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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우리의 아들딸 덧글 0 | 조회 15,749 | 2009-04-17 00:00:00
정동철  


- 우리 집, 우리의 아들딸 -
1986년의 글임을 밝혀둔다.

‘발전, 그리고 평화’가「청소년의 해」의 목표라고 했다.
바로 85년 지금이다. 그렇지만 각종 방송 및 활자 매체와 대부분의 식자들이 한결같이 하기 좋은 말로 떠벌리는(?) 것은 「어린이날」의 의미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크다. 뚫려진 입으로 듣기 좋게 가공할 뿐 속내는 딴 곳에 있다는 얘기다. 아주 솔직히 말하면 관심 밖의 억지 음흉한 웃음 같은 연기들이다.
고궁이나 공원을 무료로 공개하고 최소한 그날만이 아니라 한 해 동안 내내 그런 마음으로 어린이를 위해 뭔가를 흠뻑 베풀어 보자는 제안을 내놓는 사람들이다. 당연히 나쁠 것이 없다. 다만 그랬을 때, 우리들의 청소년은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 그 점을 얼마나 고민했는지 궁금해진다.
모두가 알다시피 대학 입학 전형을 끝낸 지 얼마 안 되는 사이에 해마다 겪는 눈치와 요령과 배짱이 대학 당국의 돈벌이 궁합과 맞아떨어지는 사실에 허탈감을 달래기 어려운 사람이 많다. 청소년이 배웠다는 그 3대 처세술(눈치, 요령, 배짱)은 연이어 입사시험으로 이어지고 있다. 신문과 방송은 붓과 입을 모은다. 그것은 한마디로 과잉보호 때문이었다고 또 비판이다.
발단은 어떻든 가정(家政)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 사회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도록 분위기를 조성한 책임이 1차적이지만 좌우간 그렇게 치맛바람과 돈버는 벌레로서의 어버이가 됐던 것은 확실했다. 좋게는 우리의 교육열이 뛰어난 까닭이라 말할 수 있다. 전통 사회에서 억압된 모성(여성)적 역할이 자식의 교육열로 승화되어 자기희생을 무릅쓰고 그렇게 발전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러나 결과다.
무엇이든지 원하면 안 되는 것이 없고, 일단 공부만 줄기차게 잘했다 하면 되지 않는 일이 없게 되어 막상 욕구 좌절을 경험할라치면 일대 난리가 나고 만다는 사실이다.
끔찍한 표현이지만 자살을 하든가 죽이든가 끝장을 보아야 하는 판국이다. 타당한 행동의 범주(範疇)를 모르고 공격성을 참지 못해 뜻대로 남을 조절할 수 없게 되는 날이면 발작적 울분을 토하고 만다.
반대의 경우도 생긴다. 복종, 의존, 무감동이 극에 달해 이른바「예스맨」이 되어 독립심은 고사하고 자기주장을 못해 흐느적거리며 오직 아부로 일관하기도 한다.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모두가 과잉보호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청소년의 해」에 다시 과잉보호를 계획하고 있다. 그들을 어떻게하면 보다 안락하고 고통없이 훌륭하게 키울까 궁리를 하는 것이 전부다. 남들은 참여, 발전, 평화를 강조하고 있는 터에 우리들 나리들의 발상이다.
나라밖의 주장은 이렇다.
지역사회에 청소년이 참여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웃의 고통이 무엇인가를 참여함으로써 알아, 봉사라는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도와줌으로써 지역 사회의 발전을 꾀해야 된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그것이 순조롭게 되면 결국 지역사회 상호간의 평화가 깃들고 그것이 커져 세계 평화의 기초가 될 수 있다는데 뿌리를 둔 계획인 것이다. 청소년은 관객이 아니다. 무대 위의 연기자로서 곧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청소년기의 가장 큰 혼란은 정체감(正體感)에 있다고 말한다.
사춘기를 기점으로 신체적 급성장과 더불어 이성에 대한 관심과 함께 전연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어 폭풍 노도와 같은 각종 변화를 맞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 문제 해결을 꾀해나가려는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이 인다. 자신이 없는 만큼 거칠기만 하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남자인가, 여자인가? 나는 왜 사는가? 나는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끊임없는 의문에 휩싸여 좌충우돌, 이리저리 부딪친다. 때로는 거세게, 때로는 엉뚱하게, 때로는 돌발적으로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한다.
지금까지의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한다. 여행, 모험, 독서, 운동, 사색, 그런가하면 한편에선 성적(性的) 추구, 술, 담배, 싸움, 반항 등의 행동이 유혹된다. 이유 없는 반항아, 무서운 아이들은 부모를 당황하게 하는데 때마침 청소년의 부모는 대개 중년으로 향하는 시기를 맞는다.
부모들은 자신의 인생 주기에서 결혼, 출산, 자녀 양육기를 거쳐, 결혼 중반기에 이르니 생활의 안정과는 달리, 젊음을 잃어가는 아쉬움과 허망함에 자녀를 자기들 곁에 계속 묶어두기를 희망한다. 특히 중년기의 언덕을 넘어가는 어머니에겐 더욱 그렇다. 남편이 사회적으로 정착된 것에 비하면 커다란 대조이기에 그렇지 않고서는 균형을 유지할 수가 없다. 벗어나려는 청소년과 그들을 잡아두려는 어머니 사이의 갈등은 급기야 돌연변이 같은 발악으로 나타난다. 비행(非行) 소년소녀가 태어나는 이치이다.(주-1)
당연히 부모는 가정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청소년 문제의 유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어째서 문제를 일으키게 되느냐에 관심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1. 정서적 유대 관계의 보급
2. 인생 출발의 안전한 기존 캠프
3. 행동 규범의 습득
4. 생활 경험의 공급
5. 의사소통의 광장(廣場) 등이 가정에서 자녀에게 제공되는 중요한 기틀이다.
가정의 역할이 성실하지 않거나 불투명할 때, 자녀와 부모 사이에는 괴리 현상이 일어난다. 따라서 열거된 가정의 역할이 모두 이루어져 자녀로 하여금 독립된 개체로서 용기를 지닐 수 있게 했다면 그것이 곧 참여, 발전, 그리고 평화라는 국제연합의 공동 목표와 일치되는 길이 될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들 모두가 바라는 소망이자 곧 건전한 가정과 자녀 관계를 다시 복원하는 길이 된다.
불행하게도 그것을 파괴하는 것은 정책 주체자들의 이해관계와 악연을 갖고 있다. 안타갑다. 결과 우리 집, 우리의 아들딸들의 입장은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다.(주-2)
가해자의 깊은 상처를 받고도 원천적으로 한마디 말도 못하는 형편이 될 때 그 결과는 재앙과 같건만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다.

(주-1): 2002년 현재 주부의 입장은 많이 변했다. 자녀에 대한 관심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인생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여기는 마음에 회의가 파고든 것이다. 20여 년간의 삶을 포기하고 이혼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그러니 정반대로 집밖을 향하기 일쑤다. 관심밖의 청소년들은 따로 어울릴 수밖에 없어진 것이다. 혹자는 그 반대의 메커니즘이 원인이라 한다.
(주-2): 2001년 이른바 ‘이해찬 1세대’의 하향 평준화가 심각한 문제에 봉착되었다. 그 원인이 과연 우리의 자녀들이 장차 어떤 사람으로 성장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사료와 연구가 선행된 것인가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관심 집중이나 미묘한 이데올로기적 의도였다면 장차 이 나라의 미래는 대단히 위험하게 될 것이다. 영화 ‘친구’나 ‘신라의 달밤’에서 학생의 덕목은 철학적 미래지향적 인간이 아니라 말초적 ‘조폭(힘)’의 과시로 대치된 것이 바로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모두 히트 작품이라는 점이 그 의미를 더욱 극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뿐인가, 1년 전의 수능 점수에 비해 무려 80점이 떨어지고 나니 이들 1세대들은 이래저래 혼란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