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와 개미
2018.07.06.
정신과의사 정동철
어떤 운명,
매미는 떠났고 개미는 그 언저리에서 뭔가를 찾는다. 생사(生死)? 매미의 날아간 영혼?
사진 한 장, 올렸다 지움
오늘 아침 6시경 슾길 파란 잎 아래 선명하게 허물 벗은
누런 매미껍질-주인은 조만간 숫톰이면 암컷유인 위해 로래를 부를 것, 그 잎 바로 위
제법 큰 개미 한 마리 오락가락 허물의 앞발주위를 맴돈다, 왜지?
순간 포착. 그러나 여기 용량의 한계로 올리지 못해 독자의 상상에 의존하기로 한다.
냉혈 동식물, 나 온혈(溫血) 사람인데 시체같은 냉혈감 하체에 번진다. 허물벗고 이미 죽은 매미, 세상떠난지 두어달, 살아있는 개미에 접근? 그 반대대. 인간은 동물보호를 강조 사랑? 심해(深解) 열화구(熱火口)가 고향이긴 모두가 마찬가지지만, 천만에 반려견은 목줄로 자신의 의사결정권이 박탈된다. 매미와 개미는 전혀 그들 선택권에 간섭이 없다. 나 인간, 사랑의 가면써도 여의치 않아 영혼을 향한다? 이중적 사랑? 모르겠다.
여름이다. 창밖 무더운 더위에 멀리 능선들 초미세먼지 없어 가까이 선명하다. 나의 하체는 이불속에서 뼈까지 시린 시체라니 알 수 없는 이치, 아내의 말이 떠오른다.
늙은이들, 여름에 뜨거운 물 마시라 해요. 열잔 이상.. 근데, 잠간 왜 그래요? 안색이.
“잘 있어~요...여~보..!”
“무슨 얘길..?”
하하 깔깔 웃음으로 넘긴다. 떠날 듯 쇼였으니까. 신문보며 흐른 시간뒤에 아내,
“농이라도 그런 말, 나 우울해져요.. 웃으며 삽시다...”
매미는 허물 벗으려 세상에 먼져 자리를 잡았는데 개미란 놈 뒤늦게 왜 넘보고 기웃, 똑바로 보려고 안과에서 레이저로 두 눈의 백내장울 벗겨냈다. 글 쓸 수 있는 연유,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시체같은 하체다. 매미의 허물 비교할 것 없지만 그 주변 넘보는 개미라고 따듯할 리 없으니 연상되는 바보같은 생각. 우린 상호 무관원칙에 냉혈처럼 충실하고 있는데 엉뚱한 상념들, 아내의 말이 발단인가? 시체같은 다리겠지?
“노인은 뜨거운 물 마셔야 한데요. 체온이 내려가면 올리기가 어려워 늘 그렇게 습관을 들여야 한답디다.” 반복되는 얘기.
분명 느끼는 것은 덥다. 오뉴월 더위에 이불을 뒤집어쓰고도 하체는 뼈속까지 시리다. 오래지 않은 얼마 전에도 그랬다. 새벽3신가 그 전후로 깨곤하던 시간, 체감은 하체가 시체다. 함에도 구지 더위를 타는 몸 이불은 걷어자고 있다. 그래서가 아니다. 일상 체감온도로 돌아오는 시간이 의외로 두어시간 이상 길었다. 이리 저리 만져본다. 차다. 발끝은 따듯하다. 체온이 오르기 이렇게 힘들다고? 노화현상의 하나, 뇌의 체온조절장치, 한옥의 두꺼비집이나 아파트 정문 차단기 작동이 무뎌지는 것은 상식이다. 저체온증으로 명을 달리하는 경우가 노년에 많은 이유다. 지금 내가? 왜일까?
대학생때 봉화군 춘양역을 거처 석포역 산골 산판,(매형의 침목벌목현장 방학답사,1956년) 땀에 쪄든 함바로 가기 위해 영주역에서 갈아타듯 생사(生死) 두매산골로 갈아타는 역은 없겠지? 삶과 죽음 생멸(生滅)의 간이역은 물론 어쩜 교량이라든가 굴에서 나오자 매미와 개미의 갈림길? 그런건지 모르겠다. 전연 그 의미 짐작 조차 되지않는 터다. 설사 전구(前驅)현상 안다한들 순간의 생사 변성(變性) 알 리 없긴 마찬가지, 모르겠다.
웃으며 마주본다, 이런 저런 주변 얘기들 끝에,
“나, 안 받기로 하면 좋겠는데., 조의금이든 무슨 조화 같은 것 말야..”
거의 반사적으로 아내 말한다.
“우리아들 결혼식 때 받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나도 그래요. 내가 떠나면 그런 것 없기로 합시다.”
아들 결혼땐 하필 ‘화환 사절’ 청첩장에 적고 왜 축하금 얘기가 없었는지, 오히려 반대로 해석될 소지 뒤늦게 알고는 당황., 아내는 구지 알리려 하지도 말자 덛부친다.
‘낮의 회초밥 과했는가 봐요.. 괜찮을까..’ 소화장애 심해 처방에 의존하는 아내, 대학교수 큰 딸이 걱정하며 사온 회초밥 2인분 나도 먹었다.
“여보! 10분 됐어요. 눈에 발라요...!”
“발라? 뭘 발라..?”
“참, 정신머리하곤, 호호~하.. 넣어요, 넣어줄께요? 나 괜찮겠지..?”
안약까지 잘 챙기면서? 그나저나 왜 이리 덥지, 나란 존재의 내력 별것 아니것만 너무 죽끓듯, 이어지는 얘기로 한참 까르르 넘어가다 아내가 내놓은 수박, 아내는 조금뿐.. 난데없이 아내의 눈엔 아리아리 물기 그렁그렁.. 며칠전 아들도 그랬던 것처럼,.
‘내가 아나, 네가 아니? 그날은 생각보다 가까이..’ 아내에게 같은 말 한적 없다. 생각은 이미 있었던가 보다.. 막상 나는 간이역이든 철교든 굴이든 매미와 개미의 생사 경계선, 오늘 아침 떨어지는 마지막 꽃잎 순간포착 또한, 뭐든 스스럼 없기에 냉장고에서 나온 수박, 문득 뭔가를 알이첸다. 요양원엔 가기 싫다는 아내의 표정과 더불어,
알면 자판기로 글은 쓸 수 있다. 휘드르는 필설(筆舌) 그러나 눈이 뿌열때 당연한 오타 수정할수 없다는 사실, 인생사 시행착오다. 생사를 떠나 세상 온통 뿌옇게 보였던 까닭은 내 눈의 고질적 감성편향 ‘미네르바(지혜의 신)의 부엉이’(헤겔의 ‘법철학 요강’’중에, 1820.-‘부엉이 산’도 모임도 아니다)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정적 치료를 위해 편향 오진 수정할 능력 깡그리 앗긴 탓이다. 어둑해야 난다는 부엉이, 김치국부터 마시지 말라는 의미? 시작은 끝-결론을 알려주지 않아서일 것이다. 지독한 불행이다. 얼마나 무서운가? 난해한 오늘의 우리 이 현실이? 수박만이 유난히 시원하다. (2018.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