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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정리 덧글 0 | 조회 7,133 | 2019-01-22 20:19:58
관리자  

마지막 정리

-世間兩件事耕讀-

2019.01.22.

정신과의사 정동철

 

농사나 짓고 사이사이 책이나 읽으면 족하련만 무슨 정리, 마지막 정리라니..

 

해가 바뀌면서 머릿속에 멤돌던 궁리였다. 지난 연말부터 어딘가 그래야할 것 같은 심정이라 이것저것 정리를 한답시고 우선 둘러보기로했다.

책장을 본다. 숨이 딱 막힌다. 엄두가 나질 않는다. 많다가 아니라 어떻게 정리를 하냐란 장벽에 걸린다. 앞뒤 책장엔 저서를 포함한 책만있는 것이 아니다. 대학시절 노트까지 산발적으로 끼어있다. 뿐인가 교재용으로 제작된 이런저런 자료들이 키를 넘는 책장을 매우고 있다. 어쩌다 출연했던 방송내용들이 아니라 여기저기 연속된 녹화장면들 너무 많다. 녹음 테이프들 역시 요소요서 초청강연내용들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정리를 해야하는건가? 왜 해야지? 일단 정리라는 단어가 끼어들면서 눈길은 사방 흐터진 구석구석으로 이어진다.

 

며칠전의 일이다. 병든 노년의 밥상이라 늘 고기가 올라온다. 거나하게 취한 친구의 되풀이되는 얘기를 듣다 내가 마시지 않으니 재미가 없단다. 대학동기들의 소모임이다. 그래서가 아니라 술 반의 반잔을 마셔 볼까 포장 하나를 뜯었다.

그런 술도 있었어요? 참 파란 사기병 예쁘네요, 어름잔? 얼마나 어름을 넣을가요?”

아내 술이라면 넌더리가 났던 과거, 답지 않는 얘기다. 안 마신지 2년은 되어가니까.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고급양주 이리저리 뜯고 병마개를 돌리는 순간 부스러진 코크, 전에도 와인병을 열다 같은 경험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양주까지?

떠오른 생각은 병마개가 아니라 집안에 널려있는 술병둘아더, 고급양주들, 종류도 다양한 술들 수무병울 간단히 넘었다. 대체 왠 술이 이리 많을까? 딱 김영란법에 걸릴 양주들이다. 족히 15년은 넘은 선물들이라 무심히 생각한다.

밖에선 술꾼이었다. 집에선 안마신다. 친구따라 마신 주당들, 덕택에 술중독환자를 치료하며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 문제는 이 술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다. 아들이나 사위들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시아선수촌에 살땐 아내가 단지내 외제가게에 팔기도 했던 모양인데 그런 곳도 없다. 다행스런 것은 의료보험시대가 된 후 그렇게 비싼치료를 받던분들의 선물과는 달리 선물이라는 것이 싹 없어졌다는 점이다. 병원도 아니고 개인 개업의사 그것도 외래만 보는 데 뭔 부탁? 인생사, 그래서 불평등사회에 현금복지가 쏟아지는가 보다.

선물하니 양복을 포함해 나의 옷들하며 넥타이 내 손으로 산 것이 거의 없는 형편이다. 심지어 양복 주머니 실밥이 그대로 살아있는 것도 발견됐다. 아들이 입던 투박한 군밤장수 막코트에 농구화로 살아가는 것이 편한 마당이라 입고 맬 일이 없다. 당연지사 이제 골치가 지끈거리는 형편에 이른다.

이어서 돌아보게된 집안, 고풍 벽거리며 병풍을 포함 그림들, 아예 침실뒤 베란다에있는 액자들, 눈에 뜨이는 다양한 자기들, 골동품, 제주 함지박 안의 과거사들, 뭔 옛등잔대들이며 세계 곳곳의 기념품, 아내가 모은 세계 여기저기 꼬마 조각들이며 시계, 아기자기 예쁜 모습들.. 숨이 찰지경이다.

 

손들을 불러 찜해두라 일러두는 것이 좋겠다는 마음이 들어왔다. 사연이 없는 것 있을 까닭이 없으니 마음대로.. 그러나 막상 그들이 찜할 것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여간 아들과 잔잔한 얘기라도 해야할 판이다.

 

통체로 병원에 있는 것을 포함 집자체를 쓰레기통에 넣으면 딱이란 생각이 치밀었다. 정리? 결국 나의 흔적을 남기겠다는 의도가 아닌가? 그럴 이유가 있나? 1963년 하와이에서 산 FM기기, 처음 생산된 GM 고급래디오와 전축 이제 강릉 소리박물관으로 가면 모르지만 어디고 남길 장소가 없다. 그럴 이유 자체가 왜 필요한지 생각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시체말로 명사의 박물관이랍시고 진열할 형편도 아니고 설사 그렇다해도 그게 무슨 소움이 될것이라 이리 복잡하게 머리를 굴려야 하나, 어이가 없다.

 

근대 문제는 정작 컴퓨터다. 연관된 USB는 물론 1.44M를 포함한 플로피디스크, 거기 논문들을 포함한 것은 물론 긴긴 다양한 글들 다양한 자료를 포함한 기록들, 컴퓨터 본체의 내용은 그야랄로 상상불허, 항목이 너무 많다. 대체 어쩐다? 그 속의 사진들에 이르면 난감해진다. 요즘 정리를 해주는 업체까지 있긴 하지만 이거 난리다. 서제정도가 아닐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결단, 바로 결단이 필요할 때인듯하다. 이순신장군대신 촛불이 광화문광장의 주인이 된다는데 달리 머리를 굴릴 이유가 없다. 바라기는 딱 지금 눈이 감기면 행이라 여길 심정이다. 손들이 다소 힘들긴 하겠지만 거기까지 내가 어쩐담. 일국의 대통령이 되어 왕조시대처럼 모두가 왕처럼 그런 마음가짐만 갖으라하는 시대도 아닌데 뭘 남기겠다고? 가벼워진다. 그러나 조금이다. 시간이 해결하겠지..

어차피 세상사 서로 다른 대립(對立), 책이나 보고 할 수 있는 한 환자를 도와주는 일을 하다 가면 그뿐 바로 그게 농사 아니겠나? 잡글이나 생각나는 대로 쓰면서...,

잠깐, 혹시 여기가 쓰레기장은 아니겠지? 늙은 탓이라.. 별 생각이 다.. (2019.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