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수필
게시판 > 수상수필
받을 뿐 언제나 빈손 덧글 0 | 조회 16,998 | 2009-04-17 00:00:00
정동철  


- 받을 뿐, 언제나 빈손 -(1995)

우연은 준비된 마음을 선호한다고 파스퇴르가 말했지 싶다.
「동창」이 된 것은 정말 우연일까? 어떤 준비된 마음이 있었을까?
의사가 되겠다는 준비된 마음이 있었던 것은 분명했지만「서울 의대 14회 동창」과의 관계를 갖으리라는 어떤 예상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저 운명이라는 단어를 여기에 끼어 넣어도 되는 건지는 확실치가 않다.
하지만 따질 일은 아니다. 분주하게 치닫기만 하다 문득 눈을 떠보니 이른바「환갑 놀이」라는 프로그램이 졸업 35주년 기념 잔치의 메뉴로 선택되었고,「동기 동창회 회장」이라는 수식어가 머리에 올라붙게까지 되었다. 이나 저나 길고 긴 세월이었다는 생각이다.
재미있던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신나는 일, 자랑스런 일, 그러나 고되고 역겹고 외로운 일이 없었을 턱도 없다. 선(線)이 점(點)의 연속이듯 어차피 인생은 문제 해결의 연속인 이상 희비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때문인가, 가끔 파격(破格)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본다.
적어도 30여 년 동안 어찌되었거나 진찰실이라는 울타리에 갇혀「뇌(腦) 운영(運營)체계」는 거기에 고착되었고, 사회와의 호환성 같은 것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오로지 치료가 전부였다.
“서울대학교에서 공부를 했다는 것에 혜택을 받았다는 점을 알아요? 국민의 세금으로 적은 학비로 공부할 수 있었다는 것, 잘 모를 거요? 그만큼 세상에 빚을 진 셈이지, 정 박사!..........”
청량리 뇌병원의 원장이셨던 최신해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솔직히 몰랐던 일이다. 내 머리가 좋아 서울대학교에 들어갔고 그래서 등록금을 적게 낼 수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한데 특혜를 받았다는 사실에 잠시 어리둥절했었다. 대체 내가 도와달라고 애원한 사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 그 분의 말씀에 저항감을 지우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흘렀다. 세브란스를 졸업하신 최 선생님은 입장이 다르다고 했었다. 사립과 국립의 차라는 오래 전의 얘기다.(주-1) 한데 그 말씀은 계단식 대학 강의실로 껑충 뛰어 연결(連結)되었다.
강의실 밖은 비가 추적거리고 있었다. 기생충학의 기용숙 교수님의 얘기다.(주-2)
“여기 아르바이트하며 공부하는 학생 있으면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그만두는 게 낫지. 의사가 되면 돈을 챙길 테니 그건 자격 미달이 되네. 학생들,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나?”
당시 우리들은 웅성거렸다. 돈 없으면 공부도 하지 말라는 말이냐고 제법 저항감이 여기저기 조용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말 대신 헛기침이 전부였다. 감히 손을 들고 말 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주-2)
빚을 갚아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지금 진찰실을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빈손이 되지 않으려는 마음만은 그 의미가 엇나갈 때마다 회초리처럼 눈앞에 어른거리곤 한다.
부(富)와 지식(知識)의 재분배(再分配)라는 의미를 생각했다. 가능한 놓지지 않으려 애썼다. 결과는 그러나 늘 신통치 않았다. 받았을 뿐 빈손이었다. 시선(視線) 집중이라는 환각(幻覺)에 빠져들거나 우쭐대기 일쑤였다. 말 할 것도 없이 제 잘난 멋과 자랑으로 가득했다. 방송국에서, 강연에서 재분배를 내세웠지만 누가 뭐라던 내가 잘났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재작년 Science지는 그해의 분자를 멋있게 묘사한 적이 있었다.「무소식이 희소식(No News is Good News)」라면서「NO, Nitric Oxide」가 선정된 것이다. 올해는 DNA Repair Enzyme(1995년)이 차지했다. r거드름에 고착된 나의 운영 체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들이다. 관계가 있어야 하리라는 것을 비켜가도록 방관한 셈이다.
비상수단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빈손의 의미를 조금씩 알게 된 것이다. 파격(破格)의 경험이나 그 삶이 있었든 없었든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덕택으로 살고 있음에 모래알 같은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종교적 얘기가 아니다. 여생(餘生)을 멋과 맛으로 장식하겠다는 이기심(利己心)과는 전연 의미가 더욱 달랐다.
비로소 목숨과 지식인의 의무 중 무엇이 더 소중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옆 꾸리에 비수가 날아온다 해도 해야할 말, 밝혀야 할 진실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용기가 바로 빈손을 대신하는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것이 받아왔던 대가(代價)여야 한다고 다짐했다.(주-3)
불행하게도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정치적인 것이었다. 정책상의 문제, 나라 운영상의 문제, 인권상(人權上)의 일들이 걸려있었다. 한 시대의 것이 아니라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모두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주-3)
그럼에도 나는 남 앞에「언제나 빈손」이였다는 것을 지울 수가 없다. 철들기도 어렵지만 말처럼 당당하기도 어려웠다는 이유다. 조그만 생색에 거창한 수식어들을 긁어모으려는 것이 불행하게도 나의 현주소다. 철이 들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현주소일 뿐이니 답답하다.
답답한 것은 그 때문이지만 아직 갚아야 할 시간은 남아있다는 위로 속에 자신을 달래고 있음에 한 가닥 희망이라면 희망을 지니고 있다.
계속하여 아직 남은 빚을 갚을 날이 있기에 다진 마음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확인하곤 하는 것이다.(주-4)
하지만 그것을 과연 누가 알 수 있겠느냐는 아내의 충고는 분명한 숙제다. 그것은 그러나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늘의 구름을 처다 본다. 적어도 그것만은 분명하게.......



(주-1): 1954-1960 사이의 학비는 사립대학에 비해 적어도 1/3에 해당되었었다.
(주-2): 미생물학자답게 우리는 늘 미시적 대상이었다. 1958년 어는 비오는 봄, 교수님은 계단식 교실에 때맞추어 시작한 강의에 학생들이 부랴부랴 뒷문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하신 말씀이다. 학생 때 해야할 공부를 못하면 영영 하지 못할 것을 알고 계셨다. 특히 1954년 우후죽순처럼 생긴 의과대학, 가령 카도릭 의대의 동급 학생들을 대하면서 역시 서울대학 의대 학생들이 다르다면서 그러기에 더욱 강조하신 말씀이다. 제발 의사 됨을 돈벌이에 응용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는 간절한 주문이셨다. 사립대학의 학생들이야 어찌되었든 적어도 당신의 제자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주문이었다. 두고두고 뼈에 사무친 말씀이란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돈을 밝히다보면 결국 의료 사고가 생긴다는 뜻이었다.
(주-3): 알아듣기 어려운 톤으로 1956년 자분자분 말씀하시는 교수님은 당시 병리를 가르쳐주시던 윤일선 교수와 막상막하로 늘 듣는 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씀은 적어도 나에겐 생을 두고 아주 의미 있는 삶의 뒤안길을 지켜주었다.
(주-3): 노동자를 결코 저버리지 않겠다던 김 대중 정권의 <국민의 정부>는 노동자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고, 결국 2001년 6월 15일 남북 대화 1주년 기념에 즈음한 민총련의 데모로 동대문 경찰서장이 넘어지자 기왕의 무차별 도청과 계좌 추적을 합리화하는 정권 재창출(?)로 이어지게 되었다. 때마침 북한 상선은 제주 해협은 물론 북방 한계선을 보란 듯 유린하였으나 오히려 정부는 북한 상선에 무력 저지를 하지 않음으로 해서 국제적 망신을 피하게 됐다고 해명했다. 때마침 우리의 꽁치 잡이 민간 어선이 조류에 쓸려 북방 한계선을 2km넘자 북한의 총격을 받은 대가로 대한민국 정부의 처벌을 받아야 했다. 과거의 정권과 차별화를 기대했던 국민은 얼떨떨한 형국이다.
사회적 현상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데 익숙해 급기야 지식인에 대한 공격에 나섰고 그 한 형태로 언론에 대한 세무 조사가 시작되었다. 조선일보 2001년 국내 10대 뉴스에 언론사 세무조사와 대주주 구속이 선정되었다.(2001. 12. 22.) 의사는 2000년 醫藥分業 때문에 집단 폐업으로 맞서 싸우다 결국 2001년엔 부정 과다 청구를 일삼는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되면서 역시 세무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나 역시 정기 조사라는 이름 하에 10일간(2001. 7.)의 조사를 피할 수 없었다. 급기야 세상은 현 대통령에 대한 彈劾論이 정가에서 공방을 주고받는 사태로 발전되고, 추미애 민주당 국회의원은 기자 앞에서 지식인과 언론을 향해 비어를 사용했다. 술김에 한 것이 공공연히 신문에 날 정도로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라고 자찬하는 대변인의 당당한 주장으로 나의 면담 실은 조용하지가 않았다. 입에 담지 못할 말이 쏟다지곤 했다. ‘대중이라 대중 대중하니 나라꼴이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다. 군사 정권도 아닌데 말소리를 낮추는 것이 이상했다.
(주-4): 그러기에 2001년 나는 계속 인터넷이나 논문을 통해, 아니면 글을 통해 할말을 하고있는 중이지만 결과는 미지수다. 위험 수위가 높은 곡예 중이나 잘 넘어갈지는 모르겠다. 2001년 박달회 수필집에 <가로등, 지금은.....>이 그 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