 하역하는데 순전히 사람의 어깨가 필요했다. 나는 거기에 갈 이유가 없었다. 어울릴 친구가 없었다. 불가피하게 보게 된 것이 책이었다.
(주-5): 나는 그 돌을 정말 요긴하게 썼다. 시드니 올림픽 유치전이 한창이던 때에 불루 마운틴 폐광에 수없이 널려있던 돌 하나를 사온 것은 지금도 나의 서재 한 곳에 있다. 비취와 볼품없는 돌 자체의 양면을 보이며 그들에 준 교훈은 자신에 늘 강조되기도 했다.(200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