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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과 바나나, 그리고 꿈 덧글 0 | 조회 17,043 | 2009-04-17 00:00:00
정동철  


달걀과 바나나, 그리고 꿈
2007 8/12

방금 일식집에서 나왔다. 큰 사위가 딸과 함께 방이 아니라 홀 스툴에 앉아 사준 점심인가를 먹고 괜찮은 집이 있다고 외우듯 나와 나의 차가 어디 있는지 두리번거렸다.
“저기 있네요!”라고 의외로 서비스공장 일꾼 같은 젊은 친구가 가르치는 곳을 확인하고 나섰다. 당연한 길을 따라 돌아서 가보니 도무지 2371-나의 차번호, 는 아니었다. 이상하다 싶어 다시 차-그 가까운 거리를 왜 차를 타고 왔는지, 를 의아하게 여기며 다시 돌렸다. 차창너머로 보니 보였다. 막상 길을 따라가니 보일 듯 그곳이 아니었다. 이리저리 답지 않게 지형을 오르내렸다. 길눈이 밝다고 자부하는 나다. 지척에 두고 뱅글뱅글, 심지어 차에서 내려 차가 있음직한 곳을 확인하고 다시 가면 거기가 아니다. 황당했다. 답답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때에 타고 있는 차의 키로 관심이 옮겨갔다. 가만 보니 움직이고 있는 이 차의 키가 나의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키가 맞는 까닭에 움직인다는 원칙에 이르자 ‘바로 이게 내 차가 아닐까?‘ 생각한다. 자동차 키는 맞지 않고선 움직일 수가 없다. 분명히 키는 내 것이다. 결국 움직이는 이 차는 내 것이라는 결론은 논리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분명한 이치다. 그러나 찜찜하다. 내 차로 여겨지지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꿈이었다.

그때인가?
결안, 삶은 달걀이 생각났다.
겉은 누렇다. 껍질을 벗기면 하얗다. 다시 흰자를 벌리고 나면 노랑이다. 겉과 속은 같은 오방색의 말 그대로 노른자위의 노란 색이다.
내 속에 정좌하고 있는 마음의 색깔은 무엇일까?
뒤 미쳐 바나나가 떠올랐다.
겉은 역시 누렇다. 껍질을 벗기고 보면 하얀 향기와 같은 흰 쪽이다.
과연 나의 정체는 노랑일까, 아니면 하얀 색일까?

보통 입양아들이 자조적으로 자신들을 스스로 비유할 때 삶은 달걀에 빗댄다고 한다. 교포2세는 바나나. 겉은 모두가 황인종이지만 그것을 벗기면 둘 다 흰 서양 사람이다. 하지만 교포는 그대로 속까지 흰 색이지만 입양아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하얀 색이 자신의 정체성과 어딘지 이질적이라는 본능적 의문에 사로잡혀 결국 노란색, 황인 족이라는 짙은맛을 감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심 정체성의 중심엔 한국인의 누런 색깔이 발하지 않고 생래적 그대로 건재하다는 것이다. 정체성이 그렇게 노른자위처럼 자신도 모르게 자리 잡고 있음을 느낀다는 얘기다. 미국태생 교포2세는 이미 그 문화권에서 성장되어 흑인이 백인이듯 그들의 정체성 또한 미국화 되어있다. 유전자와 상관없이 정체성은 그대로 하얗다. 유전정보와 정체성은 같지 않다는 증거다. 적어도 알맹이는 학습이 더 우성이라는 것이다. 사실일까? 이민 간 교포2세는 같은 교포2세라도 삶은 달걀이라고 하니 그렇게 인정해야 될 모양이다.

대체 나는 꿈에서 내 차를 타고 다니면서 내 차를 찾다 뒤늦게 알아차리긴 했지만 그게 내 차 같지 않아 찜찜한 자신의 차를 이리보고 저리 확인하며 머리를 굴리고 있다. 증거는 키가 맞기에 움직이고 있고 그 키는 내 것이라는 논리적 증거 하나뿐이다.
과연 나의 삶, 나의 미래, 나의 행복, 나의 가치, 나의 정체는 무엇일까? 바로 내 속에 나와 함께 있으련만 나는 경계인처럼 두리번거릴 뿐 이질감 때문에 먼 곳에서 그 정체를 찾으려 버둥거리고 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 짓을 반복해야 할 것인지 그게 의문이다.

연신내에서 내부순환도로를 따라 분당으로 오는 길은 상쾌했다.
순환로에 올라타면 신호등이 없다. 두 번 다 기분이 매양 시원했다. 그러나 집이 가까워질수록, 아니 해암(海岩)-나의 아호를 딴 아들의 병원,이 멀어질수록 어른거리는 환자들, 중년 몸에 사겨진 문신을 보며 “그래 동지들 잘들 있나요?”하니 하심(下心)으로 「달이 보일 듯 말 듯」 한다면서 모두 정리되었다던 친구가 퇴원을 해 서운했지만, 꽤와 아픔이 똘똘 뭉친 허우대 멀쩡한 친구의 목구멍을 검안용 불을 비추며 임파선을 만져 본 후 “자, 아픈 것은 의사의 몫, 알아서 할 것이니 자네의 결심, 인생 공부하겠다는 마음 잊지 말고 같이 힘을 보태도록 합시다. 알겠죠!”, “네! 그러겠습니다.”라고 곧게 섰던 머리가 힘없이 숙여진 또 다른 모습과 더불어 수 없는 남녀환자들의 호소들이 나의 핸들을 만지작거리는 느낌으로 뭔가 어정쩡해졌다. 몸은 집으로 마음은 환자 곁으로 역주행하는 현상, 그 속에서 의사이기에 의사가 할 일을 했다는 것, 그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읽고 자위하는 듯 결국 시원한 오관의 계기판과는 달리 뿌듯한 마음의 스케일은 상쾌하다는 것과는 달랐다.
의대생이 외래치료를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어린애 같고, 서울음대생은 본격적으로 분노를 치료받아야겠다며 퇴원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자신의 정체성 가까이로 접근해가는 감동을 느끼며 다시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의 노른자위, 그 색깔은 무엇이더란 말인가? 그나저나 있기는 한건가? 있다면 어디에?
꿈이라는 파수꾼-나는 꿈의 심리적 기능을 그렇게 정의하고 있음,이 그토록 타이르듯 일러주건만 마이동풍? 손가락만 보면서 「달이 보인다」고 하고 있지 싶다. 독수리처럼 높이 날아-상심(上心), 훑어보고 있는 중이다. 내 안의 나를 보려는 것은 이론뿐이다.

추도 1주기, 8월23일.
중, 고교 이래 그가 죽는 날까지 죽마고우로 유난히 덥던 지난 해 청계천에 다녀와 돌연히 사별한 친구의 기일이다.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의 차이가 이상기온의 비바람 따라 번개처럼 밀려온다.
한 해 동안 나는 산자로서 그가 누리지 못한 어떤 삶의 의미를 경험했나? 오관을 통해 근육들을 부지런히 움직여 다시 되먹게 되는 느낌, 평화? 행복감은 고사하고 평안, 그것을 가지고 있었는지 의문이 아니라, 불안, 걱정, 염려, 울분, 슬픔, 그리고 뭐 힘든 것들의 연속이 일년간 거둔 삶의 결산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황금을 주고도 죽어가는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없으니 오늘 하루가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시간 인가!라는 금언은 정말 허구가 아닐까?
비교할 수 있는 차원에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죽은 자의 세상을 모르기 때문이다. 삶이 죽음보다 낫다는 어떤 평안함도 나의 1년 결산에선 그러나 찾을 수가 없다는 것, 그것은 결국 삶의 의미가 그만큼 퇴색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뿐이다.
삶은 결안, 얼핏 것과 속이 다른 듯, 그러나 알짜 속은 겉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과연 나의 실체는 뭣인가?
파도가 없으면 바다가 아니고 문제가 없으면 인생이 아니라는 경험을 통해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안목으로 살면 그것이 삶의 정체 이겠거니 생각하지만 나의 정체성은 「모른다」이다.
합장하며 “힘드시죠. 무엇을 도와들일까요? 어떻게 함께 해 들이죠?”라고 다짐하고 그럴라치면 찰나적 동안(童顔)이 된다는 것을 설사 조금은 느끼고 있다 해서 그것이 나의 정체라고 말하기엔 역시 설명이 빈약하다. 겉과 속 사이에 낀 하얀 이론이 나의 정체는 아닐 터이니 말이다.
그러나 먼 곳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서 보이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이나마 다행이라고 여기고는 있지만 핵심은 알 수가 없음이 답답하다. 아무래도 내 차 같은 그런 기분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내 차라는 것을 이해할 뿐, 나의 정체성은 나와 어딘지 이질감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다.
자신 속 가까이 담고 다니는 동질적 자신의 정체성으로 “힘드시죠? 괜찮으세요? 어떻게 함께 도와들일까요!” 미소 가득한 일체감을 과연 언제 변함없이 지니며 그게 나라고 여기며 살 수 있을지 아득히 멀기만 하다.

멀어도 가기만하면 만나긴 만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