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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좌표(座標)」 덧글 0 | 조회 637 | 2019-06-25 20:09:41
관리자  

마음의 좌표(座標)

2019.06.25.

정신과의사 정동철

 

심각한 수렁에 빠졌다. 움직일수록 더 들어간다. 빠져나올 가능성이 없다. 어쩌다 이지경이 되었을까?

 

똑 같은 것을 같은 시간에 동일장소에서 봤다.

해석은 그러나 모두가 다르다. 사람들의 얘기다. 왜일까?

 

답을 알 수가 없다. 그런 현상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나의 시도는 애진작 잘못 짚어서였을 것이다. 사람의 뇌가 한결같이 똑 같지 않으리라는 점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럼 당연한 결과다. 의문이 생겼다. 세상에 태어날 때 그 뇌가 사람마다 해석방식을 달리하라는 유전정보를 가지고 나왔을까? 유아시절에도 그랬던가? 의문의 출발점이다. 내가 내 마음의 좌표바닥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1950625일 래디오방송에서 당시 이승만대통령의 그 미국적 특유 액선트가 붙은 말씨가 흘러나왔다. 소상한 내용은 기억되지 않는다. 방송은 반복되었다. 괴뢰군38선 전역에 걸쳐 일요일 새벽 일시에 남침했다는 것, 이제 우린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게 될거란 얘기가 떠돌았다. 신났다.

삼일 후 그러나 628일 아침 남영동에서 삼각지로 향하는 대로에 굉움이 들렸다. 씻은 듯 세상은 고요했다. 달려갔다. 내가 살던 개천 이쪽 삼각지편 콘크리트 뚝방에 달라붙었다. 처음 들어보는 굉음의 정체 뭐지? 드디어 탱크가 나타났다. 대포가 나를 향하고 있는 듯 놀랐다. 줄행랑 집으로 뛰어들었다. 옆집 식구들과 우리집 식구들은 솜이불을 내어 뒤덮고 벌렁벌렁 숨소리를 잃었다. 볶아대는 요란한 따발총소리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내 함성이 들려왔다. 웬 함성? 다시 그 자리로 뛰어나갔다. 무시무시한 탱크가 아니라 거기엔 환영인파 일색의 함성, 놀랐다. 언제 준비? 이럴수가? 세상이 확 바뀐 것이다. 대형 빨간 깃발, 손과 손엔 적색기들(인민기) 뿐이다. ‘김일성장군 만만세!’

미아리에서 피난봇다리들이 한강으로 몰려들었지만 설마했다. 한강인도교는 이미 끊겼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머니 말이다. 이웃과 애그머니 연발하는 사이 우린 그 자리였다. 2가 된 어린시절 뇌에 뭐가 저장되었을까?

인민군은 괴뢰가 아니었다. 탱크속에 장조림까지 내주는 병사들 웃음을 나누는 같은 한국사람이란 것을 얼마후 동네에서 보고 같이 웃었다.(대학병원-서울대에서 100명쭘의 국군부상병과 의사를 학살한 탱크부대란 것은 나중에 알았지만) 침략군의 호의? 신기했다. 평양에서 점심은 고사하고 뒤따르는 얘기들 남침이 아니라 북침 신의주가 목표였다고.. 프로펠러 훈련기 10대가 공군력 전부였던 대한민국, 마침 일요일을 이용해 후방휴가로 비워진 전선을 급습한 것은 북괴였지만 말은 달랐다. 에치슨이 방어선을 동해로 후퇴하여 빌미를 줬다든가, 여기서 총질을 하는 바람에 탱크로 밀고 내려왔다던가.. 과연 그 결과 전 전선에서 반사적으로 일시에 그렇게 내려올수가 있었을까? 우발적으로?

 

하늘엔 솜방울처럼 고사포가 B-29 꽁무니를 따라 팡팡터졌다. 솜방울보다 높이 날으는 유유한 비행기로 팔뚝에 폭탄상처를 입고 여기저기 엄청난시체무덤을 본후 새술막(성남 수진면 고등동) 피난살이가 시작됐다. 우리 산에 미그비행기가 처박혀있는 것을 보고 어린 마음은 학교대신 목탄인지 카바이트인지 어쩌다 한번씩 다녀가는 버스뒷꽁무니 매연냄새가 좋다고 우르르 쫓던 때, 하늘의 비행기가 아차아차 저라다 부디치지하는 순간 왠걸 정말 부디쳐 떨어지는 하얀 연기들... 역사를 쓰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듬해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 끝없는 피난행열속에 쏟아지는 잠, 이기지 못해 눈위에 쓸어져 동사(凍死), 목적지도 없는 그 피난행열 와중에 누군가 실언(?)의 대가로 직석 총살을 당하는 끔찍한 장면들, 전쟁이 아니고서야 해석할 수가 있었을까?

 

관심은 견해차에 꽂혔던 미지(未知)에서 비롯된 것이다. 6.25남침 평가는 물론 광화문광장 극한대립 견해차를 포함해 인간의 뇌는 같은 상황에서 같은 경험을 하면서 그 해석은 놀라울 정도로 달라야하느냐는 현상이 바로 그 연유다.

인간의 생존보존법칙 때문일까? 레밍(나그네 쥐)의 떼죽음과 달리 연연히 이어지는 인간의 존재들, 같지만 같아서는 안되는 그래서 죽고사는 갈림길은 있어도 인간의 전멸은 피할수 있게 설계된 유전법칙? 이해된다. 그것이 45열 종족보존법칙을 무시하는 결과에 이르면 난마처럼 복잡하질 뿐이지만.., 하여간 근원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는 원인 어디에 있을지 그 기전을 밝혀보겠다는 출발점에서 결국 수렁에 빠진 셈이다. 마냥 거기서 허덕이고 있는 중이다. 어디까지 가야 그 끝에 이를지 이제 숙제의 핵심이 바뀌고 있다. 마치 우주의 어느쪽 끝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출발선을 잘못 선택한 것이다. 그렇다고?

 

시공(時空), 지구상의 그것은 알겠다. 우주의 그것은 솔직히 나의 머리로는 알길이 없다. 750억년 전의 빅뱅이란 역사가 있었다면 분명 우주는 어디론가를 향해 달릴 것이다. 미래란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 정체를 모르겠다. 아니 몰라도 상관은 없다. 적어도 지구상에서 만이라도 알수있다면 그것 만으로도 다행이다.

정신과의사라는 입장의 관심사, 물질과 정신의 정체를 알아 정신장애로 허덕이는 사람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도와주려니 그 이치를 알아야 하겠다는 희망, 가당치 않은 출발점이었나? 우주공간은 휘어있다는 사실, 직진(直進) 빛이 휜다는 것을 밝힌 것은 아인슈타인이다. 다행이다. 이미 증명됐으니 말이다. 그러나 우린 서울에서 태국, 말레이시아등을 동남아(東南亞)라 부른다. 분명 남쪽은 맞다. 서쪽에 있는데 왜 동쪽이라 하지? ‘그린위치가 영국에, 그곳을 0도로 정했으니 극동이 여기라는 사실은 모르지 않지만 우주적 표현은 아니다. 지구상의 인위적 결정이다. 중요한 것은 그렇다고 인간의 좌표, ‘마음의 좌표가 정확할 수 있겠는가이다. 거시세계의 태양과 지구를 포함한 행성사이의 관계나 미시세계의 원자핵과 전자의 관계같은 에너지준위(準位)가 인간사회에 있다면 모르지만 증명된 바가 없고 거론되지만 가깝지 않아서다.

 

지구의 시간은 자명하다. 태양궤도를 돌고, 지구의 자전을 통해 시간개념은 알겠다. 지구의 위도(緯度)와 경도(經度)란 좌표를 통해 낮과 밤 여름과 겨울이 더욱 뚜렷해진다. 거기에서 사람들이 같은 것을 보고 달리 해석하는 연유를 나름 알게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내 생각이다.(정동철;2019.06.16. 20:49 서재)

위도상의 y축에서 x축으로 정확하게 90도가 되는 두 선은 결코 아무리 돌아도 만나지 못한다. 평행선,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경도상의 y축으로 똑같이 x축에서 90도가 되는 두 선을 그으면 그러나 사정이 달라진다. 북극과 남극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평행선이 아니다. 왜지? 지구가 둥글기 때문이다. 역시 수학자들이 예전에 밝힌 것이다. 거긴 유크리트상의 평면 직삼각형이나 직사각형의 내각이 180도나 360도가 아니라는 것, 이미 중학생들이 아는 내용이다.

왜 우린 같이 보고 같은 선을 그었는데 의견이 다른지 그것을 정신과치료에 적용하려는 것은 나의 발상이다.(여기서 결론은 밝히지 않을 것이다. 논문으로 발표된 후까진) 서울과 뉴욕에서 각각 두 지점을 출발점으로 두 형편을 가정해 보자. 정학하게 위도(x)에서 경도(y)90도를 그어본다. 위도는 평행이였다. 경도는 90도임에도 만나게 된다. 서울과 뉴욕의 그 선을 그은 사람은 분명히 말할 것이다.

네가 그린 것은 정확하게 90도가 아니잖아? 다시 그려봐!”

천만에 내가 아니라 말하는 너의 잘못! 분명 여기서 보니 90도가 아니군!”

끝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서울에서 y축을 향해 x측의 90도로 그어진 선과 뉴욕에서 y축으로 똑 같이 그렸다는 선이 북극에서 만나면 삼각형을 이룬다. 내각(內角)이 달라진다. 서울에선 서울을 중심으로 90도 삼각형이 뉴욕에선 90도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삼각형을 보게 된다. 뉴욕에선 그 반대현상, 좌우가 바뀐 삼각형을 보게 될 것이다. 동시에 위도상에서 x축으로부터 90도로 그렸으나 서로 해석이 달리진다. 결국 비난하기에 이른다. 같은 것을 분명히 같이 그렸음에도 달리 해석하는 사람들, 평면 옆이 아니라 곡면의 3각형 내각을 놓진 이유다. 각자 자신의 위치에선 90, 멀리 저쪽의 내각은 90도 보다 작기 때문이다.(정동철;2019.06.16. 20:49) 거기에 실마리가 숨어 있다. 뭘까? 발표전이다. 그러나 짐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서로의 의견이 달라지는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사랑하는 연인사이든 증오하는 관계든 같은 이치, 거기다 애증(愛憎)은 과학적 언어 즉 수학적 표현이 같지 않아 의견차는 불가피하다. 그렇다고 행여 과학엔 철학이 없다 강조하지 말 일이다. 과학자체가 철학이니까.(Werner Heisenberg-1932 노벨물리상. ‘철학과 물리학의 만남’-최종덕 옮김, 겨래글터,서울,1985)

대한민국 내에서, 심지언 가족사이에서까지 같은 현상은 분명히 벌어진다. 우리들의 정신세계가 곡면(曲面)이란 점을 놓지면 같은 90도를 그어도 의견차는 삼각형의 내각이 달라진 만큼의 관계를 줄일 방법이 없다. 목적을 달리한 경우 그러지 않아도 수학적 차이가 불가피한데 이념이란 혹세무민(惑世誣民)의 갖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의 이기심을 자극하면서 자신의 울타리로 끌어뫃으는 정치적 이해관계는 더욱 뚜렷하게 된다. 평론을 위한 목적이 아니다.

 

정신의학적 이른바 병적 상태라는 것은 같이 보고도 달리 해석한다는 점에서 같다. 불문율이든 어떤 사회규범이든 정한 임계치가 있기는 할것이다. 그것을 넘으면 환자가 된다. 그 근원은 같다. 정도차일뿐이다. 과연 인권 운운하는 말이 맞는 주장일까? 그 자체가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똑같은 처지일 거다.

조금전 반겼던 사람을 보고 모르겠단다. 장소를 몰라 집을 찾지 못하고, 때도 시도없이 먹고 흘리면 사람들은 치매현상이라 한다. ‘마음의 좌표가 망가진 탓이라며.., 뇌의 경도와 위도가 지워졌거나 꾾긴 것이 이유란다. 그러나 역시 정도문제다. 나를 포함 우리 모두는 정밀하게 계산할때(미시적 원자세계로) 깡그리 거기서 거기다. 누가 누굴 탓할 형편이 아니다. 이념? 우주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허구다. 물론 우린 인간으로 산다. 그래서 필요할지 모른다. 격투만 없다면 누가 탓할 것인가? 아니 파괴(전쟁)가 있어야 건설이 있다고 역사는 말한다. 정신장애가 있어야 건강함이 소중하다는 얘기와 다를바 없다. 그럴까?

 

당신은 이따금 남들이 쓰지 않는 말을 해서 나같은 사람을 궁지에 몰아요?”

아내의 말이다. 맞다. 우리가 쓰는 말 일상의 상식적 자연언어로는 척하는 꼴갑에 해당한다. 그러나 과학적 언어는 확실하게 증명되지 않는 수학적 언어가 없을 때 무용지물이다. 정치가들은 환심을 사서 동의를 얻어낼수있지만 과학적 언어론 불가능하다. 백일하에 증명된 수학적 언어가 아니면 누구도 믿지 않는다. 나치시대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1918 노벨물리상)나 아데나워를 만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1932 노벨물리상)가 원자탄에 관한 얘기를 할 때 엇갈렸던 것은 같은 이유다. 그나마 당대 석학인 물리학자들을 만나 대화라도 있었지만 한국의 현실은 아예 그런 상황자체가 일어나지도 않는다. 자연언어가 주류, 과학적 언어는 존재자체가 무시된다. 결과 원전(原電)에 관한 오판이 막대한 손실로 밀려왔지만 도리가 없다. 역시 마음의 좌표가 경도상의 평행선이 아니면서 90도만 강조하곤 정의구현이 압도하기 때문이라 강조한다.

 

마음의 좌표’, 그것은 위치감각만을 말하진 않는다. ‘나의 좌표’, 거기엔 퍽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적어도 정신과의사의 판단에선 그렇다.

내가 나 자신의 좌표를 안다는 것은 쉬운 듯 어렵다. 집의 가장, 남편이자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 그뿐이 아니다. 일가친척 사이의 위치감각, 처가 식구들과의 주어진 위상, 그것은 사회의 어떤 자리에 걸맞는 사회적 공통분모가 작동되고 있는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간단한가? 무척 어렵다. 남편의 역할을 정말 잘 하고 있나? 아빠의 역할? 할아버지의 역할? 솔직히 족보를 깡그리 들여다보고 해야할 얘기다. 필경 나는 걸맞는 위치감각속에 그 자리의 필요한 역할을 다 하고 있다 여기지 않는다. 턱없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직장의 위치, 거기에 걸맞는 역할, 내가 사회통념상 그 자리에서 해야할 마땅한 일을 얼마나 정확히 알며 수행하는지 먹먹해 진다. 사회인으로서 사람과의 관계로 이어지면 미쳐 깨닫지 못했던 문제점들이 줄줄이 수면위로 오물처럼 올라 온다. 과연 그 사람을 있는대로 알고 나 또한 나의 값에 해당한 진지한 역할을 알기나 하면서 응대하고 있는 것인지?

그뿐인가 시시때때로 변하는 사회적 주어진 자리의 위상과 역할이 달라진다. 나이에 걸맞는 시대적 때에 따른 역할 머리통이 깨질 지경이다. 인생 말년의 늙은 노인이, 그렇다고 젊은이와 등지고 살 수 있는 경우는 없다. 과거에 함몰되어 시대적 노년값을 강조만 할 수가 없다. 어울리고 이해하는 가운데 들어주며 일러줄 수 있는 그런 능력애 대해 확실한 좌표를 가지고 있느냐고 물으면 입만 딱 벌어진다. 자신이 없다이다.

간단히 가장으로서 남자로서 의사로서 늙은이로서 국민으로서 지역사회인으로서... 적절한 표준이 되는 위상과 역할을 이해하며 수행할 수 있는 건지 그들을 포함한 좌표를 안다는 것, 솔직히 벅차고 힘겹고 전연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한숨이 절로 터져나오는 자화상만 보게 된다.

물론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훌륭한 좌표를 알아 익숙하고 바람직한 모법적 역할을 다 할 수 있는 사람말이다. 가령 현실을 파악해서 생산적 역할을 하는 사람,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잘 알고 사회적 덕목이 뭔지 알기에 결코 비굴하지 않게 타협의 묘를 살리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융통성과 놀랍게도 긍정적인 사랑(인정)이 몸에 벤 상태로 살아간다. 뿐인가 자신의 언행에 책임감이 투철하다. 상담을 통해 그런 사람을 지향하며 도와주겠다는 나, 정신과의사는 과연 해당되나? 턱없이 모자란다는 점을 인정한다. 바로 이런 것들이 좌표(座標)라는 것이다.

 

요약한다.

지구상의 위치좌표의 오해로 시작된 얘기, 오해는 불가피하지만 거기에 감정에 따른 선입관이 개입하면 증오로, 요컨대 평면사고(平面思考)에 머물러 입체사고(立體思考)로 성숙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국가적 위상의 책임자로 올라가면 여기에 열거하기도 벅찬 내용들이 줄줄이 엮여나올 것이다. 치매라는 말을 했었다. 사람을 몰라보고 장소도 알지 못하며 때(시간)가 언제인지도 모르니 자신의 존재의미를 알수가 없다. 간단히 좌표의 모습이라 하나 그마져도 정밀하게 따지면 글세다. 과연 내가 치매가 아니고 적절한 마음의 좌표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일까? 자신이 없다. 그렇게 못한다는 사실, 아내에 비해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 겸손만은 아니다. 지식이 높고 낮다는 것은 한참 뒤의 조건일뿐이다. 그나마 내가 나의 현주소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 실제 거기에 걸맞는 언행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제쳐놓고라도 다행이라 여길 건덕지가 있다면 주제를 조금은 안다다. 나라의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 얼마나 그 좌표가 힘겹고 막중하며 고될까?

아내는 TV를 좋아한다. 연예프로, 인간극장.. 그리고 스포체센터의 친구들, 권사로서의 위상, 꿀리지 않는 가운데 매우 건강한 삶의 좌표를 가지고 있다. 여기 실리고있는 나의 글들은 아예 보지 않는다. 아내뿐이 아니다. 같은 정신과의사 아들도, 교수 딸과 딸들도, 물론 병원 100명에 가까운 직원들도 보지 않는다. 구지 이곳의 존재자체를 알릴 생각이 없다. 그러나 모두가 나름의 적절한 사회적 좌표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나다. 금년들어 TV 자체를 보지 않는다. 고집? 뉴스를 봐야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 연유다. 그렇다고 정리된 소식란은 스마트라든가 바로 이 컴에도 있다. 미국에서 영국 그리고 국내 신문 특히 쌍봉을 늘 잊지 말라는 충고에 따라 단편적으로 본다. 결국 집에서 아내와 같이 앉아있는 시간은 TV를 껐을 때의 경우다. 그만큼 나는 폐쇄적이란 의미다. 마음의 좌표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고 아내와 투닥거릴 일은 없다. 노화현상으로 흐르는 시간을 쫓기가 힘들뿐이다. 확률적으로 이미 정해져있는 결과 어떻게란 관찰방식만 숙제일 뿐이다.

 

치료에 어떻게 응용한다? 심각한 나의 숙제, 생각하고 숙고하고 마치 정신나간 사람처럼 휘집고 쑤셔댄다. 제명에 가게 될까? 운명이겠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에르빈 쉬레딩거(1933 노벨물리상;생명이란 무엇인가? 정신과 물질.전대호옮김.궁리출판,서울,2007)가 주장하는 물질과 정신에서 원자세계의 불연속성과 상보성(닐스 보어;1922 노벨물리상)에 이르면 볼츠만의 통계역학(Ludwig Boltzmann,1844­1906)적 해석을 감히 거론할수 없음을 알게 된다. 바로 유전방식에서 돌연변이라는 비주기적 결정에 이르면 사정은 더욱 복잡해 진다. 잡다하게 조작된 통계가 아니긴 하나 아내와의 좌표를 더욱 멀게할지도 모른다. 치료자? 세상사 두루 알아야한다는 점에서 과연 전문성으로 뭔 효과를 얻을 수 있을까? 나 자신의 좌표, ‘마음의 좌표그 자체가 불확정성원리(하이젠베르크)에 해당할진데 결론을 일단 이쯤에서 끝내기로 한다.(이러지는 후속 내용은 완성되는 대로 밝힐 예정이다.)

 

사람들 사이의 오해는 불가피하다. 그 이치는 설명이 됐다. 정신의 곡면(曲面)과 곡률(曲律)을 증명하진 않았다. 그러나 1차원 평면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적어도 3차원 세계, 지금은 초끈이론이나 11차원의 M이론의 우주를 증명해 가려는 현실에서 적어도 정신의 곡면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현상일거다. 따라서 나와 너의 삼각형 90도가 나를 중심으로만 있을 뿐 너에게 있다는 점을 아무리 봐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린 똑바로 알고 있는 셈이다. 과연 의견의 일치가 보증될수있겠나? 그런 현상을 진하게 이해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의 좌표’, 자신의 좌표는 자신의 운명을 위한 선택에서 엄청난 지름길을 얻게 된 셈일 거다. 들을 줄 알아 싸울 일이 없으니 말이다. 앞에 말한 좌표의 의미를 전제로 나 스스로에게 강조하는 제한적 결론인 셈이다.

여기에 예상을 초월하는 수많은 원자들의 통계적 법칙이 유기체에 작동하고 있음을 염두할 필요가 있다. 유전과 사고(思考)의 정체를 알기위해선 그렇다. 엄청난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아직 거기에 이를 눙력은 제한적 결론속에 내포된다. 다만 평화를 논하기에 앞서 최소한 원자탄의 침략적 행위는 지구상에선 아예 정령 없어져야 한다는 공감대, 그것만은 간절히 바라면서다. (2019.06.25.)

 

참고: 글중에 지구상의 위도와 경도를 운운하면서 직삼각형이란 기하학적 표현을 빌려 AB사이의 와전 합동에도 불구하고 해석상의 우리의 차이점을 밝힌 것이 있다. 이를 통해 인간의 감정과 인지상 결과에 대한 오류는 불가피한터에 보태고 빼는 거짓말이 가세하면 심각한 문제점 오해와 갈등이 일어나게 될 것이란 점을 풀이한 점, 거기에 혼돈이 없도록 하기 위해 위도(x)와 경도(y, 자전축)는 각각 지구상의 x,y 중심선을 전재로 풀이했다는 점을 밝힌다. 자전축의 경도와 공전축의 위도가 직선과 곡선으로 갈리는 이치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라는 전제를 고려하였으므로 이해되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솔직히 난해한 부분이 있고 오해의 소지가 표현상의 한계로 불가피했다는 점 아울러 밝혀둔다. (2019.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