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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와 행복 덧글 0 | 조회 16,809 | 2009-04-17 00:00:00
정동철  


대화와 행복
글·정동철(신경정신과 전문의)
한우리(현대해상-2007.9. 행복시리즈 5)

살맛 나는 대화가 필요하다(가제)
내 말만 들으라고 강요하는 사람,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해 숨통이 막힌 사람이 너무 많다. 사람 냄새 나는 대화, 살맛 나는 대화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이다.

“빵과 권력만으론 살 수 없잖아요? 지쳤어요. 정말 지쳤습니다.”
대꾸 자체가 용납되지 않는 남편의 성질을 더는 견딜 수 없다는 여인의 호소다. 그녀의 남편은 세상을 호령하던 검사 출신의 정치가로, 평생 호통과 명령을 대화라 여기며 살았다고 한다.
“자식들이요? 모두 잘 됐죠. 남들 눈에는 성공했다고 합디다. 그런데 성격이 애비를 닮아 괴팍해서 온전하게 가정을 꾸리고 사는 아들들이 없어요. 부자간(父子間)의 얘기라는 것도 피 터지는 전쟁과 같습니다. 조선말기 대원군처럼 호통뿐이니, 결국 이렇게 저까지 갈라서게 되네요.”
많은 사람들이 가정에서의 대화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가족 간의 대화를 들여다보면, 대부분 밥상머리에서만 유효할 뿐이다. 그나마 일방적 훈시의 썰렁한 대화가 끝나면 뿔뿔이 제 방으로 흩어져서, TV나 컴퓨터와만 대화 아닌 대화가 진행된다. 한 지붕 모두 남남인 셈이다.
지붕이라는 말이 나와서 얘긴데, 한 지붕 아파트엔 30가구 이상이 살고 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면서도 옆집에 시신(屍身)이 있는 걸 보름이 지나도록 아무도 모를 만큼 사람 사이에 대화가 사라진 지 오래다. 프리츠 파펜하임이 쓴 <현대인의 소외>라는 책을 보면, 지갑 속의 플라스틱 사회적 관계는 수없이 많지만 로봇처럼 기계적인 컴퓨터 문자에 의지할 뿐이라 인간적 정(情)이라곤 어디에도 기대앉을 자리가 없다고 한다. 대화는 고사하고 소외감 이외에 느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게 현대인의 처지라는 얘기다.

오관(五官)을 차단하면 길어야 3일을 버틴다
20년 전, 당시 자살률 세계 1위의 나라인 헝가리를 여행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지금의 한국 사회의 모습과 같은 구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화가 없었다. 사람은 있어도 속내를 터놓고 얘기할 상대가 없어서 사람들이 고독하고 불행했다. 바다는 없고 사방으로 구릉지만 펼쳐지는 곳이 헝가리다. 시키는 대로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 도시나 농촌이나 한결같은 공산주의에는 평등하게 잘 산다는 표어 아래 만나는 것도, 보이는 것도 천편일률적이었다. 숨통을 틔우기 위해 술에 의존해서 순간을 넘겨보기도 하지만 결국 그 후유증은 자살로 이어지기 쉬웠다. 수다스런 변화가 없는 곳은 죽음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 한국인의 자살률은 세계적으로 높다. 앞에서 예를 든 여인도 그러했지만 제대로 대화를 하지 못하고 숨통이 막혀 질식사 직전의 사람들이 널려 있는 현상은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큰 문제이다.
죄수를 독방에 가둔다는 것은 특대한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을 독방에 가두어 두면 환청과 환시로 인해 정신병에 걸리게 된다. 우주인 테스트에서 확인된 바에 의하면, 오관(五官)을 차단하면 길어야 3일을 버틸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를 쓴다. PC를 통한 네트워킹으로 ‘싸이질’을 하고 ‘댓글’을 달고, 온라인 동호회를 통해 대화를 한다고 요란하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모니터와의 관계일 뿐이다. 대등한 양방향 대화가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대화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몸짓으로 하는 대화는 도처에 널려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감정이 복잡한 전화선과 같이 꼬여 있기 때문에 그런 비언어적(非言語的) 대화는 전달 과정에서 주소가 엇갈리는 배달 사고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윙크를 하면 사랑이라고 덥석 껴안았다가 성폭력이 되기도 하고, 그냥 무심코 쳐다본 것을 가지고 시비가 붙기도 한다. 몸의 제스처나 사인은 오해와 망상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의 욕구만을 관철해야겠다는 바람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대화보다 구체적이지 못한 몸짓 언어는 자칫 대화의 길을 막아놓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극단의 경우에는 흉기를 휘두르며 싸우는 끔찍한 사태를 만들기도 한다.

대화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신뢰가 우선돼야
대화라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 있고, 듣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 안주거리로 타협이라는 묘미가 있어서 한바탕 깔깔거리며 웃을 수 있을 때 사람 냄새가 나고 살맛이 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각종 구호와 이해만 앞세우다 보니 껄껄거릴 일이 도통 어디에도 없는 것이 아쉽다. 대화 코드가 엇나갔다 하면 사람들은 아예 입부터 봉해버리고 만다. 대화는 고사하고 속만 부글거리니 결과는 병이다. 모두가 산송장들인 것이다. 할 말이 혀끝에 올라서지만 입을 차마 벌리지 못하니 질식 그 자체다. 그게 아니면 소리부터 질러보는 것이 전부다. 훈시에다 괴변을 늘어놓는 정치인들의 대화 방식이 만연해 있는 터라 그런 현상이 딱히 이상할 것도 없다. 나라도, 기업도, 학교도, 그리고 가정까지도 같은 형국이다.
칠순에 조금 철이 들어 아들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꼭 환자만을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이런 마음을 가지고 대하려고 하지. ‘힘드시죠? 얼마나 어렵습니까? 어떻게 함께해 드릴까요?’라는 식의 마음 말이야. 그러고 보니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이 아주 동안처럼 밝아 보이더라고. 얼마나 갈지는 모르지만···.”
정신과 환자는 불행하다. 모든 정신과 환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화를 잃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형세를 판단하기를, 언제나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에 두거나 아니면 반대로 눈치만 보기 때문이다. 자기만이 옳거나, 자신만이 모자라다는 것이다. 당연히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세상에 자신만 있거나, 아니면 반대로 아예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 착각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우리는 직장이나 학교에 가면 오리엔테이션을 받는다. ‘이곳은 뭘 하는 곳이고, 저 사람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다’ 하는 식으로 정보가 주어진다. 그러나 막상 자신에 대해 오리엔테이션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생각 자체가 없기 쉽다. 그래서 자신의 정체성이 가짜로 포장되어 있음에도 스스로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게 된다. 자신을 왕으로 착각하는 사람에겐 제대로 된 정체성이 없고, 그런 사람은 타인의 얘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듣기보단 역정만 낸다. 자신의 주장만이 지상 최선이라 믿는 망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스스로를 바보로 여기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피해망상’이라는 표현만 다를 뿐이다. 이런 경우, 행복이 “여보게 나 여기 있네!”하고 툭툭 치며 함께할 리가 없다. 널널하게 웃으며 듣고 말하면서 상대와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는지 이야기할 수 있는 신뢰가 없다면 대화에 의한 행복이라는 것은 먼 나라 얘기일 뿐이다.

이 글을 쓴 정동철은 정동철 신경정신과의원 원장이다. 스트레스 관리, 성 문제, 자녀 교육에 관한 전문가로서 방송 출연, 칼럼 기고, 강연 등의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여성의 정신건강>, <삶의 디딤돌>, <성과 성교육> 등 다수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