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기적 유전자?
2018.08.04.
정신과의사 정동철
슬픔이여 안녕!
싹수가 원래 노랬다. 책을 죽어라 보지 않았다. 책상이 아예 없었다. 그시절의 대개가 그렇긴 했다. 밤상을 펴면 바로 책상이다. 책을 놓고 공책에 배껴쓰고 뭔가를 풀고 그러나 전연 남의 얘기였다.
책상과 밥상은 하나다. 책과 밥이 하나라는 사실을 눈치첸 것은 김동인의 ‘젊은 그들’을 읽고나서였다. 호기심이 발동된 탓으로 출발했다. 중학교 2학년,
“옷 벗어!”
펴자마자 시작된 명령, 여자에게? 읽기시작했다. 뒤미쳐 전쟁이 터졌다. 다시 밥상과 책상은 하나, 책상 자체가 없었다. 피난살이라는 이유 말그대로 이유였다. 그 전에도 없었으니까. 피난살이, 책은 소설에서 교과서로 바뀌었다. 수학과 물리는 저만치 앞으로 달렸다. 아마도 부둣가 하역으로 먹고 살아야할 처지가 아닌 탓이었을지 모른다. 아니 그렇다. 하여간 책이 친구였다. 미국으로 간 젊은 물리선생때문, 고교시절이다.
수색역을 갈 일이 있었다. 뭔 일인지 기억은 없다. 신촌으로 가는 언덕길 그땐 버스가 유일했다. 타고 보니 여대생들, 이화대학생들뿐이다. 달랑 남자라곤 대학생 나뿐이다. 꽉 차진 않았으나 앉을 자리는 없고 마땅히 설자리도 어정쩡 손잡이와 씨름, 그럴 수밖에 진흙길 버스는 좌우 울퉁불퉁 요동치며 이리저리 덜컹거렸다. 여학생들중 우정 휘청 안길듯 까르르 난리가 났다. 여기저기 노골적 입담이 음담에서 몸으로까지 번졌다. 빨개진다 빨개진다며 결국 붉게 물들이고야 만 그들, 내가 노상 다니던 버스속 여학생들이 가끔 놀림을 받았지만 그들은 전연 태연했다. 난 뭔가, 사내놈 습기라니.. 나중에 안 일이지만 걸죽한 친구들 얘기 역시 나와 같은 급이었다. 당할 도리가 없었으니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상상초월이다.
요즘 성평등으로 내지르는 바에 따르면 남성학대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난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아예 없다. 웃기는 것이 그땐 반반한 이대생들 졸업하지 못했다. 안했다. 3,4학년에 결혼한 것이다. 못난이로 통한 학생들만 졸업을 한다는 얘기였다. 말이 되나? 1950년대 후반, 뱃지를 다는 것이 유행이던 시절(서울대 의과대학 의예과는 문리대소속이라 네모형 문리대뱃지와 의예과용 하얀 뱃지 둘이 있었다.) 의대생들은 쉽게 그들에 나뀌었다. 정확히 말하면 부모들이 가만두질 않았다는 얘기다.
비로서 책상과 그리고 책꽂이 책장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다. 대학생이 된 후 내 몫으로 말이다. 놀라운 것은 막상 그 간절했던 책상과 책장이 마련되면서 공부를 놓기 시작했다. 책상과 밥상이 하나, 책과 밥이 하나라는 인생성공사례가 남의 얘기가 됐다.
- 나는 결코 청진기를 들고 살지는 않을 것이다. -
대입 공론화(公論化)가 헛바퀴를 돌았다며 공론(空論)이라 한다.
따지고보면 생명체는 원래 이기적이다. 공론화의 허점일 듯, ‘마녀의 빵’(오 헨리 1862~1910)이란 단편이 스친다. 허름한 화가가 사가는 빵, 허구한 날 갑싼 빵, 가련히 여긴 빵집 아즘마 빠다를 발라 맛있게 싸주었다. 화가 나 달려온 화가(畵家), 작품을 망쳤다고, 목탄화를 지우는 식빵속이 지우개, 빠다로 망쳐버렸으니 오죽하랴. 과연 사람들의 마음을 공론화란 그럴듯한 이름으로 구석구석 이른바 숙의민주주의를 내세우는 것처럼 사람들의 속내를 옳게 알아낼까? 여론조사는 어떤식으로 묻느냐에 따라 결과가 확 달라진다. 통계의 허구는 익히알고 있다. 오지랖 ‘마녀’ 탓한들 이미 속내와는 다른 결론, 진흙탕 신촌으로 가는 언덕길의 버스속 과연 남성학대였을까? 아니다. 이른바 ‘김영란법‘(법 자체만을 의미)으로 인정(人情)을 수학적으로 꾀 맞추자니 결국 오히려 소신과 의연함과는 멀리 포악하고 악의적 댓글로 다라났다. 욜로나 소확행만 내세우고 빈부차를 부자들의 착취로 덮어씨운다. 누진세라는 것이 그래서 있는데 더 내는 돈이 악덕으로 악마가 된다. 적자생존의 유전자 발현원칙보다 우선하는 것이 법? 할말 없다. 노벨상이 없다는 것만 다행일 뿐이다.
슬픔을 함께하는 마음은 사라졌다. 조그만 행복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위해 슬픔을 공유한다는 것은 사치, 오로지 ‘나’뿐이다. 어짜라고? 원래 유전자 나의 정체는 이기적 유전자의 결과인데, 그 유전자의 발현(표현)이 곧 나 아닌가? 정자와 난자의 유전자 반반씩 물려받은 나의 원형은 당연히 이기적이다. 왜 유전자가 있을까? 나의 생존을 위해 적자생존은 원칙이다. 이기적이란 것은 종의 번식을 위해 불가피한 법칙이다. 이타적 공론화? 인간들이 그려놓은 천국을 향해 얼마나 마음들이 진화됐을까? 땀흘려 앞서가지 않고선 진화, 성공은 없다. 오락가락 아~ 피곤한 인간들, 웬 외계어들.. 뭔 충(蟲)들이 아닐까? 안다. 이유가 있다. 후성유전자(後成遺傳子)란 것이 있어서다.
나의 건강유지 유전자, 그리고 질병유발 유전자(스트레스 포함)를 생각해 본다. 어떤 내용의 유전자가 수정되는 순간 결정되었는지 그건 내가 알 수 없다. 건강이든 질병이든 물려받은 유전자가 발현(표현/발생)되려면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의 열려라 문처럼 암호가 있어야 한다. 두 개의 문이 열리면 유전정보대로 나타날 것이고 닫히면 아무리 건강유지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도 능력발휘가 안된다. 여기까지가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리처드 도킨스.홍영남-이상임 옮김. 전면개정판 2010.을유문화사,서울./정세훈,정동철:A Study of the Advanced Therapeutic Model of "TGS and Oh Easy" Program related with the Epigenetics and the Neurocognitive Recovery in Alcoholism,2016.지성병원부설 해암뇌의학연구소.)에 의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수정되어 물려받은 나의 유전자가 발현되려면 수정된 후에 DNA염기서열의 변화없이 생활양상 여하에 따라 분자생물학적 조정으로 건강유지 유전자가 또는 질병유발 유전자가 변해 발동하리라는 사실말이다. 나는 폐암으로 수술 1년 반, 지금 아무런 치료를 받는 게 없다. 다 낳은 건가? 아니다. 바로 후성유전학(Epigenetics;쉽게쓴 후성유전학.리처드 C.프랜시스.김영남 옮김. 시공사.2013.) 에 관한 의학적 의미를 조금 알고있기에 비교적 간편한 입장이다. ‘질병발생과 치유 모두는 나하기 나름’이란 결론을 양자물리학과 결부하여 이해하고 있는 탓이다. 상보적 DNA처럼 입자와 파장이란 두 경로로 동시 이어지는 양자물리학의 현상, 입자는 뇌, 파장은 마음으로 바뀌어 어떻게 마음이 작동하는가에 따라 앞에 얘기한 유전자의 닫힌 두 문의 개폐(開閉)가 결정 뇌(腦)가 변한다는 사실이 알려졌음이다. 복잡한 얘기다. 웃으면 복이와요 누구나 아는 말 바로 그런 마음이 분자생물학적 변형을 거쳐 열려라 뚝딱 닫혀라 뚝딱, 소확행 바로 그런 것이 해서 필요하게 된는 연유다. 남용은 문제.
문제는 생각보다 크다. 이런 의과학적 사실이 알려졌으나 구체적 개개인의 언행이 입중된바 없음은 물론 이런 사실 자체를 근원적 이치도 모르면서 나름의 결론을 마구 내지른다는 것이다. 가령 경제적으로 1:99란 불평등 피라미드사회에서 그 ‘1’ 구글을 향해 평등구호만 외친다고 될일은 없다. 물리적 힘으로만 진행되어가는 현실, 그것은 답답이란 뜻이다. 너무 전문적으로 가지 말자. 나도 한계, 실제 유전학 특히 유전자결정론(J. Watson과 F.Crick; 1953년)에 이어 후성유전학(Epigenetics; 20세기 C.H.Waddington사용, Karl Ernst von Bear에 의해 발의 Ernst Haeckel이 대중화)의 깊은 의미는 21세기 치료의 화두로 발전됐다. 초기단계다. 하물며 정치, 사회적 전용은 매우 위험할 것이다. 관련된 논문에 관심을 집중하는 중이다. 나의 암이 ‘나 하기나름’에 따라 천수를 누릴수도 암의 패자(敗者)가 될수도 있다. 그래서다. 날이 갈수록 무슨 심의위원회라는 번듯한 기관들이 많아진다. 시민단체들과 함께 과연 시민 대다수의 속내를 알고 동의된 주장일까? 아! 숙의민주주의, 웃보지 말라고? 엄한 경고 안다. 과학은 그러나 별개의 문제다. 1944년 2차대전말 독일이 암스텔담에 식량공급을 중단, 임산부의 기근으로 출산아동에 대한 인구동태학적 연구를 해보니 사회적 환경이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나 근거중심의 연구결과와 무관한 추리적 마녀사냥식 결론은 금물이다. 생사의 문제다. 아예 외면은 물론 무지 자체를 모르는 상태가 두렵다. 스트레스, 그것이 질병유발 유전자를 조만간 건드릴 것만 같다. 집단재앙일 것이다.
걸으며 생각한다. 냇물 가로지르는 다리에 ‘너구리 살고있으니 조심’하란다. 40여분 마지막 2~300m 시멘트 트랙을 뛰곤 턱에 걸린 숨 헐떡거리는데 청설모란 놈이 빠끔히 바라 본다. 골프장에서나 보던 청설모가 여기까지? 덕택에 생각 깡그리 살아진다. 헐덕거리는 숨속에 예의 명치 오무라들지도 않는다. 재생될 여유 없다. 다진다.
- 제발 잊자, 재생되는 기억의 잘난 과정일랑 우기지 말자! -
토요일 아침 신문의 표지사진, 소파에 비스듬 편하게 옆으로 앉아 책속에 삼매경, 대통령이 부럽다. 분명 책상과 밥상이 하나였을 거고 그래서 적자생존 고시를 합격해 파란만장 드디어 청와대의 주인이 되었으리라..
탐낼 대상이 아니다. 어불성설 몰라 하는 말 아니다. 달랑달랑 나갈새라, 전기라도 값싸게 마음놓고 쓸수있었음 해서다. 이 서재의 냉방 끈지 오래다. 거실에 냉방기 공기를 작은 선풍기로 땡겨 쑤셔넣지만 등에선 땀, 정작 자판을 두드리는 사이 예고없이 오그라드는 예의 명치, 책본다더니 성공도 못하고 벌떡 일어나, 아내 불안한 듯,
“제발 그만 해요, 네? 그렇게 힘든 것 왜 하죠? 또 증상이 왔구료..”
이런 심정과 처지들 공론화에 밑줄 그어질까? 책과 밥이 하나지만 위해서 적자생존의 법칙 이기적 유전자는 땀흘려 앞지르지 않고선 결코 이르지 못할 터라 타이르거늘 미련한 인간 불쌍하구나, 어쩌지? 나 말이다. 그나저나 ‘슬픔이여 안녕’은 나의 인간성 자체가 사라졌다는 의미 아닌가? (2018.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