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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는 때를 기다린다. 덧글 0 | 조회 16,415 | 2009-04-17 00:00:00
정동철  


- 지혜는 때를 기다린다. -
1985~1990 사이의 글

할 말이 무척 많은 세상이다.
그러나 막상 할말이 전혀 없는 세상이기도 하다. 행여 무서워서가 아니다. 이 말을 하면 저쪽에서 쳐죽이고, 저 말을 하면 이쪽에서 또한 잔인한 보복이 번개처럼 날아드는 게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그것이 무서워 할 말을 못할 마음은 아니다. 그래도 어디선가 몸에 밴 토방의 홀아비 냄새야 피할 재주가 있을까? 옛말이 있으니 말이다.
부지런함은 값없는 보배요, 삼가 함은 몸 보호하는 부적과 같다.
이웃 선조(先祖)의 충고가 아니다. 한국의 조상, 우리의 할아버지들이 체험을 통해 얻은 뼈와 살이다. 눈을 트게 한 것은 공자(孔子)의 덕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우리의 몸에 터를 잡기까지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말로서 말 많으니 말 많을까 입술에 본드를 찍어 발라 쩍 부치고는 벙어리가 되어 두문불출(杜門不出)한 선비들이 처처(處處)에 때를 가리지 않고 허다했음을 뜻한다. 혀로 부지런하다간 목이 날아가는 판국에 입을 삼가 함이 몸보신의 으뜸이었을 터다.(주-1)

세상은 많이 변했다.
감히 듣도 보도 못한 생 떼 같은 억지가 드높기만 하다.
오늘의 세상사 대부분이 그래서 큰 소리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형편이다. 와장창 생사를 걸고 밀어 부치는 목소리에 기가 죽어버린 것이다. 할 말이 없어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참는 것이라 하지만 그건 허구다. 웃기는 얘기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때에 고리타분한 옛 얘기는 설득력도 혹은 동정도 받을 여지가 없다.
그럴만한 이유는 당연히 있을 것이다. 지난날의 군화(軍靴)가 너무 크고 무거운 것도 모자라 무지막지하여 그 자국이 지워지지 않은 채 가슴에 피멍이 남아있음일 것이다. 그것은 한(恨)으로 바뀌어 당사자만이 겪는 고통을 달랠 길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말이 없는 편이다. 문제는 주변 사람들이다. 더 큰 문제는 그럼에도 해는 거꾸로 돌아가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동정하는 주변 사람들이 북 치고 장단맞추며 아픔과 고통을 과거 속에 단단히 염습을 해 놓고는 현재에 들이댄다. 그것을 기회로 자신들의 이익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대개 정치적 색깔이 묻어있는 사람들의 짓거리다. 물론 일부이다. 그 일부의 목소리가 크고 과격하고 험악할 때 비록 그것이 부분이라 해도 전체를 압도하는 것이 마녀사냥의 현실이다. 세상은 그래서 할 말을 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사는 사람이 있다. 해는 내일을 위해 쉬지 않고 가고있지만 궤변(詭辯) 앞에선 달리 방법이 없는 모양이다.
‘날고 있는 화살은 정지 상태’라고 늘어놓은 것은 장자(莊子)였다. ‘굴러가는 달구지는 땅에서 떨어져 있다’는 말도 했다.
무한대(無限大)의 개념을 도입하면 틀린 말은 아니다. 날고 있는 화살도 마하시대의 순간 포착이란 입장에서 보면 서 있을 것이고, 구르는 달구지도 땅에 붙어 있는 한 움직일 수 없으니 얘기가 된다. 하여간 땅에서 떨어져야 구르니까 이치가 빗나간 것은 아니다.
과거사(過去事)에 무한(無限) 개념을 도입하여 소수점 이하의 한(恨)을 깡그리 풀어야겠다고 굿판을 벌인다면 과연 어디까지 가야 하는 것일까? 군부 독재에서 끝날 수 있을까?「미제 침략」(일부 걱정하는 용어를 빌린다면)을 외친다고 소멸될까?
따지자면 필경 일제 36년으로 거슬러 가야하고, 조선조 사색(四色) 당파와 이성계의 쿠데타까지 들추고, 결국 왕건의 고려 창업에 대한 정당성까지 가도 소수점 이하의 한(恨)은 없어지지 않을 지 모른다.(주-2)
극한적 문제를 극한적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극한적 쳇바퀴의 고통을 자초할 것이다.
벙어리가 되자는 얘기가 아니다. 장님이 되자는 말도 아니다.
다만 해는 계속 내일(來日)을 향해 뜨고 또 뜬다. 나의 주장을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뜻대로 조정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다면 그 조직, 그 사회는 희망이 없다.
인간은 다행스럽게도 동시에 두 가지, 또는 세 가지 일을 해낼 수 있는 지혜가 있다. 일하며 삼가 할 것을 알아서, 싸울 것은 싸우면 된다. 한풀이 하나가 해결되어야 비로소 다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유아적(幼兒的) 사고방식이다.
우리는 엄연한 성인이다. 지혜는 그래서 때를 필요로 하는 것인가 보다. 실제로 아이와 어른의 차이는 원하는 것을 전후 좌우 사정에 따라 미룰 수도 있고 잠시 다른 것으로 대체(代替)할 수도 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말이나 몸에 배어들지 못하니 문제일 따름이다.

주: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입마다 소리가 요란한 1989년 6월은 1989년 8월 15일 노태우 대통령으로 하여금 자주. 평화. 민주 방식의 통일 3대 원칙을 제시하게 하였다. 그해 9월 11일엔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을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89. 6. 당시나 2002년 현재 바뀐 것은 무엇일까?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서 환영 인파를 체험한 것과 이산가족의 값진 만남이 있었으나 2002년 2월의 단절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답답하기만 하다. 마침 拉北인사들의 명단이 숨겨져 있었던 사실이 드러나 지금까지 송환을 요구할 납북(拉北)인사가 없었다는 정부의 어눌한 변명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 恨풀이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겠다는 입장에 있었던 그들이었기에 하는 말이다.
(주-1): 세상에 태어난 지 만 67년, 2002년 2월 나의 아들은 정신과 專門醫가 되었다. 참으며 터트리고 싶었던 울분을 토하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이 더 조용해진다. 무서울 것이 없어진 지금 몸보신이 아니라도 뜻을 알 듯 하다. 2002년의 大選을 앞두고 새판을 짠다고 야단스럽고 숫한 게이트로 얼룩지는 세상이다. 醫藥分業으로 떼돈을 벌게 된 의사들도 苦痛분담 차원에서 保險수가를 내리기로 했다는 정부의 발표는 어이가 없으나 그저 所任대로 살다가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그 이유다.
(주-2): <양심선언, 할당제, 줄서기; 원칙은?>이란 題下에 中央일보에 실린 글이다. 김근태 의원이 2000년 민주당 最高위원 선거에 선관위에 신고하지 않고 쓴 돈이 2천 4백 만원이 된다고 2002년 大選 민주당 후보 경선 과정에서 良心선언을 했다. 뒤이어 良心선언은 고백성사인데 죄를 묻는 다면 문제라고 주장했다. 기본 입장엔 찬성한다. 하지만 다음의 글을 올린 이유는 그것도 모두에게 공평해야 한다는 점이다. 정치인만 해당된다면 형평성의 문제가 생긴다.

45072 번째로 정동철님이 2002-03-06 05:30:1에 글 올림 31번 읽음
특정인의 양심 선언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살다보면 수 없는 죄를 짖고 살죠. 양심 선언 후 모두 용서를 한다면 그 악순환은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차라리 어느 날짜를 정해놓고 그때까지 양심 선언을 한 사람은 불문에 부치고 그 후 법대로 한다면 모르되....
둘째, 고교 줄서기나 할당제(가령 여성, 학벌, 지역 등)에 대한 정서는 우리가 능력 본위의 민주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편을 갈라 할당제를 하는 전근대적 입장에 있는지 모호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통 아저씨들의 할당제를 무척 못마땅해 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대체 할당제나 줄서기의 원칙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요?
모두에게 두루 통하는 원칙을 정해놓고 그것을 근거로 문제를 융통성 있게 풀어 가는 그런 멋진 사회는 불가능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