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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로서 느끼는 나의 고민 덧글 0 | 조회 15,469 | 2009-04-17 00:00:00
정동철  


- 아버지로서 느끼는 나의 고민 -
1990년대 초의 글임

태릉으로 가는 새벽길은 유난히도 안개가 많았다. 아직도 잠에 취해 몽롱한 녀석을 뒤에 태우고 아내와 나는 국제 빙상 경기장으로 갔다.(주-1)
모두가 긴장된 시간이다. 반 년 남짓 훈련을 하여 하여간 메달과 상장을 받아든 세훈(世勳)막내아들이자 외아들이는 그래서 그날 대회에 참가할 자격이 있었다.
링크 주변엔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선수마다 두세 명의 가족들이 와서 발을 동동 구르는 추위에다, 긴장감이 감도는 빙상 속도 경기를 지켜보노라니 몸들은 더욱 와들와들 떨리고 입마다 하얀 입김은 차디찬 공기 속에 맥없이 부서지고 있었다. 나와 아내도 거기에 그렇게 있었다.
여기가 좋을까 저기가 좋을까 자리를 잡으러 왔다갔다하는 사이에 녀석은 출발점에 들어섰다. 초등학교 3학년, 얼굴은 창백했지만 폼은 그럴듯했다. 아내와 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그를 응시했다. 겉으로야 안절부절하는 아내를 감싸고 별로 재주도 없는 말솜씨로 그 기분을 희석시키려 지껄였지만, 내심 나의 마음이 차분하지 않았으니 별 효과가 있었을 리 없다.
드디어 출발했다. 추위는 갑자기 사라지고 열기가 온몸의 피를 달구고 마음은 아들과 함께 얼음판을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마지막 코너로 재빨리 자리를 잡았다. 최종의 힘과 용기를 강조하는 곳으로는 그만한 장소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소리를 지르고 떠들만한 주변머리는 없었지만 녀석이 나를 본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힘이 되리라 생각했던 이유다.
녀석은 신나게 달렸다. 8명이 무리를 지어 엇비슷하더니 두 번째 코너를 돌면서 선두 주자 세 명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자랑스럽게도 녀석은 그 속에 있었다. 마지막 코너만 넘기고 힘껏 달리면 오늘의 성과는 만족스럽다고 느낌이 왔다.
코너를 돌면서 두 번 째로 나서고 바야흐로 앞의 놈을 제끼려는 순간이었다. 앞의 놈 스케이트 날이 세훈의 앞발을 건드리자 균형이 흩뜨러지면서 머뭇거리자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동시에 작은누나가 울음을 터트렸다. 창백해진 녀석의 얼굴은 금세 울상으로 바뀌었고 나를 본 듯 반사적으로 절망감이 터져 나왔다.
“아빠, 나 어떡해-”
철렁했다. 가슴에 고드름이 꽂히는듯 섬뜩했다. 그가 일등을 할 수 없게 됐다는 아쉬움이 아니었다. 예기치 못한 사태로 쏟아진 그 감당할 수 없는 좌절감이 어떤 형태로 그에게 영향을 주게 될 지 그것이 겁났다.
다행히 녀석은 재빨리 일어나 끝까지 달렸다. 그러나 끝내 그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와 아내와 그리고 두 누나는 넘어지고도 4번째로 들어온 녀석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사실 대견스러웠다. 큰누나가 달려나가 얼싸안았다. 하지만 미끄러지며 내뱉은 그 한 마디는 영영 사라지지 않는다.
“나 어떡해”
그는 매일 새벽 엄마와 아빠가 고생하며 따라다닌 것을 잘 안다. 기대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너무나 몸으로 느껴 알고 있다. 그 기대를 무참하게 조각낸 자신의 결과에 당황한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아내와 내가 말은 안 했어도 그에게는 무언의 압력으로 입력됐다는 증거다.
너는 일등을 해야 한다

나는 고민과 갈등이 없었다. 삼 남매를 키우면서 마음 아픈 일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고민하며 갈등을 겪어야 할만큼 그런 큰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의 일을 자신이 알아서 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지 않는 가운데 익혀 왔다. 당연히 결과에 이유나 핑계를 대지 않는 버릇을 갖게 되었다.
삼 남매 모두는 건강하다. 딸 둘은 이미 대학원과 대학을 나왔다. 첫째 딸은 결혼을 했고 둘째는 상당한 봉급쟁이가 됐다.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용돈을 주지 않는 우리 집에선 스스로 살지 않으면 안 된다.
막내 녀석은 이제 고교 2학년이지만 역시 모든 것을 혼자 해가고 있다. 그것이 편하고 몸에 익숙한 것이다.
지금 결코 그는 말하지 않는다.
“아빠, 나 어떡해!”(주-2)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각인(刻印)된 것인지 그것만은 나는 아직도 정확히는 모른다.


(주-1): 1981년 겨울, 막내 世勳이가 빙상 대회에 참가한 것은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당시 경기장은 태릉 야외 링크가 최대 규모였다. 핫도그를 파는 곳을 제외하고는 실내가 없는 한데였다. 새벽길은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안개가 늘 짙게 깔려 있었다. (주-2): 이 글은 1987년 대교 문화에서 출간한 <아버지, 우리 아버지>에 실린 글이다. 이 한마디는 그러나 그에게 뭔가 큰 시험을 보게 될 때 결과에 대해 소심한 편이 되었었다. 의과대학 시험을 보고 나와 한 말이 “떨어졌어!”였다. 2002년 1월 정신과 전문의 1차 시험을 보고 2차 구술 시험을 준비할 때 그의 아내에겐 그 영향이 짙게 파급되었다는 것을 후에 알았다. 2차 최종 합격이 되어 지금은 전문의가 되었지만 악몽은 아직도 그때의 꼬리가 엿보이는 듯 하다.