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수필
게시판 > 수상수필
눈 안의 검불 덧글 0 | 조회 16,728 | 2009-04-17 00:00:00
정동철  




- 눈 안의 검불 -
2004. 06. 28.

성냥 개피로 쌓아올린 집, 어딘가 건드리면 폭삭 주저앉을 구조물처럼 나의 몸이 그러하다.
멀쩡한 허우대와는 달리 몰골이 뒤퉁 거린다. 넘어졌다하면 재기불능상태다. 팔로 버티면 팔목에 골절, 순발력을 발휘해 다리로 중심을 잡다간 요추가 삐끗, 만일 주저앉을라치면 여지없이 골반이나 고관절이 부서질 것이다. 덕택에 편할지는 모르겠다. 움직일 수 없어 자리를 보존할 것이므로 더 이상 천근같은 몸을 이끌고 다니지 않아도 될 터이니 말이다.

새벽에 눈을 뜨면 뼈마디를 맞추는데 시간이 걸린다.
서라벌 천마총에 묻힌 왕이 그 자리에 부활(?)하여 가지런히 놓여있던 뼈대에 영혼이 깃들면서 다시 맞추어져 일어나는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나의 몸은 시체와 생체사이를 오가고 있다.
실제 나는 복대로 몸을 버티고 있는 중이다.

탄천 둔치에는 마침 내가 눕기에 안성맞춤인 통나무의자가 있다.
걷는 감각마저 부실해, 제대로 걷는 것인지 아리송한 터에 멍청한 통증까지 뱅글뱅글 도는 허리를 의자에 대고 하늘을 향해 누우면 만고에 편함이 견줄게 없는 지경이다.
안개사이 연푸른 하늘이 보이는 것은 필연, 놀랍게도 거기에 희한한 그림이 늘 나타난다.
마치 괄호 같은 무슨 휴대폰 문자처럼, <( )>이 좌우로 넓어졌다 좁아지는가 하면 혼탁한 부영물과 반짝이는 하얀 별들이 멋대로 수영을 한다. 거기엔 현미경 속의 투명색 세포까지 되살아난다. 의대본과 실습실에서처럼.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알 턱이 없는 현상이다. 한 폭의 동양화, 아니 현미경 속의 떠오르는 슬라이드다. 괄호의 좌우를 확인하느라 눈동자를 굴린다. 자연스럽게 EMDR(Eye Movement Desensitization and Reprocessing) 즉 안구운동을 통한 치료 상황으로 들어간다. 고요한 평정이 보장된다는 치료효과는 나에겐 나타나지 않지만 하늘을 본다는 것은 편하다.

세상이 어지럽고 시끄럽다고 제법 지껄이는 것이 나의 두뇌다. 일종의 관행이다. 언제 시작되었는지 그것은 알기 힘들지만 일상이 되어있다. 안구운동의 약발이 들을 리 없는 이유가 아닐까한다.
“모두가 감정표현을 오버(over)하고 있어요. 시신 앞에서 정중하기는커녕 싸움 박 질이 아닌가요. 왜라고 생각하시나요? 자신의 감정, 자신의 존재를 강조하려니 오버하는 것은 물론, 아전인수식으로 이용하려는 민족적 치부가 거기에 끈끈하게 묻어있다는 것이 문제겠죠. 오버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지 않겠어요. 사건 자체도 패닉(공황)상태지만 사건을 대하거나 둘려 쌓인 형상들 자체가 패닉이죠. ”
고 김선일씨에 얽힌 사연들은 총체적 한국사회의 부실을 극명하게 들어 내주는 갈등과 욕망의 비빔밥을 보는 듯, 동아일보 기자의 질문에 응한 나의 응답이었다.
그러나 무릎을 꿇어야 했다. 꼬집기로 치면 둘째가라면 서러워 길길이 뛰는 나의 두뇌가 그 현미경 속의 검불 때문에 확 바뀐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괄호 안에서 살아왔다.
그것도 억세게 외골수로 괄호 밖을 보려하지 않고 살았다. 감히 괄호를 넘나든다는 것은 개벽이 아니고선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나의 두뇌는 도시의 시멘트처럼 철근까지 합세하여 숨구멍이 콱콱 막힌 옹벽 그 자체 속에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무능할 수가 없는 일이다.
도시 아무런 말도, 어떤 행동도 할 수가 없다니..... 이 난국에.....

문제접근의 패러다임을 바꾼 지는 오래되었다.
<왜>라는 질문보다 <어떻게> 문제를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할 것인지 그 방법을 바꾼 것이다.
그래도 이전의 그 <왜>라는 접근법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었다. 이제 결정적으로 그것을 바꾸게 된 것이다.

현 정권이 왜 생겼는가라는 질문은 중요하지 않다.
어디를 향해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하려는지 그것만이 관심의 대상이다. 우리의 미래가 걸려있는 문제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과거사 운운, 묘를 파서 대체 무얼 하자는 것일까? 설마하니 비용을 뜯어 쓰겠다는 그런 발상은 결코 아닐 것이다. 고귀한 민주화운동을 하다 떠난 선영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을 찾는 길이다. 알아내는 것이라는 뜻이다. 불행하게도 이점에서 너무 나는 무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너무 소란스럽고 야단스럽다는 것으로 혼란스럽기까지 하다는 것이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말을 할 수가 없다. 과연 이렇게 무능해도 되느냐는 답답한 노예가 된 나머지 단순히 눈을 감거나, 마음을 <비운다.>라는 것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점을 부스스 알기는 하지만 그저 갈 곳만 생각하고 있다.

오라할 때,
가라하기 전에
가리다.

파릇파릇 새싹,
자욱하던 봄
어제던가 마음 뿌듯하더니

짙푸른 숲 속의 산,
쏟아지던 여름
낭랑하던 소리 꽉 찼던가 싶더니

하얗게 헐벗은 산하,
끝인가 내일이면 겨울

겨울
오기 전 오라할 때,
가라하기 전에
가리다.
가리다 아주 멀리....
2007.11.12.(PSA 5.02)

너무 이기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